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http://cafe.daum.net/shogun의 마법의활 님이 쓰신 글을 계속 퍼왔습니다만, 마법의활 님께서 연재물의 방향을 동로마사에서 후기 로마군에 대한 내용으로 선회하신 관계로 같은 커뮤니티 내에서 활동하시는 푸른 장미님의 글로 남은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원글 작성자가 서로 다른 관계로 지난 마지막 연재분과 시기적으로 겹치는 부분(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벌어진 후계자들간의 골육상쟁)이 있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서거 후 매장까지 석 달 반 동안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아 그 사이의 국사는 죽은 황제의 이름으로 처리되었다.
그 공백기는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이 스스로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부여하고 그에 대한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내면서 337년 9월 9일 막을 내렸다. 세 아우구스투스들은 황족 중에서 적수가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 수비군의 반란을 조장했고 그 결과 삼촌 둘과 사촌 일곱 명을 죽였다. 황족 중 남자 생존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배 다른 형제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두 아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뿐이었으며 그들은 열한 살과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두 왕자는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나중에는 소아시아의 외딴 섬에서 삼엄한 감시 아래 살게 되었다.
세 아우구스투스들은 338년 초여름에 제국의 분할을 위해 회동했는데 각자 카이사르로서 다스렸던 지역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제국의 동쪽 지역을,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스는 서쪽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국의 분할은 필연적으로 장기간의 삼파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스가 목숨을 잃은 뒤 353년 콘스탄티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통치기에 대한 기록은 330년경 안티오크(현재 터키의 안티키야)에서 출생한 그리스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사건 연대기>에 담겨 있다. 암미아누스는 <사건 연대기> 21권에 콘스탄티우스의 성격을 평가해 놓았는데 먼저 그의 미덕들을, 이어 그의 결점들을 담았다. 그의 미덕으로는 ‘황제로서의 권위’, 시민 행정의 공정성, 군대 유지에서 과도하리만큼 조심스러웠던 점, 신중성, 절제된 사생활, 바른 예의범절, 뛰어난 운동 능력을 들었는데 운동 능력은 그의 특이한 체형 때문으로 “그의 다리는 매우 짧고 굵어서 달리기와 높이뛰기에 능했다.”고 되어 있다.
그의 결점들 가운데 하나는 황제 자리를 노리는 모의에 대한 의심이 병적일 정도로 지나쳐서 가상의 적수들과 내부의 적들뿐 아니라 황족까지도 숱하게 제거했다는 점이다. 암미아누스는 이에 대해 “콘스탄티우스는 아내들과 새된 목소리의 환관들, 그리고 특정 궁정관리들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는데 그들은 그가 하는 말마다 박수갈채를 보내고 무조건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고 썼다.
환관들은 비잔틴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 중 다수가 민간, 군, 종교 분야에서 고위직에 올랐다. 몇몇은 총대주교가 되었고 한 사람은 군사령관이 되었다. 특히 시종장 자리는 환관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콘스탄티우스 재위 기간 동안 에우세비우스가 시종장 자리에 있었는데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는 황제가 유폐상태의 어린 두 왕자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콘스탄티우스는 351년 갈루스를 기나긴 유폐에서 풀어주고 카이사르의 서열에 올린 후 페르시아 전선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그러나 3년 후 에우세비우스는 황제를 꾀어 갈루스가 황위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다. 결국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를 체포한 뒤 곧 목을 베었는데 처형은 에우세비우스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이듬해에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한 뒤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파견했는데 사실 율리아누스는 평생 학문에만 매진했기에 군사 경험이 전무했다. 율리아누스는 어렸을 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리스 고전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스무 살에 기독교에 등을 돌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크 출신의 작가 리바니우스는 율리아누스가 처음 갈리아에 도착했을 때 “지휘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 외에는 권위를 찾을 수 없었다.”고 썼지만 율리아누스는 5년 내에 프랑크 족을 상대로 네 차례나 대승을 거두고 맹장으로 우뚝 섰다.
암미아누스가 지적한 콘스탄티우스의 또 하나의 결점은 교회 문제에 간섭하기를 고집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그의 재위 기간과 그후 4년간 제국은 종교적인 갈등으로 홍역을 앓았다. 갈등의 중심에는 대개 황제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있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대성당은 하기아 이레네였으며 하기아 소피아가 성스러운 지혜(‘소피아’는 그리스 어로 ‘지혜’를 의미한다.)에 봉헌되었듯이 하기아 이레네(‘이레네’는 그리스 어로 ‘평화’를 의미한다.)는 성스러운 평화에 봉헌되었다. 하기아 소피아가 대성당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하기아 이레네는 구성당으로 불렸는데 콘스탄티노플 건립 이전부터 비잔티움의 대성당 역할을 해온 전통 때문이었다.
콘스탄티우스 재위 초기에 아리우스주의를 둘러싼 종교 분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온건한 아리우스주의자로 콘스탄티노플의 알렉산드르 주교가 죽자 아리우스주의자를 그 자리에 임명했고 정통파가 이에 반발, 자체적으로 주교를 임명했다. 이 갈등은 전투로까지 이어져 황제의 군대가 하기아 이레네에 있는 정통파를 공격하여 3,000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 대학살의 쓰라린 기억은 이후 콘스탄티우스의 지위 기간 내내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쳤다.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361년 11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미 자신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귀환 중이었으며 그해 12월 11일에 도착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태어난 첫 황제로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해 조시무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비잔티움으로 접근하자 모두들 찬가를 부르며 환영했고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같은 시민이라는 점에서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또한 다른 점들에서도 그가 마치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큰 축복들의 창조자인 양 경의를 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도시와 군대를 동시에 장악하게 되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율리아누스가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콘스탄티우스가 자신을 의심하도록 이간질한 환관 에우세비우스를 재판에 회부하고 처형한 것이었다. 그는 또 콘스탄티우스가 썼던 불필요한 하인들은 물론 황실의 환관들을 모두 내보냈다. 리바니우스는 율리아누스가 내보낸 사람들에 대해 “천 명의 요리사들과 이발사들이 있었고 집사들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 하인들이 들끓었고 환관들은 봄에 떼 지어 날아다니는 파리들, 온갖 종류의 수벌들보다 더 많았다.”고 썼다.
율리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이교를 믿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한 며칠 후 몇 가지 칙령을 내려 기독교와 유대교뿐 아니라 이교 의식들도 공개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콘스탄티누스 시대 때 국가에서 몰수한 사원 재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기독교 정통파 성직자에게 수여했던 황실 보조금을 없앴다. 또한 이단자나 분맂주의자로 몰려 유배되었던 모든 기독교 성직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새 정부를 조직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배제했고 그 결과 신앙심보다 정치적 야심이 컸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등지고 이교도가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그런 식으로 이교의 부흥을 꾀하였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배교자로 불리게 되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가 죽자 군대는 니케아로 행군하여 그곳에서 후계자를 뽑았다. 황실 근위대장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고 그는 364년 2월 26일에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었다. 군대는 발렌티니아누스에게 후계자로 삼을 공동 황제를 임명하도록 요구했고 한 달 뒤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그는 동생 발렌스를 지명했다. 발렌스는 364년 3월 28일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헤브도몬(현 지명은 바키르코이)에서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얻었다. 협약에 따라 발렌티니아누스는 밀라노에서 서로마를,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를 통치하게 되었다. 두 형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종교 문제에 관대하여 이교와 기독교의 모든 분파들을 허용했던 율리아누스의 정책을 이어갔다. 발렌티니아누스 발렌스 365년 초봄에 발렌스는 아르메니아에 침입한 페르시아군을 무찌르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그가 수도를 뜨자마자 칼케돈에 은신해 있던 율리아누스의 사촌 프로코피우스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로코피우스는 트라키아에서 군대의 지지를 얻어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었으며 칼케돈과 비티니아의 다른 도시들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발렌스는 프로코피우스를 상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으며 5월 말쯤 반란 진압에 성공한 듯했다. 프로코피우스를 프리기아(현재 터키의 중서부)에서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 목을 벤 것이다. 그러나 프로코피우스의 친척이며 황실 근위대 장교인 마르켈루스가 칼케돈을 손에 넣으면서 다시 반란의 불길이 일었고 마르켈루스는 며칠 동안 버티다가 잡혀서 처형당했다.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플과 칼케돈 사람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시작했고 반란 참여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프로코피우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칼케돈 주민들을 벌하기 위해 칼케돈 성벽을 무너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칼케돈 성벽을 이루었던 돌들을 가져다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교를 만들었다. 이 발렌스 수도교는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 375년 11월 17일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세상을 뜨고 열여섯 살 된 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가 즉위했다. 발렌스가 계속 동로마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발렌티니아누스가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라티아누스 378년 초, 안티오크에 있던 발렌스는 훈족에 쫓긴 엄청난 수의 고트족 무리가 도나우 강을 건너 트라키아(불가리아 남부, 그리스 북동부, 유럽의 터키 등으로 이루어진 지역)로 남진하여 터를 잡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트라키아의 고트족을 치러 원정길에 올랐다. 로마군은 고트족과의 첫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플(현재 터키의 에디르네)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는 참패했고 발렌스는 그의 군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군사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고트족은 아드리아노플 함락에 실패한 뒤 무방비 상태의 수도를 빼앗고 약탈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로마군에 편입된지 얼마 안 되는 사라센군이 파견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지켜주었다.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 당시의 동로마군 아드리아노플 전투 상황도 발렌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라티아누스는 또 다른 공동 황제를 임명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히스파니아(스페인) 장군 테오도시우스를 선택했고 테오도시우스는 379년 1월 19일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제국의 동쪽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380년 11월 24일 헤브도몬에서 시작된 행렬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공식적으로 입성했다. 역사가 조시무스에 의하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대승을 거두고 개선이라도 하듯 화려하게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갔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는 이단 박멸의 결의를 굳히고 재위 기간 동안 분리파들을 탄압하는 칙령을 총 열여덟 차례나 내렸다. 그러나 유대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어서 기독교도에 의해 파괴된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를 재건하라는 명령을 몇 차례 내렸고 시나고그를 파괴한 사람들을 처벌했다. 반면 이교에 대해서는 철저히 적대적이었으며 미래를 점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하고 많은 사원들을 파괴하거나 교회로 개조하는 법들을 시행했다. 그중 가장 과격한 법은 391년에서 392년에 발표된 것으로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전면 금지하고 제국 전체의 사원들을 폐쇄하였으며 이교 신들을 개인적으로 숭배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무거운 벌금형을 내렸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383년에 암살되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도 392년 같은 일을 겪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복수의 칼을 빼들어 폭동을 진압하고 반역자들을 처벌했는데 그의 복수는 황위 찬탈자 막시무스에 대한 승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복수를 끝낸 테오도시우스는 밀라노로 진군해 가서 후계자 문제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제국을 나눠주기로 결정하고 동로마는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는 호노리우스가 통치하도록 맡겼으며 같은 해인 393년에 두 아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내렸다. 당시 두 아들이 다 콘스탄티노플에 머물고 있어서 테오도시우스는 호노리우스를 밀라노로 불렀는데 호노리우스는 395년 1월 중순에야 밀라노에 도착했다. 그때쯤 테오도시우스는 병이 깊어졌고 호노리우스가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떴다. 테오도시우스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대제로 역사에 남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서 지중해부터 페르시아 전선에 이르는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린 유스티니아누스 이전의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이다. 아르카디우스 (라고 쓰고 찌질이라고 읽는다) 호노리우스(라고 쓰고 멍청이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