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shogun의 푸른 장미님이 쓰신 글입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은 다시 반으로 갈라졌고 동로마는 열여덟 살이 채 못 된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는 겨우 열 살인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세상을 뜨기 전에 어린 두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해줄 인물들을 지명하는 승계 작업을 해놓았다. 아르카디우스의 후견인은 동로마 근위대장 루피누스,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은 반달족 지도자의 아들이며 이탈리아의 군사령관 스틸리코였다. 이 두 후견인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키웠으며 제국에 손해를 끼쳤다.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잡설 : 아이러니하게도 당대에는 게르만 혼혈이란 이유로 반야먄족이란 멸칭으로 불렸으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아에티우스와 함께 서로마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스틸리코와 호노리우스의 관계는 흡사 제갈량과 유선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지요.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유선은 끝까지 제갈량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지만 호노리우스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스틸리코는 398년 호노리우스를 자신의 딸 마리아와 혼인시켜 세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10년 후 마리아가 죽자 그는 호노리우스를 마리아의 동생 테르만티아와 재혼시켰다. 한편 루피누스 역시 황제의 인척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시집 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나약한 어린 황제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환관 출신의 시종장 에우트로피우스의 계략으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가 안티오크에 가 있는 틈을 노려 에우트로피우스가 황제에게 에우독시아라는 아름다운 처녀의 초상화를 보여준 것이다. 에우독시아는 프랑크족 장군과 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집안에서 성장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에우독시아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신부감으로 선택했고 루피누스가 돌아오기 전에 결혼 준비가 모두 끝났다.
에우독시아는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황제 자리에 오른 지 석 달 만인 395년 4월 27일에 그와 혼인했다. 그녀는 9년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 기간 동안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401년 4월 10일 콘스탄티노플에서 탄생한 이 아들이 테오도시우스 2세이다. 테오도시우스는 탄생 이듬해 1월 10일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후에 이루어진 그의 세례식은 국가적인 축제였다. 이에 대해 가자(현재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 주변의 도시)의 프로코피우스 주교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린 테오도시우스는 왕자로 태어났으며 탄생과 동시에 황제로 선포되었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고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제국의 도시들에 황제의 하사품과 선물을 든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로 설교의 달인이라 ‘황금의 입’을 지닌 성인으로 불렸다. 그는 설교 중에 자신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인 보통 시민들의 가난함에 대조되는 궁전의 사치를 비판했다. 또 극장 무대에 올려지는 외설적인 공연들도 비난했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동로마 군대는 가이나스의 지휘 아래 있었는데 가이나스는 고트족 출신으로 황실 군대의 장군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지휘권을 잡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으며 395년 11월 27일 헤브도몬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르카디우스와 루피누스를 만났는데 루피누스는 군대가 자신을 공동 황제로 추대할 것을 바란 듯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루피누스를 죽였으며 조시무스에 따르면 그 일은 스틸리코가 계획하고 가이나스가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가이나스는 400년 초 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 그곳을 장악했다. 그러나 조시무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고트족 7,000명을 죽였으며 가이나스는 북쪽의 트라키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훈족의 왕 울딘에게 체포되었고 울딘은 400년 12월 23일에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훈족의 군대
에우트로피우스가 399년 죄인으로 몰려 처형당하자 황후 에우독시아가 막후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400년 1월 9일 아르카디우스는 그녀에게 아우구스타(여제)의 칭호를 내렸는데 콘스탄티노플 건립 이후 첫 두 세기 동안 아우구스타의 칭호가 내려진 건 좀처럼 없었던 일이었다. 에우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했던 듯하며 따로 몇 명의 애인이 있었고 특히 황제의 수석 고문 요하네스의 경우 테오도시우스의 진짜 아버지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에우독시아의 잘못된 행실은 결국 황실의 부도덕성에 대해 비판하는 설교를 하던 크리소스토무스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404년 6월 20일 둘 사이의 알력이 절정에 이르자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토무스를 폰투스(현재 터키 북동부 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추방했으며 크리소스토무스는 그곳에서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총대주교가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대궁전 문에 모여 폭동을 일으켰으며 불을 질러 원로원과 하기아 소피아를 파괴했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추방된 후 에우독시아는 승리의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404년 10월 6일 출산 중에 죽었으며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에우독시아의 때 이른 죽음을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성인 중 하나로 받들어지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를 무자비하게 내친 것에 대한 하늘의 벌로 해석했다. 아르카디우스는 에우독시아보다 3년 반을 더 살고 408년 5월 1일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으며 성사도 교회의 아내 옆에서 영면에 들었다.
일곱 살의 테오도시우스가 아버지 아르카디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앉았다. 재위에 오른 뒤 첫 6년 동안 테오도시우스 2세는 죽은 아버지가 가장 신임했던 동로마 근위대장 안테미우스를 후견인으로 삼았으며 안테미우스는 4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섭정 기간 동안 4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할 대성당이 건축되었고 이 건축물은 현재 테오도시우스 교회라고 불린다.
안테미우스가 죽자 섭정의 역할은 황제의 살아남은 세 누이 중 제일 맏이인 풀케리아 공주에게 돌아갔는데 그녀는 당시 15세로 황제보다 겨우 두 살 위였다.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고 테오도시우스가 성년에 이른 416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10년동안 계속 막후 실력자로 행세했다.
풀케리아
풀케리아는 16세에 순결 서약을 하였으며 대궁전의 그녀의 처소에는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궁정은 수녀원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녀는 동생의 교육을 감독했으며 누나의 영향을 받은 테오도시우스는 평생 신학 뿐 아니라 과학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고 정사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여가 시간이면 글쓰기에 매달렸고 필체가 아름다워 역사가들 사이에서 ‘달필가 테오도시우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체구가 작아서 성인이 되어서도 ‘작은 테오도시우스’라고 불렸으며 연대기 작가 요하네스 안티오케누스는 “그는 궁전에서 갇혀 지냈기에 크게 자랄 수가 없었다.”고 썼다.
테오도시우스는 때가 되자 누나 풀케리아에게 마땅한 신부감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풀케리아가 찾아낸 신부감은 아테네 철학자 레온티우스의 딸인 아름답고 학식도 높은 아테나이스였다. 아테나이스는 혼인하면서 기독교적인 이름인 에우도키아로 개명했으며 테오도시우스에게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아주었다. 아들 아르카디우스는 어린 나이에 죽었고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열다섯 살 때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혼인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호노리우스 사후 2년 만인 425년 여섯 살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455년까지 서로마를 통치했는데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막후에 그의 어머니이자 테오도시우스1세의 딸 아우구스타 갈라 플라키디아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황제가 되자 라벤나(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로 옮겼으나 콘스탄티노플에 궁전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발렌티니아누스 3세
447년에서 450년 사이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축조로 콘스탄티노플의 경계가 영구적인 선까지 이르렀다. 새 성벽은 콘스탄티누스가 쌓은 성벽보다 트라키아 안으로 약 1.5킬로미터 정도 더 들어갔으며 마르마라(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바다. 흑해 쪽은 보스포러스 해협, 에게 해쪽은 다다넬즈 해협을 통해 연결되었다.)부터 골든혼(세계 각지의 귀한 물건들이 집결하는 항구이며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까지 6킬로미터 이상을 뻗어 나갔다. 성벽 축조의 첫 단계인 성탑이 군데군데 있는 외겹의 벽은 근위대장 안테미우스의 지휘 아래 413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447년 일련의 대지진이 일어나 성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57개의 성탑이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때맞추어 훈족 아틸라 왕이 황금군단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치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로마의 새 근위대장 콘스탄티누스의 지휘에 따라 즉시 성벽의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히포드롬의 모든 정파들이 작업에 참여했고 두 달도 안 되어 성벽은 전보다 더 튼튼하게 재건되어 결국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어야만 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골든혼(금각만)
이 시기에 서로마와 동로마는 그 어느 때보다 유대가 돈독했는데 바로 437년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테오도시우스와 에우도키아의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랑의 나이는 열여덟, 신부가 열다섯 살이었다.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낳고 딸이 황후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겠다고 서약했던 에우도키아는 이듬해에 서약을 실행에 옮겼다.
이 시대의 새로운 종교적 논쟁은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관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예수에게 그 두 가지 본질이 공존하며 성모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어머니라고 믿었다. 431년 6월 7일 에페소스(현재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의 도시 에페스)에서 열린 제3차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테오도시우스는 네스토리우스를 이집트로 추방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52년경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네스토리우스
황후 에우도키아는 439년에 예루살렘에서 돌아왔으나 그후 얼마 안 되어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서 버림받았다. 황제가 그녀와 자신의 절친한 친구 파울리누스가 간통을 저질렀다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진 않지만 파울리누스는 443년에 처형당하고 그 이듬해에 에우도키아는 예루살렘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오도시우스는 재위 말기가 그리 평안하지 못했다. 누나 풀케리아와도 사이가 멀어져서 그녀는 대궁전을 떠나 헤브도몬에서 살게 되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황제가 에우도키아와 풀케리아와 단절된 것을 재위 말기에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환관 크리사푸스 탓으로 보았다. 그러던 중 447년에 일련의 지진이 도시를 강타하여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지자 많은 이들이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다. 이를 계기로 테오도시우스와 풀케리아는 화해했고 풀케리아는 프로클루스 총대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을 이끌고 지진을 막아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이윽고 땅의 요동이 멈추자 모두들 감사의 찬송가를 불렀다. 그때 특별히 작곡된 예수를 찬양하는 성가도 있었는데 그 노래는 지금도 그리스정교회 예배식에서 불리고 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군대는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외국 용병들의 수가 지배적이었는데 특히 고트족과 알라니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재위 마지막 30년간 그의 군대를 이끈 군사령관은 알라니족 아스파르 장군으로 423년에 이탈리아에서 요하네스가 일으킨 폭동을 진압했고, 431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반달족과 싸웠으며, 441년에는 훈족 왕 아틸라와 전투를 벌였다. 아스파르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지만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야만족이었기에 아우구스투스 자리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테오도시우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스파르는 자연스럽게 풀케리아와 연합했고 테오도시우스 재위 말기에 두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훈족과 고트족
에페소스에서 열린 공의회는 테오도시우스 재위기의 마지막 사건으로 남았다. 말을 타고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나 리쿠스 강을 따라 달리던 중 낙마한 테오도시우스가 450년 7월 28일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는 성사도 교회에 묻혔고 황후 에우도키아는 10년 후 예루살렘의 성 스테파누스 교회에 안장되어 부부는 죽어서도 영영 만나지 못했다.
오늘날 테오도시우스 2세는 천년 이상 콘스탄티노플을 지킨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다. 그 성벽은 이제 폐허만 남았지만 여전히 장엄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끝도 없이 이어진 성탑들과 흉벽들은 비잔티움의 영원한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