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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복지관의 이야기
게시물ID : panic_778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내일모레
추천 : 15
조회수 : 523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2/27 08:01:15

출처:  짱공유






출처 엽혹진



‘형제복지원’ 박인근 일가 부활한다
데스크승인 [1280호] 2014.05.01  17:59:31(월) 부산=김지영 기자·안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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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죗값은 제대로 치러야 한다. 그래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 군사 정권 시절 형제복지원은 현실에 존재한 지옥이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다. 부랑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에게 그곳은 악마의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잔혹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죄를 지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형제복지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박인근 원장 일가는 세간의 비난을 뒤로한 채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시사저널은 복지 재벌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는 형제복지원의 오늘을 취재했다.

 


군사정권 시절 천인공노할 만행이 자행된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 일가가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사저널의 단독 취재 결과 이들은 부산시 기장군에 위치한 ‘실로암의 집’을 매각한 후 부산시 북구 덕촌동 산 30-1번지 임야(2만6087㎡)와 20-4번지 대지(1252㎡)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서를 지난해 4월 부산시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두 필지 모두 2만7339㎡(약 8285평) 규모다. 실로암의 집은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느헤미야’(재단)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이다.

   
형제복지원 후신인 ‘느헤미야’ 법인이 운영하고 있는 중증 장애인 생활 시설 ‘실로암의 집’(위 사진). 부산 북구 덕촌동 일대(아래 사진)로 이전을 추진 중이다. ⓒ 시사저널 박은숙
2011년 11월 한국감정원의 평가에 따르면 실로암의 집 재산 가치는 72억원에 이른다. 반면 덕촌동으로 이전하려고 하는 새 복지시설의 경우 토지만 기부채납하면 시설 건립비용과 운영비를 국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수십억 원에 달하는 돈을 챙기면서 파렴치한 범죄로 낙인찍힌 과거 행적을 ‘세탁’하겠다는 의도로 여겨진다.

형제복지원의 후신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은 올해 2월 법인 명칭을 ‘느헤미야’로 변경했다. 형제복지원의 인권 탄압 실태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자 ‘형제’라는 단어가 아예 들어가지 않은 이름으로 바꿔치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지난해 4월 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중증 장애인 생활 시설인 실로암의 집 토지와 건물을 매각하고 덕촌동 일대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서를 부산시에 제출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두환 정권 당시 내무부 훈령에 따라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연고가 없는 장애인, 고아, 일반 시민 등을 불법으로 감금해 강제 노역, 구타, 학대, 암매장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에 이르러 ‘한국판 홀로코스트(대학살)’로도 불린다. 아직도 수많은 피해자가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을 겪으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가해자인 재단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현재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는 시설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세간의 비난을 피하는 데 급급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형제’ 빼고 ‘느헤미야’로 법인명 세탁

박인근 원장은 2011년 4월 재단 대표이사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대신 셋째 아들 박천광씨가 그 자리에 앉았다. 올해 2월 박씨가 대표이사에서 사임하고 홍 아무개씨가 대표이사직을 이어받았지만 재단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박씨가 여전히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이 법인 명칭을 느헤미야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평신도 지도자로 예루살렘 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100여 년 넘게 답보 상태이던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불과 52일 만에 이뤄내 유대교 재건에 앞장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박씨로서는 느헤미야가 아버지의 유산을 재건하기에 최적의 이름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실제 재단은 올해 초 느헤미야로 이름을 바꾸기 위해 이사회를 열었다. 시사저널이 확인한 이사회 회의록에는 ‘이전의 좋지 않은 이미지로 법인이 타격을 받아 더 나은 이미지로 개선하기 위해 느헤미야로 이름을 추천한다’는 대목이 나와 있다. 당시 이사회에 참석한 이들은 박씨 일가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 7명 중 2명이 외부 이사인데 올해 2월 선임된 외부 이사 한 아무개씨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른 외부 이사 1명은 현재 공석이다.

재단을 관리·감독해야 할 주무 관청은 이 같은 법인 명칭 변경을 아무런 제지 없이 허가했다. 사회복지법에 따르면 사회복지법인이 이름을 포함해 정관을 변경할 경우에는 해당 시·군·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기장군청은 2월17일 재단의 법인 명칭을 승인했다. 기장군청 복지지원실 관계자는 “법인이 이미지 쇄신을 위해 법인명 변경을 신청했고 크게 하자가 없어 그대로 승인했다”고 밝혔다. 부산시청 장애인복지과 관계자는 “시에서는 기장군청이 허가한 대로 승인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2011년 ‘도가니 사건’으로 유명한 사회복지법인 ‘우석’이 문제가 된 ‘인화학교’의 명칭을 ‘서영학교’로 변경하려고 하자 광주시가 불허한 것과 대조된다.

법인 명칭 변경은 박 원장이 예전부터 과거에 저지른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용한 꼼수 중 하나로 지적받아왔다. 재단은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자 이듬해 법인 명칭을 ‘재육원’으로 바꿨다. 이때도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의 느헤미야가 될 때까지 여러 차례 ‘명의 세탁’이 있었다. 형제육아원(1965년)→형제원(1971년)→형제복지원(1979년)→재육원(1988년)→욥의 마을(1991년)→형제복지지원재단(2001년)→느헤미야(2014년) 등이다.

   
1987년 박인근 원장 일가는 주례동에 있던 ‘형제복지원’(사진)을 팔고 기장군 산비탈에 ‘실로암의 집’을 지었다. 200억원이 넘는 매각 대금은 각종 수익 사업에 쓰였다. ⓒ 뉴스뱅크이미지
무담보 재산 ‘실로암의 집’ 매각 추진

재단은 느헤미야로 이름을 바꾸기에 앞서 지난해 4월 기장군 정관면에 있는 실로암의 집을 매각하고 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북구 덕촌동 일대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서를 부산시에 제출했다. 실로암의 집은 재단이 보유한 부동산 중에서 유일하게 거액의 담보가 잡혀 있지 않은 재산이다. 한국감정원이 2011년 11월에 평가한 재단 보유 부동산의 가격은 모두 합쳐 221억원이다. 이 중 실로암의 집을 제외한 다른 부동산은 상당 금액의 담보가 잡혀 있다.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에 있는 ‘사상해수온천’은 현재 IBK저축은행에 가압류돼 부산지방법원이 임의 경매 결정을 내려둔 상태다. 울산시와 경주시에 위치한 10여 곳의 토지도 가압류 상태에 있다. 부산시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재단의 부채는 181억원이다. 이 가운데 63억원은 수익 사업 시설을 증축한다는 명목으로 부산저축은행에서 장기 차입한 데 따른 이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채 규모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박민성 부산사회복지연대 사무처장은 “현재 재단은 장기 차입에 따른 이자가 계속 불어나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며 “박 원장에게서 물려받은 사회복지법인은 규제를 받고 있어서 마음대로 유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실로암의 집을 이전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처분해 매각 대금을 챙기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실로암의 집 매각에 전문 브로커도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재단 이사 중 한 명이 브로커를 통해 시설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다. 매각이 성사되면 브로커는 수수료로 2억원을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재단이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에서 북구로 이전할 경우 박인근 일가는 돈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새로운 복지시설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현행법에 따르면 사회복지법인이 토지를 기부채납 형식으로 국가 및 지자체에 환원하면 시설 설립 및 운영비를 국가 및 지자체가 보조금 형식으로 지원한다. 재단이 보유한 북구 땅을 부산시에 기부채납하면 부산시가 세금으로 새로운 사회복지 시설을 지어준다는 얘기다. 여기에 매년 지급되는 국고보조금으로 시설을 운영할 수도 있다.

실제 재단은 그동안 실로암의 집에 거의 투자를 하지 않았다. 최근 3년간 실로암의 집 세입·세출 결산보고서를 살펴보면 예산의 99%가 국고보조금이다. 법인 전입금은 2010년 370만원, 2011년 0원, 2012년 2936만원에 불과하다. 반면 올해 예산으로 잡힌 보조금은 15억3000여 만원에 이른다.

부산시는 현재 재단의 이 같은 계획에 ‘불허’ 방침을 밝힌 상태다. 부산시 장애인복지과 관계자는 “실로암의 집 이전 계획은 법인을 정상화하기 위해 재단이 자구책으로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산시가 법인 정상화 방안을 제출하라고 요구하자 재단이 실로암의 집 이전 계획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부산시는 ‘시설 이전’이 아니라 ‘법인 청산’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땅 기부채납하면 건설·운영비 국가가 지원

하지만 지역 시민사회에서는 부산시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한 복지 관련 시민단체 관계자는 “박인근 원장이 2005년에 개인 명의로 담보도 없이 부산시에 50억원의 장기 차입을 신청했을 때도 처음에는 부산시가 불허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박 원장의 뜻대로 장기 차입을 허가했다. 시설 이전 역시 마찬가지다. 1차적으로 불허했을 뿐 나중에는 재단 뜻대로 이전할 수 있도록 해줄지 지켜봐야 알 일”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부산시가 재단에 장기 차입을 허가한 이력을 살펴보면, 2005년 4월 부산시는 박 원장이 요청한 50억원의 장기 차입을 상환 계획이 미비하다며 불허했다. 하지만  2005년 6월에 15억원, 9월에 30억원, 2008년 6월에 15억원의 장기 차입을 허가했다. 총 60억원으로 애초 박 원장이 신청한 50억원보다 10억원 더 많은 금액이다.

여기에다 이번 실로암의 집 이전 계획은 18년 전 실로암의 집이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재단이 1996년 부산시 사상구에서 지금의 기장군으로 이전하겠다고 했을 때 기장군청은 일곱 차례나 반려를 했다. 중증 장애인 시설을 경사가 심한 산에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재단은 1997년 행정심판까지 끌고 가 산림에서 대지로 용도를 변경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98년 부산시가 직권으로 건축을 허가해 준 것이다.

더욱이 2000년 기장군청은 실로암의 집 건축 면적을 기존 1464㎡에서 1888.5㎡로 넓혀서 허가를 해줬다. 거동도 잘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거주하는 실로암의 집이 산비탈에 세워진 것이다. 그 결과 2002년에는 산사태로 실로암의 집에서 생활하던 중증 지체 장애인 4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번에 실로암의 집을 이전하겠다고 한 북구 덕촌동 일대도 산이다.

조민정 실로암의 집 원장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중복 장애를 앓고 있는 1~2급 장애인들이라 방만 옮겨도 구토를 할 정도로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만약 이전하게 되면 절반은 아마 제대로 생활조차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실로암의 집 이전 계획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현재 재단 대표를 맡고 있는 홍 아무개 대표이사와 전화통화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박인근 일가, 유력 정치인 집안과 친분” 


박인근 일가가 형제복지원 사건 이후에도 정부 지원금으로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수익 사업을 한다며 수백억 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정·관·재계의 두터운 인맥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부산의 한 유력 정치인 집안과 박 원장이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왔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형제복지원 사정을 잘 아는 지역 인사는 “박 원장이 개인 명의로 담보도 없이 수십억 원의 돈을 대출받고 부산시가 장기 차입 요청을 허가해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당시 저축은행 최고위 인사들은 물론 유력 정치인 집안과 친분이 두텁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전했다.

부산시 공무원들과의 유착설도 끊이지 않았다. 재단의 장기 차입금과 재산 매각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부산시는 2012년 8월, 10일 동안 특별점검에 들어갔다. 법인 재산인 부동산과 스포츠센터 매각 대금이 개인 용도로 사용되고, 수익 사업인 사상온천에서 거액의 돈이 박인근 일가에게 빠져나가는 등 비리 사실이 드러났다.

실로암의 집 내에 실로암교회를 운영 중인 것도 문제가 됐다. 부산시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 교회는 2013년 1월까지 운영됐는데 강사로 초청된 인사 중에는 부산시 고위 공무원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또 박 원장의 막내딸이 결혼을 할 때도 부산시 공무원 상당수가 축의금을 낸 것으로 확인됐다. 겉으로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안으로는 유착하는 이중 행태를 보인 것이다.

부산시는 특별점검을 벌인 후 관리·감독 부실을 이유로 시청 공무원 9명을 징계 조치했다. 해당 징계 대장을 통해 확인한 결과 견책 2명에 훈계 7명이었다. 승진이나 수당에서 불이익이 있을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징계다. 이마저도 취소 조치가 내려졌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당시 견책을 받은 공무원들이 소청심사위원회에 징계 처분이 부당하다며 구제를 요청했고 소청심사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여 징계는 없었던 일이 됐다.




등록 : 2013.02.09 09:58수정 : 2013.02.09 14:59

부산 형제복지원의 생존자 한종선씨는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책 ‘살아남은 아이‘를 썼다. 지난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시위를 하다가 우연히 만난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글쓰기를 권유한 게 계기가 됐다. 경북 구미에 사는 한씨는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국회 앞에 선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사람과사회] 531명 폭행·암매장 당한 형제복지원, 지옥 같은 기억을 자서전 <살아남은 아이>

피해자 한종선씨… 1988년 “감금은 무죄”라고 판결한 대법원 재판장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에게 “올바른 판결이었냐” 묻고 싶었지만

“야간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취침시간 중 감금한 것은 사회적 정당성이 인정된다.”

1988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대법원은 감금죄에 대해 이렇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장은 총리 후보자로 지목됐던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었다. 민주통합당 이언주 대변인은 “‘부산판 도가니’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서 재판장이 ‘사회적 약자의 상징’인 김 후보자라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총리 후보자에서 사퇴한 다음날인 1월30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38)씨는 “김 위원장이 국회 청문회에 나오면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라며 그의 사퇴를 아쉬워했다.

살해돼 해부용으로 팔려간 주검

1987년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인 부산 형제복지원(수용인원 3146명)에서 직원의 구타로 수용자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검찰 조사 결과 복지원이 부랑아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해 암매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12년 동안 무려 531명이 사망했다. 대부분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일부 주검은 300만∼500만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게 사건의 배경이었다.

한종선씨는 1984년, 9살 때 12살인 누나와 함께 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로부터 3년 뒤 복지원이 폐쇄됐지만 그는 짐승의 눈빛과 끔찍한 기억을 지닌 아이가 됐다. 한씨의 누나는 성폭행을 당해 정신분열증을 얻었고 구두닦이였던 아버지 역시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자다가 복지원에 끌려온 뒤 지금까지 정신병원을 떠돌고 있다.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지난해 11월 펴낸 저서 <살아남은 아이>에서 한씨는 지옥과도 같은 삶을 증언했다. “우리들의 의복은 하얀색 팬티와 러닝셔츠, 감색 추리닝 한 벌, 그리고 검정 고무신이 전부였다. 몸이 꽝꽝 얼어붙는 추위가 겨울 내내 이어졌다. 거의 모든 원생들의 손과 발이 퉁퉁 부어 동상에 걸렸다. 우리는 항상 새벽 4시에 기상했다. 식단은 언제나 꽁보리밥에 생선 썩은 전어젓과 소금 뿌린 깍두기. 우리는 매일같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새벽부터 군가를 부르며 구보를 돌았다.”

형제복지원은 상명하복이 지배하는 군대였다. 장기 복무 헌병 부사관 출신인 박인근 원장이 중대장-소대장-총무-조장-소대원을 지휘했다. 언제든지 그들의 자리를 교체할 수 있는 박 원장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군기를 잡기 위해” 조장은 매일 때렸다. “때리는 조장들은 아무 꼬투리나 잡아서 때린다. 맞는 소대원들은 왜 맞는지도 모른 채 맞는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연발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복지원을 맴돌았다. 한씨는 죽어나가는 원생들을 서너 번 정도 목격했다.

복지원은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왔다. 국고보조금이 사람 수대로 나왔기 때문이다. 갇힌 이들 중에는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 바람을 쐬러 나온 여성, 자갈치시장의 노점상, 농촌에서 흘러든 일용직 노동자,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있었다. 자활 능력이 없는 사람은 10% 정도뿐이었다. 나머지는 멀쩡한 상태로 잡혀와 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인이 됐다. 한씨의 누나와 아버지처럼 말이다. 복지원은 운영자금 명목으로 1985년 18억원, 1986년 20억원 남짓을 중앙정부와 부산시에서 지원받았다.

박인근 한 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박인근 원장도 승승장구했다. 1981년 1월 장애자의 날 석류장을, 1984년 11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전두환 대통령에게서 받았고 전국부랑인복지시설연합회 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던 1987년 1월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밝혀진다. 당시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가 그해 1월16일 형제복지원을 압수수색했다. “교도소를 뺨치는 어머어마한 철문과 성곽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복지원의 원장실에서는 20억원이 넘는 각종 예금증서와 달러, 엔화가 쏟아졌다. 박 원장은 2년간의 국고보조금 39억원 가운데 11억원을 횡령했고 수용자들을 감금했음이 드러났다. 형제복지원은 폐쇄됐고 고아를 제외한 2천여 명이 한꺼번에 풀려났다. 인권유린의 피해자인데도 아무런 보상도, 재활 교육도 없었다.

김 변호사는 1993년 펴낸 저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에서 당시 외압에 시달렸음을 고백했다. 수사 검사는 원래 징역 20년을 구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검찰총장 등 ‘윗분들’은 징역 15년 혹은 징역 10년을 요구했다. 횡령 액수도 6억원으로 축소해야 했다. 1987년 6월 검찰은 박 원장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6억원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징역 10년과 벌금 6억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박 원장의 형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법원이 감금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두 차례나 원심을 파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장은 1987년 11월 1차 항소심에서 벌금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더니 1988년 7월 2차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88년 3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한 사건이 일곱 번의 재판을 거치는 사이 원장에 대한 형량은 당초의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원장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감금한 행위는 대법원의 고집에 의해서 무죄로 확정됐다.”(<브레이크 없는 벤츠>에서) “대법원의 고집”에는 김용준 위원장도 당연히 포함된다.

한종선씨는 “감금은 폭행·살인을 증명하는 첫 단추였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그걸 무죄로 만드니까 폭행·살인죄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인권유린이 분명히 있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김용준 위원장이 청문회에 서면 ‘당시 무죄를 선고한 게 올바른 판결이었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 대답마저도 이제 못 듣게 됐다.” 그는 또 당시 형제복지원의 감금이 불법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왜 시설을 폐쇄하고 수용자를 풀어줬느냐고 반문했다.

지금도 복지재단 운영하는 박인근 일가

벌금도 선고받지 않고 2년6개월 만에 풀려난 박인근 원장은 재기했다. 법인의 이름만 수차례 바꿔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됐다. 1929년생인 박 원장은 2011년 4월7일까지 형제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3남 박천광(37)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인근 원장은 2008년 8월 ‘대안학교’인 신영중·고교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2010년 12월 첫째딸에게 넘겼다.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을 썼다는 한종선씨가 말한다. “도가니 사건이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부터 바로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대로 된 법치국가라면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반만이라도 가해자가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정은주 기자 [email protected]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도 하고 맛난 밥도 먹을 수 있는 내 처지가 감사하고 
왜 악인은 처벌받지 않을까 정의란 게 있는 걸까, 오직 폭력과 돈 뿐인 세상인걸까, 분노도 들고 
저런 일이 나에게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까, 혼란스럽고
세상은 선할까 악할까, 우울하고
저런 사이코 패스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공포감도 드네요.

살아남은 아이는 자신도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이런 일을 당하고도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도리어 이야기 하네요.
그 용기와 의지를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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