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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중 - 11
게시물ID : history_77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구이일
추천 : 2
조회수 : 86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2/21 23:08:36

오늘은 고려의 후기 정치 변화 및 대외 관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고려 후기 무신 정권까지 정치 변화는 이전에 설명한 것과 같이 간략히 보면


호족 -> 문벌귀족 -> 무신정권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로 권련의 추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태조왕권, 광종, 성종 등을 거쳐 국가체제가 어느정도 틀을 잡자 호족들이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때의 문벌귀족은 여러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치적으로는 음서제도를 통해 신분을 타고나면 관직을 가질 수 있었고,


조상 즉, 이전의 공에 따라 관음전을 받아 경제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내부는 폐쇄적으로 같은 신분끼리의 결혼을 하는 등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특권에대한 모순으로 인해서 사건이 벌어졌는데,


먼저 폐쇄적인 통혼권으로 인하여 그 당시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그 시대의 보수세력 개경파와 개혁세력 서경파의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두 세력의 대립은 결국 개경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지만, 일제시대 신채호는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 일대사건으로 진보세력의 패망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 됩니다.


간단히 각 파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면,


개경파는 대표적인 인물로 김부식이 있고, 보수적이고 사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휴학을 기본 이념으로 삼았으며 신라 계승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외교 정책은 금을 사대하는 풍습이었습니다.


서경천도운동을 주장한 서경파는 대표적인 인물로 묘청과 정지상이 있습니다. 또한 개혁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개경의 세력은 쇠하였고, 서경이 세로운 수도가 되어야 하는 주장하는 풍수지리를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금정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렇듯 서경파의 세력이 쇠하였고, 문벌귀족의 특권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 근현대사의 516군사 정변과 비슷한 무신정변이 1170년에 일어나서 무신이 정권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 최우 순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 때 정치기구도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경우 중방이라는 정치기구가 중시 되었고,


최충헌 시기에는 교정도감을 만들어서 정국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뒤에 최우는 정방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인사권까지 장악하였습니다.


군사조직은 경대승 시기에 도방이라는 군사 사조직이 결성되었고, 그 이후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최충헌 때 다시 도방이 부활하였고,


최우 시기에 삼별초가 생겼습니다.


이 최우시기에는 몽골이 쳐들어와서 강화로 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권문세족 이전 까지의 정치 세력 변화 입니다.


이제 고려의 대외 관계에 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초기 고려가 건국되었을 때는 호족 세력이 고려의 정국을 주도하였으며, 거란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초기에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자주적이고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하여 거란에 저항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서희와 강감찬이 있으며, 두 인물은 모두 알다시피 서희는 외교력을 사용하여, 오히려 전쟁을 걸어온 거란과 협상을 통하여


강동 6주를 받아낸 인물이고, 강감찬은 나중에 거란이 말을 안듣는다고 쳐들어 오자 귀주에서 전쟁을 통하여 물리친 장수 입니다.


이러한 인물말고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건축하고 천리장성을 건설하는 등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실질적으로는 호족 세력이 문벌귀족으로 변모한 것이기 때문에 시기 구분은 모호하지만 구분이 쉽도록 구분하겠습니다.


그 이후 문벌귀족이 정권을 잡자, 성격이 조금 변하였습니다. 자주적이고 진취적이며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했던 초기와는 달리


사대적이며 신라계승의식이 강해졌습니다.  


그래도 초기에 윤관은 동북9서을 건설하고 별무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후에는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고, 금사대를 주장하는 김부식이 있었습니다.


이 이후에 문벌귀족은 세력이 다하고 무신정변을 통하여 무신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몽골이 침략해 들어와 초기에 많은 저항을 하였는데,


이 때 대표적인 인물이 최우와 배중손입니다.


최우는 강화로 천도하여 저항하였고, 배중손은 삼별초 항쟁을 벌였습니다. 이 삼별초항쟁은 강화에서 진도 그리고 제주로 근거지로 옮겨가며


저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몽골세력이 너무 강대하여 결국 몽골에 굴복하게 되고 이 때 친원파라 할 수 있는 권문세족이 성장하게 됩니다.


영토 또한 축소 되었습니다. 철령이북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원에 직접 간섭을 받았으며, 제주에 탐라총관부, 평양에 동녕부가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이전 송나라에 영향을 받은 관제또한 개편되었습니다.


2성은 첨의부로 6부는 4사로 개편이 되었으며, 중추원은 밀직사로 개편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내정간섭으로는 다루가치라는 일종의 총독이 파견되었으며,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기관인 정동행성이 생겼습니다.


또한, 몽골에는 매사냥이 유행하여 응방을 통해 매를 가져갔으며, 여자를 데려가는 공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이 강성한 시기에 권문세족이 성장을 하였으며, 도편의사사및 정방을 장악하여 정국을 손에 쥐었습니다.


이러한 권문세족은 음서와 대농장을 소유하여 엄청난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을 사대하여 몽골풍이 유행하였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자 원이 점점 약해지며 원명교체기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공민왕이 개혁을 일으키며 신돈과 신진사대부와 함께 반원정책을 펼쳤습니다.


공민왕은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으며, 몽골풍을 배제 하였습니다.


또한, 내정간섭을 가장 심하게 한 정동행성의 이문소라는 기관을 폐지하였고,


권문세족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기철이라는 자를 처형하였으며 정방을 폐지하였습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과 비슷한 전민변정도감을 시행하여 권문세족의 대농장을 다시 원래 농민에게 돌려주는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렇듯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힘이 부족해 결국 실패 하였습니다.


이 이후에 신진사대부는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하며 힘을 쌓은 신흥무인세력과 결합하여 다시 정권 찬탈에 도전하였습니다.


이 신흥무인세력 중 대표적인 인물인 이성계는 최우의 요동정벌을 무시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실패했던 전민변정도감과 틀을 빌려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권을 손에 쥐었으며,


결국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이렇듯 고려는 처음 시기부터 끝 까지 거란, 여진, 몽골, 홍건적, 왜구에 계속하여 침탈을 받았으며, 외세에 의해서


지배세력이 변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부의 지베세력이 변모하는 것을 내부에서 혁명도 있지만 외부 세력이 개입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은 고려의 토지제도, 경제생활 사회의 모습에 공부하고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오늘 하루 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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