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 오는 것이겠지요.
안도현 / 겨울 편지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 비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이정하 / 사랑의 우화
처음 마주치는 순간
너는 큰 강이 되어 나에게 흐르고
나의 마음을 가로질렀다
하는 수 없지,
차마 건널 수 없어 평생을 너의 강변에 걸터앉아
네가 마르기를 기다릴밖에.
서덕준 / 마르지 않는 강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번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도종환 /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中에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었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김승희 / 장미와 가시 中애서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경주 / 외계
참으로 슬퍼할 일 너무 많아도
이제 울지 않기로 하자
한 세상 울다 보면
어찌 눈물이야 부족할 리 있겠느냐만
이제 가만가만 가슴 다독이며
하늘 끝 맴돌다 온 바람 소리에
눈 멀기로 하자.
이 가을,
자신에게 너무 혹독하게
다그치지 않기로 하자
아니야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기로 하자.
박영 / 하늘로 가는 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임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 선운사에서
여자에게 버림 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 / 선운사 동백꽃
모든 빛은 전부 네게로 향하고
꽃가루와 온갖 물방울들은 너를 위해서 계절을 연주하곤 해
모든 비와 강물은 너에게 흐르고 구름이 되고
다시금 나를 적시는 비로 내려와
모든 꽃잎과 들풀, 그리고 은빛과 금빛의 오로라는
세상이 너를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빛깔이야
밤이면 네가 하늘을 잔뜩 수놓는 바람에 나는 아득하여
정신을 잃곤 하지
아,
세상에 너는 참 많기도 하다.
서덕준 / 세상의 빛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