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12년 전 사스 사태를 회고한 고건 전 국무총리의 글이 뒤늦게 주목을 받고 있다. 김영삼정부와 노무현정부 때 각각 총리를 지낸 그는 2013년 중앙일보에 ‘고건의 공인 50년’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연재했다. 고 전 총리는 그해 2월28일 열세 번째 연재 글로 노무현정부 때 벌어진 사스 사태를 회고하는 ‘사스 대책’을 올렸다.
고 전 총리는 이 글에서 총리였던 자기가 왜 사스 대처에 직접 나서게 됐는지 밝혔다. 또 그의 표현대로라면 ‘전쟁’처럼 치른 사스 방역 과정도 비교적 상세하게 공개했다.
고 전 총리는 총리로서 직접 사스 문제를 챙기기로 마음 먹은 이유에 대해 “(2003년) 4월 사스 환자를 치료하던 홍콩 의사가 죽었다는 보도를 봤다. 감염자가 전 세계 수천 명에 치사율도 높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심각하다 느꼈다. 직접 챙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4월 23일 사스와 관련해 관계차관 대책회의가 열렸다. 보건복지부는 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가동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보건원의 사스 전담 인력은 불과 4, 5명뿐이었다.
인천공항 등 현장을 다녀온 고 전 총리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복지부 주도의 사스 방역대책본부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면서 “상위 부처인 국무조정실이 나서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해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 전 총리는 당장 조영일 당시 국방부장관을 불러 “사스 방역도 국가를 방어하는 일 아니겠는가. 군의관과 군 간호 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해 군 의료진 70여 명을 공항 사스 방역에 투입했다. 아울러 국무조정실 차원의 상황실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복지노동심의관으로 상황실 부실장을 맡은 박철곤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은 “공항 현장에 가봤더니 입국자 체온을 측정하는 열 감지기가 1대뿐이었다. 일일이 체온을 재기엔 입국자가 너무 많았다. 복지부에 예비비를 지원했고 서둘러 이동식 열 감지기 10대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노무현정부는 관계차관 대책회의를 연 지 5일 만인 4월28일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사스 의심 환자를 10일간 강제 격리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 필요 시 자택 격리나 병원 격리 조치에 지체 없이 동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스 관계장관 회의를 열어 "대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관련 부처 모두가 나서 대응하라"고 주문도 했다.
고 전 총리는 “그렇게 사스 방역을 전쟁처럼 치렀다. 상황실로부터 하루 두 번 보고를 받으며 직접 챙겼다”면서 “의심 환자는 있었지만 확진 환자는 1명도 내지 않으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해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이 사스 예방 모범국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7월 3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국립보건원을 찾아 사스 방역 평가 보고를 받은 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같은 조직을 만드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이 2004년 1월 19일 정식 출범한 질병관리본부다.
고 전 총리는 “그때 우리는 사스와 1차 전투는 이겼을지 몰라도 전염병과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며 “왜 그전과 같은 열정이, 치열함이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