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7월 8일 송산리 고분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한 발견. "
송산리 고분은 이미 1920년대 이후 일제시대에 발굴조사가 된 바 있는데, 1971년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하게 무령왕릉을 발굴하게 되었다. 이 무덤은 아무도 손대지 않은 거의 완전한 상태에서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묘주인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의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피장자의 신원과 무덤의 축조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많은 부장품들이 나와서 현재 공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금은제의 장신구와 무기, 용기, 동경 등 약 3000여점이 출토되었다. 벽돌로 쌓은 전축분으로 연도(羨道)와 현실(玄室)로 되어 있다. 궁륭형 천정과 벽 전체를 여러 문양의 벽돌로 장식하여 매우 화려하며 백제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 앞에는 지석과 그 위의 석수(일종의 서수), 화폐 등이 모형과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덤을 한번 연다는 것은 무덤으로서는 커다란 훼손이며 수백년 보존되어 왔던 옛모습을 일정정도 파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덤을 열 때에는 최근까지의 과학기술의 성과를 집약하여 매우 신중해야 하는 것인데 무령왕릉의 발굴에는 그런 점이 부족하였다고 지적되고 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군중들은 마치 서커스구경꾼처럼 발굴현장을 빙 둘러쌌고, 기자들은 발굴팀을 밀치고 무덤 속 유물들을 짓밟으며 연신 사진플래시를 터뜨렸다. 심지어 경찰조차 무덤 먼저 보겠다고 고개를 돌리자 발굴단은 망연자실했다. 때는 1971년 7월8일 밤. 이틀 전 충남 공주 능산리 백제무덤떼의 배수로를 파다 우연히 발견된 무녕왕릉 묘실 발굴현장은 혼란상 그 자체였다.
하룻밤새 소중한 무덤유물을 쓰레기 훑듯 퍼낸 치명적 실수는 이런 상황에서 빚어졌다. 발굴실무자로 무덤입구를 지켰던 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이호관씨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냥 놔두면 큰 일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30돌을 맞은 무녕왕릉 발굴은 미당 서정주의 친일논란처럼 고고학계를 짓누르는 `원죄'다. 무녕왕을 뜻하는 `영동대장군 사마왕'이란 무덤지석 발견으로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공을 확인한 획기적 발견도 하룻밤 밤샘작업으로-그것도 고물카메라 한대 달랑들고-발굴을 끝내기로한 판단착오로 빛이 바래고 말았다. 삼불 김원룡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훗날 회고기에서 “꿈꾸었던 명문무덤발굴의 엄청난 행운이 내 머리를 돌게 만들었다”고 탄식했지만 무덤 속 진실은 증발해버린 뒤였다.
그 대가로 지금도 졸속발굴의 후과는 계속되고 있다. 학계는 반성과 타산지석을 되뇌어왔지만 발굴기록자료의 부실로 후속연구는 초창기 수준을 맴돌기만 한다. 2000여 점 넘는 무덤유물의 개별연구는 외양의 특징들만 정리된 단계이며 실측도와 출토상황이 상당수 빠진 발굴보고서는 지금껏 개정되지 않고있다. 무녕왕릉이 6세기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유물들의 제작기법, 양식사 등은 여전히 학문적 미개지로 남아있으니, 교과서 설명이상의 탐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수백여 논문과 치열한 논란을 양산한 경주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에 비해 무녕왕릉은 학문적으로는 이상하리만치 대접받지 못했다. 관련 연구자부터가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 이남석 공주대 교수, 박순발 충남대 교수, 국립박물관의 이한상·신영호 학예사 정도다. 30년간 나온 논문은 오는 7월6~7일 공주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의 발제문 11편을 합쳐도 60여 편. 게다가 이들 가운데 14편은 일본인들이 썼고 박사학위 논문은 한편도 없다. 단행본은 문화재관리국이 73년 낸 발굴보고서 등 4권이 고작이며 학술대회도 발굴 20돌이었던 91년 공주대에서 열린 것이 유일하다.
실제로 후속연구는 경북대 박상진 교수가 90년대 초 왕릉 목관의 재질이 일본특산 금송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 외엔 두드러진 성과를 찾기 어렵다. 무녕왕릉의 금속유물 가운데 대표적 작품인 왕의 불꽃모양 금제관장식은 미스코리아 왕관모델이 될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미술사 비교연구의 부재로 이 양식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안개속이다. 또 벽돌로 쌓은 전축분이란 무덤양식도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전래된 것만 파악했을 뿐 축조방식이나 전래시기 정착과정 등에 대해서는 규명된 것이 별로 없다. 돌방 벽돌에 박힌 철못들의 쓰임새도 수수께끼다. 왕과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은 화려한 금꽃과 거북등 장식으로 찬탄을 자아냈지만 비슷한 도상비교자료가 없어 양식사 분석은 좀더 세월을 기다려야할 판이다.
학계를 더욱 부끄럽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쪽 학자들의 연구가 90년대까지의 무녕왕릉 논의를 주도했다는 데 있다. 이토 아키오, 요시이 히데오 등의 일인학자들은 중국 등지의 방대한 외국자료를 섭렵해 자기네 역사와 연관이 있는 목관과 금동신발, 구리거울 따위의 유물교류사 연구를 수준급으로 끌어올렸다. 이들은 꼼꼼한 비교연구로 일본산 소나무로 만들어진 목관이나 청동거울, 고리형 큰 칼(환두대도) 따위 금속유물들에 얽힌 백제-고대 일본의 문화교류양상을 규명해 무녕왕이 일본서 태어나 왕 등극 전까지 살았다는 <일본서기>기록에 힘을 실어주었다. 심지어 백제적 독창성이 엿보이는 둥 칼(환두대도)나 금속장신구 등의 유물은 중국남조 하사품이란 도발적 추론까지 제기하고 있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명쾌한 반박근거를 대지못하고 있다. 무덤주인공의 생몰년이 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대개 다른 고대유물의 절대연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만 유물에 접근해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물분석에 대한 논쟁적 텍스트들이 없다는 게 후학들의 하소연이다.
소장연구자들은 기본적인 연구방법론부터 바뀌어야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외형분석보다 방사선, 현미경 촬영 등의 과학적 분석기법을 동원해 연구의 텃밭을 다양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이한상 경주박물관 학예사의 말처럼 보존과학과 공예사적 측면의 학제간 연구는 유력한 돌파구로 지목되고 있다. 현장수습이 제대로 안되어 출토상황 분석에 제약이 있는만큼 유물탐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중국 일본의 폭넓은 비교자료 수집 등으로 답보상태의 연구를 활성화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제 무녕왕릉은 더이상 흥미 위주 다큐멘터리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과 과학적인 추론을 통해 학술탐구의 대상으로 정착되어야할 시점에 와 있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 신문
무령왕릉의 역사적 가치.
1.무령왕릉은 우리나라 고대무덤 중 유일하게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최초의 무덤입니다.
2.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고 있으며 이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점이나 된다.
3.무령왕릉에 불을 밝히던 작은 '백자'등잔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백자 입니다. 즉 최초의 백자제작연대를 수백년이나 끌어올린 대 발견인 셈이죠.
무령왕은 누구인가?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 웅진으로 천도 후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름은 사마(斯摩)·융(隆),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501년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502년(무령왕 2) 가림성(加林城)에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벌하였다.
전(前) 왕인 동성왕은 신진세력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다 비대해진 신진세력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구귀족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또, 22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작년 공주 여행때 무령왕릉 다녀 왔었는데..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줄은 몰랐네요 ...
출저- http://dreamaker7.blog.me/ ,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