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마리의 준마와 4마리의 전쟁의 개들
이것은 징기스칸이 가장 아끼는 8명의 장군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최강의 정복자 뚱보 장군 수보타이
일설에 수보타이는 너무 뚱뚱하여 체구가 작은 몽고말들은 그를 태우고 머나먼 원정길을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이 아이디어를 내서 쇠로만든 수레를 타고 유럽 정벌에 나섰다고 한다.
수보타이를 그린 그림
1221년 수보타이는 징기스칸의 명을 받들어 약 2만명의 몽골기병으로 서벌을 시작한다.
유럽을 공포에 떨게한 몽골군은 징기스칸이 아닌 바로 수보타이가 이끌었었다.
당시 초원을 정복한 징기스칸은 그의 올루스(국가)의 전체 인구가 100만명 남짓으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충분 하지만 넓은 지역을 정복을 할 만한 병력은 터무니 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수보타이가 이끄는 군대는 코카서스 산맥을 통과해 2번에 걸친 큰 전투에서 그루지아군을 섬멸하고 1223년에 크리미아에 이르러 칼카(Kalka) 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이긴다.
몽골에서 러시아까지 7,000km 이상 달려온 수보타이의 몽골군은 4만 명의 러시아 군사, 6명의 공과 70명의 귀족을 죽이며 역사상 가장 광활한 지역에서 작전을 펼친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236년 시작한 두번째 원정에서 수보타이는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하며 징기스칸의 이름을 각인시켰는데 사실 알고보면 공포의 제왕은 징기스칸이 아닌 4마리 전쟁의 개중 하나인 수보타이였던 것이다.
이 두번째 원정에서 수보타이가 이끈 몽골군에의해 헝가리가 무너지면서 몽골에서 서유럽에 이르는 모든 길이 무저항 상태로 열리게 되고 만다.
당시 유럽 최강의 병과 동유럽의 중기병 그림
당시 러시아의 중기병은 유럽 최강의 기병대였고 또한 몽골군과 전쟁을 치룬 폴란드와 헝가리 역시 기병대가 최강의 상태였었기에 몽골과 유럽의 전투는 기병전 위주의 전투였었다.
그러나 애초에 창과 중갑으로 무장한 돌격후 근접 공격형 유럽의 기병과 활로 무장하며 거리를 유지하는 전술과 지구력 위주의 말을 이용한 몽골 기병의 전투는 일방저 학살로 상대가 되지않았다.
수보타이는 먼저 북부 러시아 귀족들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북서로 향하고 모스크바 남동부에 있는 리아잔 지역을 기습하였다.
강력한 몽골군에게 저항도 못하고 무너진 이 도시는 아침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도살장으로 변하여 살아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시는 약탈 후 풀이 잘 자라도록 불을 지르고 떠난다.
무척 잔인해 보이겠지만 몽골군은 정복을 할 만큼의 군사가 없었고 유목민 특성상 도시는 아무 의미가 없었으며 오직 말과 가축을 먹일 풀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했기에 불을 질러 풀이 잘 자라도록 한것이다.
이후 몽골 군은 콜롬나와 수즈달이란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대학살을 자행하고 도시는 불을 지른 후에 모스크바로 이동하였는데 몽골군의 엽기적인 ㄱ행 소식을 들은 유럽인들은 경악에 경악을 금치못하였다.
사람은 죽이고 도시는 불에태운다.
보통의 농경민들 전쟁은 노동력을 위한 노예를 획득하고 곡식을 재배할 땅을 뺏는게 목적이었지만
유목민인 몽골에게는 포로는 밥만 축내고 땅은 풀만 잘 자라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모스크바까지 불태운 몽골 군은 꽁꽁 얼어붙은 개울과 강을 건너 170km를 이동해 블라디미르로 이동하며 1238년 2월 7일, 이 도시 역시 잿더미로 변한다.
반격을 위한 러시아의 대공 유리2세는 시타 강에 군대를 집결시켜 몽골군을 기다리고있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몽골군의 진격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제대로 준비하기도 전에 러시아군은 박살이 나고 포로를 안잡는 수보타이의 쿨한 성격에 의해 대공의 목이 베어졌다
그해 겨울 러시아에는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었고 원래 러시아인들은 추위로 인해 겨울에는 전투를 하지않는다 그러나 수보타이의 몽골군에겐 추위 그런것 없었다.
이듬해 4월까지 러시아의 북부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하며 겨우 2개월 만에 12개의 요새도시를 무너뜨린 몽골기병은 러시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노프고로드에 며칠 거리까지 접근한다.
그러나 봄 홍수와 진흙탕(러시아의 진흙탕은 동장군만큼이나 유명하다)을 염려한 수보타이는 퇴각을 명령하고, 돈 강 유역의 스텝초원에서 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재차 유럽원정을 준비한다.
1240년 말 수보타이가 이끄느 몽골군의 러시아 원정이 다시 시작되는데 북쪽은 이미 잿더미를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남부지역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공격루트를 남쪽으로 잡았다.
그해 11월이 되자 몽골 군은 그리스정교의 중심인 키에프 외곽에까지 진격하게 되는데 키에프는 성벽으로 둘러쌓인 요새도시였지만 금나라 정벌때 배운 공성무기 앞에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또다시 학살과 방화가 시작되며 도시는 불에 타고 만다.
1240년 12월 수보타이는 헝가리의 쌍둥이 수도인 다뉴브 강의 부다와 페스트를 택하며 몽골에서 중부유럽에 이르는 진로에서 가장 큰 적인 헝가리왕 벨라4세부터 제거하여 무풍지대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는 군대를 4개 대열로 나누어 각자 눈 덮인 카파치안 산맥을 넘게 하는데 북쪽 방향에서의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대비해 30,000명의 병력을 줘서 폴란드, 보헤미아, 실레시아 등을 선제 공격하게 한다.
실레시아의 헨리2세 공작은 리그니츠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보헤미아의 벤케슬라스왕은 약 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헨리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였는데 두 군대가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몽골군의 자랑인 엄청난 진격속도로벤케슬라스왕은의 군대를 격파 시켜버리고 만다.
이후 수보타이가 이끈 몽골군은 당시 유럽에서는 꾀나 명성이 자자했던 헨리가 이끄는 튜톤 기사단과 폴란드 중기병들을 전멸시키고 만다.
이 전투 후 몽골에서 유럽까지 무풍지대의 길이 열리게 되고 전 유럽은 수보타이의 몽골군과 맞서 싸울 엄두도 못내게 되며 오직 신에게 구원을 강구 하게 되는데 이 지옥도같은 유럽을 살린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인들의 신이 아닌 몽골의 칸이었다.
징기스칸의 3남 오고타이 칸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수보타이는 비엔나 공격을 중단하고 몽골로 군을 돌리고 유럽은 구원을 얻게된다.
이후 수보타이도 나이가 있어서 재차 먼 원정길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만약 수보타이가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비엔나. 파리는 불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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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글 출처 '내 블로그 (앞부분 일부는 생략하고 올림)'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름모를 네이버 블로그'
도음 글 '몽고 원조 비사, 이름 모를 네이버 블로그, 오늘의 유머,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