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작성자 돈마니
1. 왕이 이상해졌다!
공민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부인의 영정을 앞에 두고서.
아내가 죽은 지 이미 삼년째였지만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왕은 공주의 초상과 마주 앉아서 음식 드는 절차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 <고려사> (공민왕 16년)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했던 개혁군주였지만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질환,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왕의 마지막은 시리고..또 아팠다...
공민왕.
고려의 개혁군주로 평가받는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고려는 이미 기우러져 가고 있었지만 그가 왕이 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공민왕 뒤로 우왕, 창왕, 공양왕이 즉위했지만 고려는 사실상 공민왕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런 공민왕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공민왕의 정치적 업적과 달리 개인적으로 '정신병'이란 단어로 못박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에 아주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39권의 방대한 기록 <고려사(高麗史)>가 보관되어 있다.
고려왕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열녀와 간신 등 약 천여 명의 열전까지 실은 역사서다.
그중 공민왕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왕의 본래 모습은 왕다웠다.
"왕위에 23년 있었으며, 나이는 45세였다."
"왕의 성격이 본래 엄격하고 신중하였으며 행동이 예의에 맞았다."
"그러나 만년에 와서 의심이 많고 조포하며 질투가 강하였다."
- <고려사> (공민왕 23년 9월)
같은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는 급격한 변모.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로는 과도하게 슬퍼하여 의지를 상실했다."
-<고려사> (공민왕 23년 10월)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하지 못하였다.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서 밤낮으로 마주 대하여 밥 먹으면서 슬피 울고 3년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민왕 24년 4월)
그녀는 몽골 사람이었다.
공민왕은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몽골음악을 듣고 또 연주했다.
"공주의 영정과 마주 앉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몽골 음악을 연주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시간이 흘려도 그리운 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공주의 영정이 빗물에 상하지 않을까 늘 살필 걱정했으며
공주의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공주의 재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은 생시처럼 공주를 극진히 챙겼다.
공주를 보낸 지 8년이 지나도 공민왕은 여전히 공주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민왕 22년.
공주가 유난히 그리웠던 10월.
공민왕은 제사를 지낸 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능 밑에서 밤을 보낸다.
"왕이 친히 정릉(노국공주 무덤)에 제사지낸 다음
술좌석과 음악을 베풀어 놓고 그날 밤 능 밑에서 잤다."
- <고려사) (공민왕 22년 10월)
"공민왕에게 있어서는 노국공주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는 듯 합니다.
성스럽고, 정신적 지주이고,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신용구(정신과 전문의)
충남 예산군 <수덕사>.
이곳에 공민왕의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했음을 보여주는 그의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민왕 금(琴)'이 있다.
'공민왕 금'은 수덕사의 승려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 이강(의친왕)으로부터 1899년 물러받은 거문고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밤마다 슬픔을 달래 뜯었다고 하는 거문고엔 '공민왕 금'이란 금명이 선명하다.
거문고 바닥엔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이조묵의 시도 새겨져 있다.
'공민왕이 신령스러운 오동나무를 얻어 이 거문고를 만들었으니...'
음악을 사랑한 감성적인 공민왕.
그의 성격이 섬세한 만큼 슬픔은 깊었다.
공민왕은 공주를 잃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1372년 10월 1일의 <고려사> 기록이다.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그것은 여장이었다.
"항상 자신을 여자 모양으로 화장하였다."- (공민왕 21년 10월)
분명 기이한 모습이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정신병을 얻은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을 얻었다." - (공민왕 21년 10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속에 스며들어 있다.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길래, 그야말로 국경을 넘어 영혼이 통하는 사랑이었던 듯 하다.
2. 반원주의자 공민왕, 원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지다
그렇다면 고려 왕자였던 공민왕과 멀고 먼 원나라의 노국공주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고려가 처했던 비극적 현실속에 그 답이 있다.
중국의 베이징.
베이징은 공민왕이 살았던 시절에도 '대도(大都)라 불리는 수도.
원나라 황제가 살았던 황도인 만큼 토성 등의 유적지가 곳곳이 남아있다.
'원 대도성 토성 유적지(元 大都城 墻遺址)'
가로 24미터, 높이 12미터였던 토성은 600여 년의 세월에 늙어버려 이제는 작은 언덕으로 변해버렸다.
토성 내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켠에 쿠빌라이 칸(원 세조, 1215~1294)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베이징에 입성할 당시 모습이다.
원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전무후무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의 예술은 화려하게 발달했다.
이때 수많은 이민족이 유입되었고 원나라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관청을 설치했다.
"원나라 대도에는 외국인들을 접대하는 전문관청이 있었습니다.
그 관청은 대도성을 설계할 당시에는 외성 쪽에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교류가 늘어나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자 황성의 앞부분과 지금의 왕푸징에서 자금성에 이르는 북동쪽에 외국인 관련 시설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 진따수 교수(베이징대 고고연구소)
현재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건국되며 새로 지은 것이다.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기 이전에 이곳에 공민왕이 있었다.
1441년.
열두살에 볼모로 끌여온 어린 공민왕.
공민왕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몽골족은 원나라를 세운 뒤 투항한 정권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질들은 주로 원나라 황제의 호위군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많은 왕들 역시 젊은 시절, 원나라의 대도(수도)에서 황제의 호위군을 맡았습니다."
- 짱판 교수(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그러나 공민왕은 고작 12살.
이곳에서의 공민왕은 단지 어머니와 생이별한 어린아이 일뿐이었다.
외롭고 두려운 볼모생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는 왕자를 볼모로 잡아두는데 그치지 않았다.
원나라는 고려의 왕들을 맘대로 임명했고 또 폐위시켰다.
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왕위를 두 번씩 주고받는 기행까지 겪었다.
父 - 충숙왕 : 1313~1330, 1332~1339,
兄 -충혜왕 : 1330~1332, 1339~1344.
고려의 왕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고려왕의 귀향살이도 흔했다.
형 충혜왕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귀향길에 겪은 수모는 특히 모욕적이었다.
원 사신은 고려왕 충혜를 꾸짖고 때리기까지 했다.
"왕을 발로 차면서 포박하였다."
"원나라 사신은 고려왕을 꾸짖었다." - <고려사> (충혜왕 후4년, 1343)
충혜왕은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으로 귀향갔다.
수행하는 이가 없이 손수 옷보따리를 들고 떠났는데, 그 길로 단명하고 말았다.
충혜왕 나이 29살이었다.
"게양은 연경(베이징)에서 2만 리나 떨어진 곳이다."
"한 사람도 수행하는 이가 없어 손수 옷보따리를 들고 떠났다."
- <고려사> (충혜왕 후4년, 1343. 12월)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었고 공민왕 개인적 원한이었다.
"원의 집권기는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몽고족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몽고족이 정복한 국가는 거의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 역시 국가의 독립은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원 집권기 중국과 동아시아 관계는 매우 특수하였습니다."
고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원은 고려의 왕과 원나라의 공주를 혼인시켰고 그 아들을 북경에 데려가 인질로 삼았다.
결국 몽골공주와 결혼한 자가 고려의 왕이 되었고 몽골공주의 아들 된 자가 고려의 왕이 되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 자연히 모계 혈통인 원나라인 왕자에게 왕권은 돌아가게 된다.
5명의 고려왕(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목왕, 충정왕)은 모두 7명의 몽골공주와 결혼했다.
이들은 7명의 부인 앞에서 고려의 왕이 아닌 신하로 살았다.
심지어 쿠빌라이 칸의 딸에게 장가든 충렬왕은 부인에게 맞고 살았을 정도였다.
"충렬왕이 자기(제국대장공주)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욕을 하고 때리기도 했다."
- <고려사>
공민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 노국공주와 결혼한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1344년 형 충혜왕이 유배길에 오르며 공민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조카 충목왕이 오르고 그후에도 충목왕의 서자 '저'가 공민왕을 제치고 충정왕이 되었다.
"공민왕은 두 차례에 걸쳐 왕위 계승에 실패합니다.
실패하는 과정에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그 이유가 원 황실과의 부모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란 것,
바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국공주와 결혼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홍영의(국민대 연구교수)
게다가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이었다.
공민왕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공민왕은 두 번의 왕위를 빼앗긴 지 불과 5개월 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서둘러 혼례를 치뤘다.
그리고 2년 뒤 공민왕은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원나라 공주 노국공주의 결혼. 그것은 당연히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천생의 인연이 됐고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킨다.
3. 역경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에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이 한 점 보관되어 있다.
<천산대렵도>.
원래는 두루마리 형태였으나 지금은 형태만 남아 '수렵도'라고도 불리는 <천산대렵도>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그림이 정교한 필치와 깊이있는 색조로 묘사되어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 화가다.
그 수준은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공민왕의 그림은 세밀함이 현실 같으니 진실로 세상 사람의 그림 같지 않았다." - <양엽기>
"필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 조선 숙종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공민왕.
그는 고려의 다른 왕들과는 기질이 달랐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대신 고려의 호방한 기질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공민왕은 고려라는 나라에서 사냥을 하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고, 심지어 말도 타지 않았다.
"왕은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려사>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감성적인 코드가 일치했다.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1349년 <고려사> 기록에 나타나 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후궁을 들이자는 청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결혼 11년째였다.
결혼하고 십 년이 지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대신들의 청은 어렵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재상들이 공주가 아들이 없으니 명문집 딸로서 아들을 낳을 만한 여자를 선택할 것을 청했다."
- <고려사> (공민왕 8년 4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시련을 이기며 돈독해졌다.
1359년 공민왕 10년.
20만 명의 홍건적이 무서운 속도로 남진해 20여 일 만에 평양이 함락되고, 두 달 후 개경까지 넘어갔을 때 공민왕고 노국공주는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은 험했다.
"신미일. 비와 눈이 내렸다.
왕이 이천에 머물렀는데 옷이 젖고 몸이 얼어서 섶으로 불을 피워서 몸을 녹였다."
- <고려사> (공민왕 10년 11월)
한 달 뒤 12월.
마침내 공민왕 일행은 안동에 도착했다.
<영호루(映湖樓)>는 안동의 대표적 정자다.
고려말 유학자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유학의 대학자인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편액이 걸려있다.
안동에 머물던 공민왕도 <영호루>에 편액을 내렸다.
영호루의 현판은 안동 피난시절 공민왕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왕이 서연에 참가하셔서 '영호루' 세 글자를 써서 내렸다(映湖樓 三字)"
- <고려사> (공민왕 10년 12월)
공민왕은 영호루를 자주 찾으며 심신을 추스렸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었던 안동김씨와 권씨, 장씨의 위패를 함께 모신 <태사묘>. 이곳엔 공민왕이 안동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내린 유물들이 남아있다.
색실로 복숭아꽃, 나리꽃, 무궁화, 모란 등의 꽃무늬를 수놓은 비난,
모란꽃으로 장식한 금대인 허리띠,
금대를 포함한 두 대의 혁과대는 관직에 많이 등용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한 공민왕이 직접 사용했던 은식기도 남아있다.
은식기와 은수저는 안동 백성들의 식복을 축원하고 있다.
노국공주가 사용했던 부채도 있다.
부채살이 없는 특이한 모양의 부채다.
안동의 옛이름을 딴 읍지인 <영가지(永嘉誌)>.
여기엔 공민왕이 안동을 도읍지로 승격시킨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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