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최태영 인터뷰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최태영은 이병도가 내내 단군을 신화라고주장했으나 말년에 회개(?)하였다고 주장.
그러나 진실은? 1954년(최태영이 말하는 이승만 시절)에 출판된 이병도의 국사대관 내용 중
-단군은 즉 이 천왕의 아들이라하여 천왕을 봉사하던 고조선 사회의 제주祭主요 군장이었던 것이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신정시대 - 즉 제정일치시대의 모든 군장이 다 그러한 관념과 직책을 가져 제주는 의례히 군장의 직을 겸임하고 군장은 또 의례히 제주의 직을 겸하였던 것이다.... 하여튼 나 역시 이를 고유명사로 보는 이보다 어떤 존칭, 존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단군을 신화가 아닌 실존하는 지배자의 칭호라고 분명히 제시하고 있음.
웅녀는 웅熊이 여신女身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실상은 아래에 말한 바와 같이 지상족 - 즉 국신족國神族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하면 즉 천신족인 환웅과 지신족(국신족)인 [고마]족의 여성과 결혼하여 단군을 생生하였다는 것이다.
역시 단군이 신화가 아니라 천신을 모시는 일족과 지신을 모시는 일족의 결합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묘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 ... 모함 즐이요.
최 태영 박사가 한 인터뷰 보면 정말 어이도 없네요! 얼마나 역사를 다 고쳤는지 거기에서도" 책들은 고쳤는데, 지리지는 손을 안대서 란 말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대동여지도 서문, 세종실록 지리리 제가 자주 거론하는 부분인데요! 최태영 박사도 단군이 47대까지 있던걸 일제가 다 없앴다고 하고 북경가지 조선의 땅이었다고말하죠! 외국 선교사들이 그린 지도와 내용들만 봐도, 엄청나게 큰 사막과 조선의 강은 동쪽으로 흐른다 입니다 대동여지도 서문에 백두산이 하얼삔에사 가깝다고 했고 또한 일제가 내 놓은 "김정호"선생이 그린 '대동 여지도"가 반도 뿐일까요? 일제가 다 없앴고, 한반도로 몰아 넣았다고 하ㅔ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됬다는 고서중에 "산해경"이란 책이 있는데 단군시대 는 거기에 다 내용이 있다네요
그가, 한창 자랐던 시대가 일제강점기인지라 식민지 시대 일본인 스승밑에서 공부해야 했던 엘리트였기 때문에, 시대의 모순에서 자유로울순 없을겁니다. 뭐, 본인이 그 시대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건 아니지만;;; 어쨎거나, 조선사 편수위에서 근무했단건 친일경력으로 들어가는건 맞습니다. 이건 과인데, (근데, 역으로 일제 식민사학을 비판한 진단학회의 창설하기도 함ㅋㅋㅋ이거 사람들은 잘 모름.) 뭐...그를 두고서 식민사학의 꽃이란 비아냥 대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이병도는 일본 스승밑에서 배운 제자의 입장이긴 하지만, 조선인으로써 그들에게 반발하는 구석도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공이라고 한다면, 어쨎거나 고조선을 비롯해, 우리나라 역사를 전반적으로 관심을 가지로 연구를 진행한 선구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도읍지인 아사달을 아사=아침, 달=땅이니 요령성 조양朝陽 부근이였을 것이라 추측한 최초의 사람도 이병도임. 식민사학자란 오명도 듣고 있지만, 나름 고조선의 실체화에 주력한 사람이고, 위만이 연나라 중국인이 아닌, 상투를 틀고 오고 조선문화에 동화되었으니, 조선계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병도는 위만뿐만 아니라 기자도 조선계라고 주장했구요. (기자를 백제의 왕을 의미하는 고어인 건길지와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도 했던 것으로 압니다.)
단순히, 식민사학자라고 치부하기보단 물론, 그의 연구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요. 어쩔수 없는게 당시의 우리 역사학계는 거의 불모지나 다를바 없었기에,백지 상태에서 어느학문이든 초기 연구가 의레 그렇듯이 많은 시행착오가 있는 법이죠. 현대에 들어,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고 새 가설과 학설이 발표되고 하니까 그의 학설중 오류가 고쳐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를 무작정 비난만 할것은 아닙니다. 공과를 분명하게 평가해야되고 그의 시대적 한계에 타산지석을 삼아, 청출어람하는 태도가 마땅할 것입니다.
친일도 단순 친일인지? 적극적 친일인지?를 따져야 하는 법입니다. 이병도가 매국노인가-.-?의 문제에선 글쎄요.. 그의 연구의 시대적 한계점은 저도 인정하는바지만 그것으로써 그를 매국노라 부르는건 분명 어폐가 있습니다.
뭐, 재야사학에서 자기들이 마이너리그라, 주류에 끼지못하니 역으로 주류를 강단사학이라고 이병도의 제자들때문에, 애국자인 우리가 저런 매국노들에게 밟힌다는 투로 몰아부딪히는 편인듯 한데..;;; 웹에서 돌아다니다보면, 이병도를 무슨 프리메이슨? 흑막에서 조종하는 악마의 시조?반열까지 올려 욕하는 것을 흔히 보는데.. 그때마다 좀 황당한 내용도 많아서-.-; 그다지 공감은 안됨.
제가 볼때 일제시대때 한국인들의 역사수준이 지금만큼은 아니였겠죠? 그러다 보니 일본교수들 식민사관의 일본교수들을 추정할수는 있었겠죠.. 그당시는요.. 나의 지도교수의 연구에 반박할수가 없었겠죠.
그런데 해방후에도 이사람은 정확한 연구와 고증을 통하지 않고 스승의 연구가 정설인양 식민사관의 역사를 우리에게 그대로 주입한거와 기득권이 되어서 스승의 연구에 벗어난 논문들을 인정하지않는 우 를 범합니다.. 이사람이 역사학의 원로지만 정확한 매국노라기 보다는 매국노에 가까운 짓을 한거라 봅니다.
알면서 그랬는지~ 아님 역사학도 될만한 사람이 아닌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행동인지는 알수없지만요. 그런데 그당시의 반박할 연구도없었다고 봅니다. 그당시 역사학의 교수들이야 논문을 발표하지만 제대로 된 논문이였겠습니까? 그리고 북한.중국이 공산화로 현장답습 할수도 없었고.... 연구를 한다고 해도 한국에서 살아남은 역사서 만 가지고 연구를 하다보니 반박할수가 없었겠죠.. 한국에 남은 역사서라 해봤자. 반도사관.식민사관에 적합한 책들만 있었으니..부정할수가 없었게죠
진단학회 창립자인 이병도가 어떻게 식민사학자라 불릴수 있는지.. 재야사학의 탈을 쓴 사이비들이 자기들 소설이 주류가 되지 못하니 사학계 거두를 친일파로 몰아간게 맞겠죠.
. 1934년 5월 7일 창립 당시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은 일본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구성과의 대부분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어로 발표되었다. 연구자료도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또한 연구의 많은 경우가 식민사관에 따라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인 학자들의 민족적 자긍심은 찾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국문화의 개척·발전·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에서 일단의 학자들이 이 학회의 창립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발기인으로는 이병도(李丙燾)를 비롯해
할말은 그것뿐. 사학계의 거부할수없는 절대권력이며 동시에 식민사학자라서 후학들에게 식민사학이외에 다른 것을 모조리 배척하게 만들었따...라고 망상질을 해야 사이비역사학자들이 간신히 밥줄을 챙길수 있거든요. "원래 우리가 맞는데 친일파 놈들때문에 힘을 못써!!" 친일파 라벨링은 빨갱이 라벨링과 함께 한국 정치판에서 흔히 쓰이는 꼼수죠.
이병도 이전 학자들은 위만을 조선 유민으로 인정하지 않죠. 다만 도둑놈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병도 이후부터 위만은 조선 유민이라 부르게 된 겁니다. 또한 사기에도 한 무제가 조선을 공격할 때는 위만조선은 존재하지도 않던 때이고 발해만 유역에서 산동반도에 걸쳐 있는 곳이죠.
님 글 보니깐...식민사관이 그냥 몸에 배신거 같네요... 이병도 친일 왜곡사학재 맞고요..식빠의 기준이 뭔지도 모르시는데...그냥 자연스럽게 식빠가 몸에 익으신거 같습니다. 한사군 평양설이 식빠 출발점이고요..ㅡ이병도가 죽기전 유언 잘아시겠죠? 이병도가 잘한것도ㅜ있다고 쉴드 치는 자체가 식빠예요. 살인자가 저 사람은 살인했지만 평소 착하소 봉사도 잘하고...아런씩으로 물타기 하는것도 식빠입니자. 이병도는 그냥 감정적으로 까는 되는 그런 벌레입니다. 토론 하고 싶으시면 시작하세요...
위에 천군치우k의 댓글 이병도씨가 죽기전에 이런걸 신문에 사설로 냈죠 "단군 조선"은 다시 연구되어야 하고 "단군 조선"은 실존한다 라고 신문에 기고한 내용이죠! 이거 하나만 봐도 "단군은 신화"다고 왜곡 됬다는걸 밝히는 거죠! 최태영박사가 친구로서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이병도가 죽기전에 유언으로 남긴게 "단군은 실존 인물'이다라고 남기죠 "동아일보"엔가 실린걸 본적이 있습니다
그 동아일보 내용 1986년 최태영 인터뷰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최태영은 이병도가 내내 단군을 신화라고주장했으나 말년에 회개(?)하였다고 주장.
이 개소리의 진실
1954년(최태영이 말하는 이승만 시절)에 "출판"된 이병도의 국사대관 내용 중
-단군은 즉 이 천왕의 아들이라하여 천왕을 봉사하던 고조선 사회의 제주祭主요 군장이었던 것이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신정시대 - 즉 제정일치시대의 모든 군장이 다 그러한 관념과 직책을 가져 제주는 의례히 군장의 직을 겸임하고 군장은 또 의례히 제주의 직을 겸하였던 것이다.... 하여튼 나 역시 이를 고유명사로 보는 이보다 어떤 존칭, 존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단군을 신화가 아닌 실존하는 지배자의 칭호라고 분명히 제시하고 있음.
웅녀는 웅熊이 여신女身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실상은 아래에 말한 바와 같이 지상족 - 즉 국신족國神族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하면 즉 천신족인 환웅과 지신족(국신족)인 [고마]족의 여성과 결혼하여 단군을 생生하였다는 것이다.
역시 단군이 신화가 아니라 천신을 모시는 일족과 지신을 모시는 일족의 결합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묘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
유언드립은 좀 웃겼어요 ㅋ
식빠면 식빠답게 식빠짓이나 할것이지 얌전히 조선사편수회에서 친일짓거리 하면 될것을 뭐하러 조선인들끼리 진단학회 만들다가 탄압당하고 그럴까요 앙? 걍 사마천사마께서 사기에 적으신대로 위만은 연나라 유민인데 저으기 동쪽에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털어서 지가 왕자리 꿰찼음 ㅋ 하고 사기 내용 그대로 따먹으면 될껄 뭐하러 상투틀었으니깐 걘 조선인 ㅇㅇ 이런 맹랑한 주장을 하면서 무리하게 위만을 조선인으로 둔갑시켰을까요 식빠답지도 않고 실증사학자답지도 않게 왜 이렇게 민족주의스러운 모습을 보였을까요. 식빠가 아니란 얘기죠. 이건...
이병도 이전 학자들은 기자조선 부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조선은 한무제에게 털린 적이 없습니다. 위만조선이 있던 곳은 위만은 없고 이미 조선인이 다스리는 4개 나라로 분열된 상태에서 한무제가 전쟁에 진 것으로 나온 답니다. 오히려 한무제와의 전쟁이 끝나고 10-20년 뒤에 4개로 분열된 나라가 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고조선이 한무제에 망했다는건 기록상 말이 안되죠. 또한 한무제 당시 기록인 사기에는 한사군이 나오지도 않는데 200년이 지난 전한서에 한사군이 나온다고 고조선이 털렸다는건 문제가 있어요. 유물이라는 것도 지금으로 치면 우표 같은 역할을 하는 봉니가 나왔다고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하니 어의가 없는 겁니다. 그외 한사군 유물은 지금에 와서 조작이라는 의견들이 많죠.
역시 식빠가 몸에 완전히 숙성되신븐이군요. 본인으느아니라고 하지만 식빠 맞습니다. 위만이 조선인이라고 식빠가 아니라고요? 고조선 수도 평양설이 식빠 아니라는 증거라고요? 그게 바로 식빠라는 증거입니다. 위만이 조선인이든 아니든 수도 평양...즉 한반도 자체가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이병도가 식빠가 아니라고요? 아사달 평양설이 한국의 역사 출발 자체를 식민국가로 보게 되는거고 그게 바로 식빠의 시작입니다. 그냥 일본 가셔서 한국사 전공하세요.
참 웃기시는 분들 많네요.. 위만 조선만 가지고 이병도교슈를 애기하는게 아닙니다. 몇유저분들 말처럼 처음으로 위만조선을 인정했다고 합시다... 그런 연구로 한사군지역 연구는 왜 안했나 싶네요? 위만조선요 사마천 사기보면 다 아는애기 아닌가요? 사기에 나와 있는 내용 발표 왜 못합니까? 누구나하지요. 사마천 사기를 봤으면 한사군도 연구 좀 해야 되는거 아닌가요?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 식민사관의 역사관을 따라가는게 문제라는겁니다. 그리고 이병도 교수는 나름대로 대단한 연구 성과가 있나요? 나는 그게 궁금합니다.
우리는 과거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후세인인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요. 이병도교수를 그런 맹락에서 애기하는겁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요
그리고 확실한 연구성과도 없이 많은역사 왜곡을 주장한분이 잖아요... 연구성과로 인한 정설도 아니고 개인적인 가설을 정설로 해서 지금 까지 우리역사가 비뚤어진 거잖아요.. 그부분에 대해 말하는거죠.
그런 연구로 한사군지역 연구는 왜 안했나 싶네요? 위만조선요 사마천 사기보면 다 아는애기 아닌가요? 사기에 나와 있는 내용 발표 왜 못합니까? 누구나하지요. --->사마천 사기에 위만이 어느나라 사람이라고되어있던가요? 연나라사람이라고 돼있죠. 이병도는 이걸 상투틀고 조선옷입고 원래 그짝에 조선인 많이 살았으니까 위만도 조선사람임 ㅇㅇ 이렇게 한거고. 걍 생각해도 엄청 무리수인거 딱 보이죠? 상투틀었고 조선옷 입었고 고조선 체계 그대로 유지했고 원래 연나라 땅그쪽엔 고조선사람도 많이 살았으니깐 위만이는 조선사람이얌! 딴 고서에 뭐라고 되어있든 얜 조선사람! 이랬던게 이병도에요...민족주의 돋네.
이병도가 뭔 완전무결한 사람입니까? 어차피 연구는 나중에 나오는 다른 증거나 다른 해석에 의해 얼마든지 반박당할수 있는거고 이병도의 학설이 반박당하고 뒤집혔다는건... 이병도가 무슨 한국사학의 마왕이고 철옹성이라 그 누구도 그에게 반기를 들수없다라는 환빠무리들의 개소리가 정말 개소리였따는 훌륭한 증거가 되겠네요.
홍만종과 홍명한은 각각 현도군이 함흥, 함북 영흥에 있다고 비정했다. 동방변군 모두를 한반도 안으로 잡은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에서 비판하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에 합당한 것은 이들의 주장 밖에 없다.
3. 이기백 이기백은 <한국사신론>(1986, 개정중판)에서 이병도와 같은 입장을 보인다. 즉 초기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 동가 지방에 있었다고 말한다. 역시 한사군 한반도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한사군중 현도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으므로 한사군이 다 한반도에 있다는 한사군 한반도설이 아니라는 의미)
4. 이종욱 , 김한규 이종욱의 견해 역시 이병도-이기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치 비정 문제를 떠나서 이들은 아직 동방변군을 변군이라는 성격에서 판단하지 못하고 "콜로니"라는 고대 식민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병도고 자시고고간에 "님이 의미하는" 한반도 한사군설..이라면 조선시대 조상님들께서 이미 주장하신적이 있는 학설이네요. 일제강점 이전에 미리미리 식민지사학의 터를 닦으신 분들인가요 이해 못했을까봐 덧붙이면...
이병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작정 식민사학자로 까는데 비해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오히려 민족사학자로써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강단사학계가 썩어서 재야사학이 힘을 못 쓰는게 아니라- 이분들은 가설은 풍부한데(?)그걸 체계화 시키지 못해서 그저, 음모론 비스무리하게 대중들을 흥미를 건들이는 선에서 선동하기 때문에 인정을 못 받는게 크구요;;
그래서 다시 욕하는게 실증사학이죠..-.- 사실, 실증사학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으로 개념으로 욕할건 아니거든요. 실증사학? 도대체 실증없는 역사연구는 어떻게 해야되는 것일까? 문제까지 넘어가게 되죠. 역사학이란 것도 결국 실증을 위한 학문입니다. 물증없는 연구? 그거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좀 가생이로 데려와보세요-.- 저도 진짜 보고 싶어요.. 학문에 있어서 연구방법은 다양하고, 장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실증사학에 대한 견해 일부는 보충해보자면, 역사연구에서 실증이 매우 중요합니다. 때문에 실증사학이 근대 역사학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실증사학이 등장은 역사연구가 종교과 철학, 특히 정치에 의해 지배하에 있던 상황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음을 부정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실증사학도 일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사실의 '객관성' 자체의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실증주의 사학은 행위주체에 대한 부분을 포괄하지 못한 문제가 크재 존재했습니다.
또한, 강단사학 이병도 절대설을 믿고 있는 분들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이병도의 실증사학을 따름으로서 범했던 몇몇 오류들은 현재 상당수 교정되어졌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초기 연구에 있어선 어느 학자나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글고, 이병도의 문제가 과도한 문헌중심의 연구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그 한계를 넘으려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국내 역사학의 기초를 닦았다는 업적은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웹상에 떠도는 알팍한 말만 듣고, 악의 화신?으로 까댈 생각만 하지 말고, 그의 공과를 바로 볼수 있도록 하고 그의 연구의 한계점을 한차원 승화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선에서 이해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이게, 선악의 개념으로 싸우면, 끝이 없을 내용이거든요.
이병도가 나라팔아 호의호식한 친일파들과 같은 비교선상에서 보는건 극히 오바구요- 일본인 밑에서 수학한건 맞는데, 자기 정체성이 조선인이란 자각은 있었던 사람이예요. 이병도는 전후 일제의 식민사관을 털어내고자 진단학회를 창설했습니다. 일본 스승밑에서 배운건 시대적 한계점이 맞지만, 앵무새처럼 거기에만 매인 인물은 아니예요.. 뭔가.. 일본스승 밑에서 배워 식민사학에 세뇌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게 오해라고 제가 위에서도 적었습니다만-.-? 뭘 보신건지?
누구말대로 식민사학자인데, 위만과 기자가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계라고 주장하고,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이 만주 요령성에 있었을 것이라 주장을 하겠습니까? 말이 안되는거죠..
당시에 미흡한 연구접근 방식이나 부족한 데이타 양상이였던 것이 이후 후배 사학자들의 노력과 현대의 빠른 고고학적 발굴과 진지한 새로운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고 그의 오류들도 상당부분 고쳐졌다고도 썼습니다. 고로, 일제이후 통설로 권력화해서 이론을 공구리? 쳤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모순적 표현의 의미를 모르겠네요-;;
하여간, 어디서 떠드는 소리만 가지고 한 인물을 평가한다는 건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공과를 평가하도록 노력해야되고, 공은 인정하되, 과는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하며 음모론에 빠지는 것 또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병도가 식민사학자인데 위만이 조선인이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기자까지 조선인이라고 무리수를 두어가며 주장을 왜 하겠냐구요-.-?
식민사학자 친일파면, 조선의 피를 방혈을 해서라도 일본인이 되기위해 과잉충성하면서 광복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해서 잘먹고 잘살면 되었을텐데 김완섭, 오선화처럼 살면 장땡이지...;;
일제시대 행적중에는 의심가는게 이병도가 조선사편수회에 가입했으니 친일파사전에 올라있는데, 역으로 진단학회의 멤버중에 조선사편수회에 가입 안한사람 찾는것도 어렵지 않나요? 그 무렵에는 민족주의든 친일이든 간에 역사학자라면 무슨 단체에 가입해야 되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에서 적극적 친일인지? 소극적 친일인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했구요. 당시 엘리트 지식인중에 일제랑 안 엮일 사람 솔직히 없지요.
이병도가 고조선을 부정했다?
단군신화를 토테미즘으로 해석 하고 단군조선을 신화가 아닌 국가의 모태로써의 실존하는 국가로 실체화시켜 이해하기 시작한게 바로 이병도임. 이병도가 죽기직전에 단군조선이 있었다고 양심선언 했다고?ㅋㅋㅋ 위에서도 까였지만 단군조선을 역사의 무대로 끌어올린게 이병도인데 뭔 양심선언?
80년대에 자본주의 맹아론을 이병도가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국사학계의 업적"이라고 평함. (정작 뉴라이트?- 자본주의 맹아론 비웃음..)
한국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를 부정할때 쓰는 대부분의 논거들 (니혼쇼키의 부정확성, 일본이라는 명칭이 훨씬 후대에 등장)은 이병도가 임나일본부를 비판하면서 쓰던 것들. (누구말대로 식민빠인 이병도가 임나일본부설을 개드립이라고 비웃었다니!?) (임나일본부설 최초 비판자가 이병도인건 아이러니죠 ㅋㅋㅋ)
●진단학회는 민족애의 발로인가 조선사편수회 내 한국인 연구자들의 경우, 연구 성과를 자유로이 발표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 국사연구자들은 이병도를 주축으로 몇몇이 모여 '진단학회(震檀學會)'를 구성한다. 그기록 {진단학보}를 발행,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장을 마련하게 된다. 1934년 5월 11일에 조직된 역사연구회인 '진단학회'는 이병도 등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진단학회의 목적은 '조선 및 인근문화의 연구'를 표방한 것이었다. 즉 조선 및 인근의 문화를 연구하는 역사학·고고학·국어학·국문학·민속학 등 당시까지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학자들의 힘으로 연구, 발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설립되었다. 이 회의 발기인 및 초대 위원은 다음과 같다.
진단학회에는 이병도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의 동창들과, 경성제대 출신 등 다양한 인맥과 성향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병도를 비롯한 진단학회의 주요구성원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진단학회' 활동을 했다는 것은 진단학회가 일제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난 단체가 아님을 입증시켜 주는 것이다. 이병도가 진단학회 창설에 발벗고 나선 직접적인 동기는 일인 학자들과의 마찰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기반으로 중국 등지로 침략 범위를 확대시켜 나감에 따라 그들의 조사, 연구 사업도 확대되어 갔다. 조선사편수회가 설립된 지 얼마 후 서울에서는 일인 학자 중심의 청구학회(靑丘學會)가 생겨나면서 일본 학계의 학술지가 호를 거듭하여 발행되고 있었다. 이마니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학보}가 발간되었는데, 이때 이병도는 {조선학보}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게 된다. 이병도는 '삼한 문제의 신고찰'이라는 원고를 써주었으나 청탁자가 다시 찾아와 다른 원고로 바꿔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이병도의 학설이 이마니시의 설에 반해 저축되는 바가 많아 이마니시가 보면 학보 경영상 지장이 있을 우려가 있다는 일인 회원들의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동양학보}에 실린 이병도의 '청양촌(淸陽村)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읽은 경성제대 교수 다카하시(高橋亨) 박사가 이 학보 편집자인 안확(安廓)에게 "이병도는 사학 연구를 하는 사람인데 왜 유학에도 손을 대느냐, 앞으로 손대지 마라고 일러라"라고 한 말을 이병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일인에게 학문 연구와 관련한 제재와 모욕을 당한 이병도는 이윤재의 주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후원을 얻어 진단학회를 만들게 된다. 이것은 이병도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진단학보}를 통해 그동안 발표하지 못했던 논문을 국한문으로 고쳐 발표하였다. 한인 중심의 진단학회의 창립과 학보 발간은 일인 관헌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초기에는 직접적인 탄압은 없이 사전 검열만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전문적인 내용인지라 검열에서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진단학보}는 창간, 계간으로 14집까지 계속 발간되었다. 이병도는 이곳을 통해 역사 지리에 관한 기본적인 과제로서 [삼한문제(三韓問題)의 신고찰(新考察)]을 발표하게 된다. 이병도는 이 논문으로 일본 사학계의 모순이 많던 고대사의 제문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 합리적인 해석을 얻게 되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그뒤 그는 '삼소고(三蘇考)'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을 읽은 이케우치 박사가 그때까지 미개척 연구 부분인 지리도참 사상을 밝혀나가기를 그에게 종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병도는 그의 권유에 따라 그 방면의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지리도참 사상의 기원으로부터 그것이 우리 나라에 전수된 경로와 배경을 연구하게 되고, 이러한 문제를 핵심으로 삼아 풍수도참과 시대와의 상호관계성을 해명하는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 연구의 성과는 {고려 시대의 연구}로 발표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진단학회'가 형식적인 면에서는 한인 중심의 학회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독자적인 조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사관 연구로부터 벗어나서 국사를 연구하는 단체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님을 입증시켜 준다. 또한 당시 일제가 관변 학술 단체 이외에 민간 단체의 결성을 오히려 독려하면서 국사 연구의 영역 확대를 꾀했다는 점으로 볼 때 진단학회의 창설 자체를 일인에 맞선 학문적 투쟁의 의미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병도가 이끌었던 '진단학회'는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하자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김성수(金性洙) 등 찬조위원의 도움을 받으며 학보 제14호까지 발행하였다. 그러나 1943년 9월 일제 말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글 사용이 극도로 탄압을 받는 가운데 진단학회 회원과 이병도는 "스스로 학회를 해체하고 학보 발행을 중지" 하였다. 진단학회는 해방 후 다시 재조직되어 학보 제16호까지 발행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중지, 그후 다시 발족되어 학보는 계속 발간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국사연구학회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진단학회는 조선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정치에 좌우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평가 위에서 볼 때 '진단학회'는 조선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 위한 장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그 내용은 식민 지배의 틀 속에 머무른 것으로서 '조국애'의 발로라기보다 '학자들의 이해 관계'를 담아냈다는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이병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친일사학자라고 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인 실증주의 역사학자라고 하는데 사실 "글로벌 스텐더드"에 따르면 민족주의 역사학자에 가깝다.-라는 평가도 있군요.
확실히 나이가 들수록 주장한걸 보면 민족사학에 요즘으로 치면 국뽕이란 소리도 들을수 있을정도인거 같긴함. 친일사학자란 사람이 이런 소리도 했음? 함직한게 꽤 많아서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던적도 있고. 아마, 그래서 늙어서 회개한 것이라고 하는 모양임 ㅋㅋㅋㅋ (물론, 최태영이 그래시켰다고 하는건 낭설이지만..)
공정한 사료에 의한 정확 간명한 조선역사의 편찬을 표방하고 있으나,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다음해 임명된 세 촉탁(囑託 : 京都帝國大學敎授 三浦周行, 同大學講師 今西龍 및 東京帝國大學敎授 黑板勝美)이 편술한 「조선반도사편찬요지(朝鮮半島史編纂要旨)」에 그 숨은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즉, “여러가지 제도를 쇄신해 혼돈상태의 구태를 이혁(釐革)하고 여러 가지 산업을 진작해 빈약한 민중을 증제(拯濟)함은 조선의 시정상 당면한 급선무의 일이라 할 것이나, 이러한 물질적인 경영에 힘씀과 함께 교화·풍기·자선·의료에 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이 백성들의 지능과 덕성을 계발함으로써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부끄럽지 않는 지위에 오르도록 부도(扶導)하기를 기하는 바이다. 이번에 중추원에서 명한 조선반도사의 편찬도 또한 민심 훈육(薰育) 한가닥에 보탬을 주고자 하는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을 충량한 일본제국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한민족사를 다시 편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를 더욱 부연해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의 야만반개(野蠻半開)의 민족과 달리 독서속문(讀書屬文)에 있어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사서(史書)로 보존되어 있는 것도 많고, 또한 새로운 저작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자는 독립시대의 저술로 현대와의 관계는 빠져 있고 공연히 독립국의 옛꿈[舊夢]을 추상(追想)하게 하는 폐가 있다.
후자는 근대조 선에 있어서의 일청(日淸)·일로(日露)의 세력경쟁을 서술해 조선의 향배(向背)를 논하고, 또한 『한국통사(韓國痛史)』라고 불리는 재외조선인(在外朝鮮人)의 저서와 같이 사실의 진상을 규명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망설(妄說)을 힘써 서술하고 있다. 이들 사적(史籍)이 인심을 고혹(蠱惑)하는 해독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정도로 크다.” 고 하였다.
한국인에 의한 민족사서(民族史書)가 바람직스럽지 못한, 즉 민족적 독립심이나 키워주는 것이니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서를 절멸(絶滅)의 방법을 강구함은, 다만 힘만 들고 공(功)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책의 전파를 격려하게 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구사(舊史)의 금압(禁壓) 대신에 공명적확(公明的確)한 사서로 바꾸어 놓음이 첩경(捷徑)일 것이며, 또한 효과가 더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의 편찬이 필요한 주된 이유인 것이다.” 결국, 식민지 통치에 부합되는 역사의식을 지닌 인간을 키워내기 위해 새로이 조선반도사를 편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사를 그들의 침략의도에 맞도록 왜곡 편찬을 서슴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