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4일, 저는 전쟁기념관에 전화 한 통을 걸었습니다.
- 여보세요? 전쟁기념관 유물기증 받는 곳 맞나요?
- 네, 맞게 거셨습니다.
- 제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됬던 무기 유물을 하나 기증하려 하는데요.
- 무슨 종류의 무기인가요?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 수류탄이요.
제가 이 말을 꺼내자 전화기 저 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하긴 그럴 만 합니다. 뜬금없이 웬 폭탄을 얘기했으니 당황했겠지요.
전화 저편에서 잠깐 이어진 침묵이 끝나고, 담당자 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 저 선생님....수류탄 같은 무기류는 일단 경찰서에 연락하셔서 불법무기 신고를 하시고 신고를 하실 때 전쟁기념관 측에 맡기겠다는 각서를 쓰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 측에서 인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불법적인 무기인 이 물건을 함부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이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기폭장치(뇌관) 밎 폭약이 없고 외피만 있었기에 폭발의 우려가 없었고....
......무엇보다 외피가 도자기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의 정확한 명칭은 4식 도제 수류탄이라고 하는 구 일본군이 사용하던 물건입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해당 항목 링크)
엔하위키(라그베다 위키) 해당 항목 링크
뭐 링크를 타고 가 보시면 설명이 나와있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2차대전 말기에 물자가 모자라게 된 일본은 수류탄 외피를 금속 대신에 도자기를 구워서 만들자는 막나가는[...] 발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잘못 넘어지기라도 하면 자폭 + 대규모 팀킬이 벌어지기 쉬운 이 물건을 양산합니다.
위력도 외피는 도자기, 화약은 저급 화약을 사용하다 보니 당연히 신통지 않았고, 그러면서 흙덩이라 쓸데없이 무게는 많이 나가고 깨지기 참 쉽기까지 한 물건이라 당연히 미군 상대로 사용되었기는 하지만 큰 전과를 올리기에는 부족한 물건이였지요.
그런데, 이 물건이 전후에 대규모로 폐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제가 다니는 대학의 서클(동아리)에서 어느 날 입수하게 됩니다.
국제정세, 안보, 군사 관련 연구를 하는 서클이다 보니 서클 회원들은 밀덕은 기본, 군장수집 밎 리인엑트는 기본교양, 건덕후는 준필수(...?), 오덕은 고확률(...???)에 예비역 육상자위관, 퇴역 해상자위관, 현역 육상자위관 등의 이쪽 계열에 관심이 많거나 아예 직업으로 삼은 인원이 많았기에 저희 서클에서는 이번에 우리가 직접 가서 이 물건을 한번 땅 속에서 파내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월, 저희는 도쿄 인근에 있는 해당지점으로 5명의 인원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까 파편 등의 부서진 조각은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려 있었는데, 대부분 진흙이 잔뜩 묻어서 지저분한 상태였고, 대부분 어디 한 군데씩 깨지거나 망가진 조각들이던 터라 파손이 없는 온전한 물건을 찾아 여기저기에서 구멍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간 제 일본인 지인들의 신변노출을 막기 위해 얼굴을 가렸습니다)
땅 속을 파내도 파내도 조각들이 쌓여 있을 뿐이라 찾느라 좀 애를 먹었지요.
주변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파낸 물건을 한 번 간단하게 씻어내는데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상태가 멀쩡하다 싶은 물건을 좀 모아봤습니다.
처음 찾을때는 안 나와서 고생을 했는데, 한 번 나오기 시작하니까 말 그대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이건 수류탄에 찍힌 관인이 남아있는 파편입니다.
이 관인을 통해 제조된 공장과 시기 등을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일련번호 내지는 총번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번호입니다.
아무튼, 발굴(?)현장 얘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1월달에 땅 속에서 파낸 저 물건들은 저희가 파낼 당시에 자기가 파낸만큼 가져가기로 정한 터라 저는 멀쩡한 도자기 외형이 남아있는 물건을 조금 챙긴 다음에 단면도를 보기 위해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진 물건을 좀 구하고 난 뒤에 파내기를 중단했지요.
그런데 이 와중에 같이 간 일본인 지인 한 명은 파다가 신들렸는지 파손이 없는 물건 수십개를 혼자서 파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 물건을 파내고 난 뒤에 2월달이 되어서 저는 일시 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당시, 저 물건을 일본에서 스티로폼으로 포장을 하고 가방에 넣어 공항에 직접 휴대하고 들어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걸 도자기로 생각한[...] 덕분에 국제선 비행기를 탈 때에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비행기에 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한국에 와서 부모님께 보여드렸는데, 처음에 일본에서 70년 전에 만들어진 도자기라고 했을 때에는 놀라시면서 이거 귀한거 아니냐[...]고 하시던 어머니께서 사실 이건 수류탄이라고 설명을 하니까 바로 쓰레기 취급을 하시는 바람에[...] 좀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서, 저는 전쟁박물관 측에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 그래요? 그런데 이게 사실 기폭장치나 폭약 같은 건 없고 외피만 있어요. 그런데다가 이거 외피 재질이 도자기라서 경찰에서 안 받아줄 것 같은데요[...]
- 그래요?.....어......
다시금 잠시동안 전화통 너머의 전쟁기념관 측의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 선생님, 그러면 저희가 한 번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경찰청에 한 번 문의를 해 보겠습니다,
- 예 알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가 되자, 경찰청에서 전쟁기념관 측이 바로 인수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법규해석이 나왔다는 연락이 오더군요.
전화를 통해 그 다음날 전쟁기념관 측 과장님 한 분이 직접 나오셔서 물건을 인수하러 오시기로 약속을 잡았지요.
전쟁기념관에서 직접 제 집으로 찾아와서 물품을 인수해 가셨는데, 생각지도 않던 소정의 기념품을 명함과 함께 다 주시더군요.
(명함에 적힌 내용은 일단 가렸습니다)
선물상자 내용은 나진칠기로 만들어진 볼펜, 레터나이프, 명함케이스, 열쇠고리 등이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기념품을 받았다는 것을 안 제 가족들은 그딴 쓸데없는 수류탄보다 나진칠기쪽이 더 가치가 있다고 저를 디스(?)했습니....
그리고 며칠 전, 전쟁기념관 측에서 제 한국 주소로 우편이 하나 왔다고 얘기를 들어서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부탁을 해서 물건을 받았습니다.
열어보니 안의 내용은 전쟁기념사업회 측에서 보내온 물건이더군요.
기증서에는 제가 낸 물건과 이름 등의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일단 이름은 숨겼습니다.
2014년도에 기증받은 물건은 2015년도부터 전쟁기념관 물품기증실에 전시된다고 하니 내년에는 제가 기증한 물건을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해당 물품 전시시 기증자의 실명 병기 표기, 전쟁기념관에 있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역대 유물 기증자 명판에 제 이름이 새겨지고, 전쟁기념관 사보 등에 제 본명과 기증물품 항목이 실린다고 하네요.
이로서 저는 대한민국 전 국민, 기념관을 찾은 전 세계인을 상대로 제 본명이라는 개인정보를 영원토록 노출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금 본명을 숨겨도 내년부터 제 이름은 영원히 공개되니 저 증서의 본명을 지금 숨기나마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