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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발키리 암살작전 ---- 반란군 핵심인물
게시물ID : lovestory_778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장기하랑
추천 : 2
조회수 : 114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02 12:48:05
 
'발키리 작전' 의 본래 취지는,
히틀러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때 나치 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비상수단 이었다.
비상시, 총통의 명령 없이 예비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전군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작전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독재 정권에 반기를 든 나치세력은 '발키리작전'을 역 이용하기로 했다.
이들은 히틀러를 제거한 후 예비군을 동원해 히틀러의 추종자인 나치 친위대를 전부 진압,
반 나치조직의 지도자를 독일 최고 지도자로 추대해 연합군과 협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전제가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를 반전시키려는 의지와 의욕을 더욱 강열하게 고양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히틀러를 떠올리면 보태지는 인물이 있다.
바로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던, 그리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고 실패로 돌아가자 사형을 당한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대령이다.

1944년 7월 그의 주도하에 히틀러 암살계획이 세워지고 동조자를 극비리에 물색한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가장 관심을 갖고 동조자로 끌어들이기에 노력한 사람이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장군이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고 연전연승하면서 연합군에게는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 됐던 '독일의 전쟁 영웅'이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롬멜 장군을 직접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히틀러 암살계획이 착착 진행되던 1944년 7월9일 슈타우펜베르크의 최측근인 케사르 폰 호프아커가 라 로세-기용에 있는
롬멜을 찾아와 암살계획을 밝히면서 협조를 당부했다는 기록은 있다.
 
롬멜이 이 암살계획에 찬동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관측과 평가가 있다.
그러나 롬멜의 강직한 성품과 정의감, 그리고 당시 전쟁의 광기에 휩쌓였던 나치 독일과 히틀러 등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롬멜이 히틀러 암살계획에 적극 동조했을 것으로 보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실제 히틀러의 비서관이었던 마틴 보어만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롬멜이 이 계획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암살계획이 성공하면 새 정부를 위해 자신이 나설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롬멜은 히틀러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어만의 이 증언에 의구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롬멜의 최후는 자살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과정에서 히틀러의 명령에 의한 자살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히틀러의 명령에 의한 그의 자살이 암살계획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자신이 직접 1944년 7월20일 폭탄을 가방에 넣은 채 히틀러가 주재하는 희의에 참석해 계획을 실행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죽지 않았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 암살계획의 코드명이 '발키리(Die Walküre) 작전'이다.
바그너의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있는 음악이다. 만일 그 계획이 성공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역사는 분명히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 계획을 외면한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이 '발키리 작전'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톰 크루즈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역을 맡았다. 영화 말미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처형 장면이 나온다.
그 극적인 순간 대령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독일 만세"였다.
롬멜은 무슨 말을 남겼을까. 이런 말을 어록으로 남겼다.

Denk nicht, die Welt hat dich verworfen.
Die Welt hat dich nie besessen.

세상이 널 버렸다 생각하지마라.
세상은 널 가진적이 없다.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발키리 작전 - 7월 20일 사건]
 
[ 7월 20일 그 날의 혁명군 주역들 - 베를린 ]
 
 
 에르빈 롬멜 : 육군 방위군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혁명의 주역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을 방위군 총사령부  참모로 전임시켰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은 초급장교시절 롬멜장군의 부관이었다.
혁명을 암시적으로 묵인하엿다. 사건후 히틀러는 가족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롬멜 장군에게 자살을 명령한다.
 
  
 
프레드리히 프롬 : 육군 방위군 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인물로 매번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였다.
 당시에 그는 방위군의 사령관이었으며 발키리 명령을 내릴 수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프레드리히 프롬 장군의 결단만 있었다면 혁명은 성공할수 있었다
 
 
 프레드리히 올브리히트 : 육군 방위군 부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  올브리히트 장군 참모
(혁명 실패후 처형됨)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육사동기생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 육군 방위군 참모
 (혁명 실패후 처형됨)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발키리 작전)을 사실상 지휘한 인물
 
 
 
 
베르너 폰 헤프텐 :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부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루드비히 베크 (Ludwig Beck) : 육군 총사령부 사령관(육군참모총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이 초급장교시절 루드비히 베크장군의 부관을 지낸바 있다.
  
 
 
 
 
에리히 회프너 : 육군 기갑사단 사단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에리히 펠기벨 : 육군 통신대 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에르빈 폰 비츨레벤 : 합동참모본부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파울 폰 하세 : 베를린 수도경비 사령부 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 : 베를린 야전장갑차부대 지휘관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체포하기 위하여 선전부에 들어갔다가
히틀러의 전화를 받고 혁명군을 배반하게 되고 프레드리히 프롬장군과 함께 혁명을 무산시킨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 대령을 혁명군에 가담시키지 않았다면 혁명은 성공할수 있었다. 
 
 7월 20일 그 날의 혁명군 주역들 - 경찰 
 
 
아르투어 네베  : 제국사법경찰(경찰청) 사령관(경찰청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 베를린 경찰서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아르투어 네베 경찰청장과 오랜친구로 경찰청장의 권유로 혁명에 가담하고 혁명에
가담한 경찰 500여명이 히틀러에 처형 당한다
  
7월 20일 그 날의 혁명군 주역들 - 서부전선
 
 
 한스 슈파이델 : 서부전선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슈파이델은 유명한 철학 박사 출신이며 유럽전선으로 온 롬멜의 참모를 지냅니다.
그는 롬멜을 설득하여 반 나치에 참여하게했으며 혁명 당일에는 계속하여 혁명을 이루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 프랑스지역 군정총독
(혁명 실패후 처형됨)
혁명 당일 프랑스지역 나치 친위대(SS : Schutzstaffel - 히틀러 경호부대)와  게슈타포(Gestapo-독일비밀경찰)를 체포한다
 
 한스 폰 보이네베르크 : 파리 주둔군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군정총독의 명을 받들어 파리의 친위대 무리들을 재빨리 생포하는 공을 세운다.
 
 
 권터 폰 클루게 장군
 (혁명 실패후 처형됨) 
클루게는 반 나치에 참여한 원수 중에 한 명이며 독일에 대표적인 명장이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지성을 따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여러 암살기회에서 행동을 주저하며
혁명 당일에도 이 안좋은 성격으로 일을 쉽게 결단치 못한다.
 
 
권터 블루멘트리트 대령 :  권터 폰 클루게 장군 참모
(혁명 실패후 처형됨)
 
 
케사르 폰 호프아커 : 파리지역 공군대령  
슈타우펜버그의 사촌동생이다.
혁명에 실패하고 케사르 폰 호프아커의 공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숙청당했다.
 
 
 
 
* 김정은....  과연 무사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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