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릉하면 대표적인 이미지로 소개되는 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혀 있는 현릉(顯陵).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우리나라에 총 40기가 있는 조선왕릉은 단어 그대로 조선을 다스렸던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한 때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지엄한 존재였던 왕과 왕비는 살아서는 나라를 다스렸고, 죽어서는 신성한 공간인 왕릉에 묻혀서 현재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여기저기에 자리잡아서 영면(永眠)을 취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저에게 있어서 조선왕릉이란 과거의 사건과 인물들이 단순히 책과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죽어있는 역사'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역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와는 다른 일과 사건들에 대해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과 흥미 때문에 역사를 좋아하면서도, 그러한 역사를 지금에도 만나보고 싶다는 점은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말이죠.
예전에도 종종 동구릉이나 서오릉, 여주 영녕릉 등을 찾아다니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적도 있지만, 지난 5월부터 본격적으로 주말이나 시간이 될 때마다 본격적으로 조선왕릉을 답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찾아다니지 못해서, 앞으로 찾아다녀야 할 곳이 더 많기는 하지만, 그동안 조선왕릉을 답사하면서 느꼈던 흥분과 재미를 다른 분들과도 함께 공유하고 싶어졌습니다.
- 조선의↗ 왕릉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이여↘ 나는↘ 나의→ 훌륭한↘ 백성들을↗ 굽어→ 살피는↘ 영릉(英陵)의↑ 주인↗ 세종이오↘
과거로부터 인간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어했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화려하고 신성하게 매장하고 높임으로써 조상을 통해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오래전 시기부터 인간들의 무덤은 존재해 왔습니다. 특히, 한 국가의 지엄한 존재였던 왕의 무덤은 시대에 따라 그 형식을 달리하여 왔지만 그 어느 곳보다 신성한 위치에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왔습니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신라시대의 왕릉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의 왕릉들만 보아도 일반 백성들과의 무덤들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었습니다.
고려왕조가 성립된 후에 고려 왕들의 무덤은 이전시대와는 다른 고려시대만의 양식을 갖추게 되었는데요,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탓에 전문적인 학술 용어로 고려 시대 이전의 왕릉과 고려시대의 왕릉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얄팍한 지식으로는 봉분의 정면에 장명등(長明燈 : 봉분 앞의 석등같은 것)과 석상(石床 : 봉분 바로 앞의 제사상 같은 모습의 돌)을 세우기 시작하고 좌우에 망주석(望柱石 : 신성한 곳, 즉 왕릉임을 알리는 기둥같은 돌)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능역의 중앙에는 정자각(丁字閣 : 봉분 앞 쪽의 丁자 모양의 건물.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과 홍살문(紅箭門 : 왕릉의 입구임을 알리는 붉은 문. 모양을 보면 붉은 화살 같은 것들이 하늘을 향해 꽂혀 있는 모양입니다) 등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양식의 변경은 아무래도 고려시대 유학(儒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 위의 사진은 신라 38대 왕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의 괘릉(掛陵)이며, 아래 사진은 고려의 창건자 태조의 현릉(顯陵)입니다.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고려왕릉은 평지가 아닌 조금은 높은 언덕에 능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망주석, 석상, 장명등 등 현재 조선왕릉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왕조가 1392년에 개국된 후에 처음으로 조선만의 형식을 갖춘 조선왕릉의 첫번째 주인공이 된 인물은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도 아니었고, 그의 첫번째 부인인 신의왕후도 아니었으니, 바로 1396년에 사망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가 그 주인공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매우 사랑했다는 신덕왕후는 1396년에 승하한 후 현재의 덕수궁 근처인 정동(貞洞)에 묻혔으나, 그녀를 자신의 계모로 인정조차 하지 않은 3대 태종에 의해서 1409년 현재의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貞陵洞)으로 이장됩니다. 덕분에 현재 있는 정릉은 왕릉 조성 초기 그대로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장을 전후해서 석물(왕릉을 꾸미고 있는 돌로 만든 각종 조각물) 들을 대폭 축소시키고, 격식도 많이 파괴시켰을 뿐 아니라, 그녀의 봉분을 둘러쌌던 병풍석은 현재 청계천의 광교(광통교)의 석재로까지 사용했습니다. 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석(태조에게는 8남 막내아들) 때문에 왕자의 난까지 일으켰던 것까지 생각하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 위 사진은 태조 계비 신덕왕후가 묻혀있는 정릉(貞陵)의 전경입니다. 조선초기의 다른 왕릉과 비교해봤을 때 봉분을 둘러싸는 호석(護石)인 병풍석이나 난간석 등도 전혀 없으며, 봉분 바로 앞의 혼유석(제사상 같은 모습의 돌)을 받치는 받침돌(북모양이라고 해서 고석 鼓石이라 불립니다)도 당시 시대의 다른 왕릉은 5개인데 반해 2개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조선 최초의 국모였는데, 왕릉에는 무인석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禮)에 한참 어긋난 것인데요, 이러한 모습은 1408년 태조 이성계가 사망한 직후인 1409년 태종 이방원이 왕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면서 이런 식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신덕왕후를 자신의 계모로 인정하지 않았던 태종은 1410년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해체해서 광통교 복구의 석재로 사용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거꾸로 박아서 말이죠;;;;(아래 사진)
뭐 어쨌든 1396년의 태조 계비 신덕왕후 정릉(貞陵)에 이어서 1407년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제릉(齊陵 : 현재 북한 개성에 있습니다) 등을 거쳐서 1408년 태조의 건원릉(建元陵)이 차례대로 조성되면서 조선왕릉의 표준화된 양식을 갖추게 되는데요, 이러한 조선왕릉의 표본이 된 능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무너뜨려버린 고려 왕조의 31대 왕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인 현정릉(玄正陵)이었습니다. 현정릉은 전해지는 사진으로만 보아도 계단의 모습을 빼고 보면 조선왕릉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민왕릉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그 전의 고려왕릉과는 차별화된 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요소들은 조선 왕릉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① 왕과 왕비의 능이 따로따로 만들어지다가 한 곳에 같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다만 두 개의 무덤이 같이 있어도 능호는 따로 사용했습니다.)
② 문인석과 무인석을 구별하여 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려왕조가 멸망한 후에 조선왕조는 공민왕릉의 양식을 기본으로 해서 아래와 같은 요소가 추가되거나 변형됩니다.
① 봉분을 둘러싼 곡장(曲墻, 담)을 설치하고 정자각에서 왕릉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없앴으며
② 왕과 왕비가 같은 곳에 묻혀도 능호를 따로 쓰지 않았으며(조선 초기 2번의 예외가 있습니다.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③ 봉분 주위의 석물들의 위치를 재조정하여 표준화시키는 등의 변화를 주어서 자신들만의 왕릉의 표본을 만들었습니다. 고려왕조는 열심히 부정했지만, 고려왕릉은 열심히 따랐다고 할까요?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죽어서 조선왕릉을 남겼다~
조선왕조는 예(禮)를 지극히 중시하는 성리학의 나라답게 군주가 사망한 후에라도 최고의 예를 갖추어 왕릉을 조성하고, 제례(祭禮)를 시행하였습니다. 왕의 생전에 혹은 왕의 승하 후에 왕릉의 위치가 결정되었는데요, 기본적으로 길지(吉地) 곧,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춘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으며, 주변 산이나 지형지물 등을 이용하여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격리할 수 있어야 하고, 한양을 중심으로 4킬로미터 밖 40킬로미터 이내의 장소라야 했습니다. 이는 조상의 덕으로써 자손이 복록을 받을 수 있는 길지여야 하고, 또한 주변의 민가들과는 구분되는 성역이어야 하며, 왕의 참배 때 드는 비용과 백성의 수고를 덜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왕릉의 위치가 결정되고 나면 왕릉이 조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왕릉은 크게 세 구역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왕릉의 아랫부분부터 차례대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 사진 참고
① 진입공간 - 신성한 왕릉과 속계(俗界)를 구분하는 공간입니다.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齋室)이 있으며, 금천교(禁川橋)가 있어서 신성한 공간이 시작됨을 알려줍니다.
② 제향공간 - 제향공간은 실제 제례를 진행하는 곳입니다. 홍살문을 지나 참도를 걸어가면 제사를 시행하는 정자각(丁字閣)이 중심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 우측에는 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각(碑閣)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복방과 수라간 등이 좌우로 배치되며, 정자각 좌측 뒤에는 제사 때 읽는 축문(祝文)을 불태우고 묻는 예감이라는 돌덩이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③ 능침공간 - 왕릉의 핵심인 봉분이 위치한 곳입니다. 봉분을 중심으로 왕을 수호하는 석양, 석호가 4쌍씩 총 8기가 봉분 주위를 두르고 있으며,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 : 영혼이 나와서 놀 수 있는 공간으로서 제사 음식을 올리는 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실제로 제사를 혼유석에서 지내지는 않습니다)과 장명등(長明燈 : 석등같은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실제로 불을 피워서 밝히지는 않습니다. 세종 때인가 딱 한차례 불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없습니다)이 위치합니다. 능침공간은 크게 세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로부터 차례대로 상계(上階 윗 계단), 중계(中階 가운데 계단), 하계(下階 아랫 계단)로 불리며 상계에는 봉분과 혼유석, 장명등, 석양, 석호가 위치하고 중계에는 저승의 왕을 모시는 문인석이 1쌍, 석마가 1쌍,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계에는 무인석이 1쌍, 석마가 1쌍이 배치되는게 원칙입니다.
이처럼 예에 맞추어 통일성을 지향한 왕릉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남한에 현존하는 40기의 왕릉을 살펴보면 아래 사진의 상설도와 같은 지극히 표준적인 왕릉은 1기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왕릉을 답사하는 묘미중의 하나인데요, 이런 이유는 기본적으로 왕릉의 형태가 단순히 왕이나 왕비 홀로 묻혀잇는 단릉뿐만 아니라 합장릉, 쌍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등 총 6가지로 구분이 되고, 거기에다가 봉분의 모습 역시 병풍석을 두른것 난간석만 두른 것, 둘 다 없는 것 등으로 모양을 달리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수라간이나 수복방, 재실 등이 멸실되는 등 원형이 훼손되고 변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의 왕릉은 그동안의 조선왕릉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황제릉을 표본으로 만들어져 있기도 합니다.
- 조선왕릉 상설도와 조선의 창건자인 1대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의 모습입니다. 조선왕조의 창건자로서 누구보다 후손들에 의해 칭송받아온 군주가 묻힌 곳이지만, 동구릉에 위치한 탓에 조선왕릉의 상설도에 나타나는 재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조선왕릉의 숫자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요? 2007년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점을 전후해서(현재를 포함해서) 조선왕릉을 소개하는 문구를 보면 '조선왕릉은 총 42기가 있고, 그 중 개성에 있는 제릉(齊陵,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릉)과 후릉(厚陵, 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릉) 2개를 제외한 40기가 남한에 원형이 매우 온전하게 보존된 채로 전해진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왕릉이라 하면 42기가 아니라 50기가 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왕조를 창건한 직후인 7월 28일에 자신의 4대조부모를 왕과 왕비로 추증하고, 10월 28일에는 4대조가 묻혀있는 곳에 능직(능을 관리하는 관리직)을 두었으며, 태종 11년인 1411년에는 4대조모를 목조, 익조, 도조, 환조라 칭하면서 종묘에 존호를 가상(加上)합니다. 현재 종묘에도 이 4대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음을 볼 때, 이들 4명이 추존왕(왕비)이 묻힌 곳도 당연히 왕릉의 위상을 가져야 합니다. 이 8기의 왕릉이 정확히 언제 왕릉의 형식을 갖추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1392년~1393년에 왕릉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는 이 8기의 왕릉이 조선왕조의 최초의 왕릉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성계가 추존왕 4대조(모)의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 목조(穆祖)와 효공왕후(孝恭王后) - 태조의 고조부모, 능호는 덕릉(德陵)과 안릉(安陵)
② 익조(翼祖)와 정숙왕후(貞淑王后) - 태조의 증조부모, 능호는 지릉(智陵)과 숙릉(淑陵)
③ 도조(度祖)와 경순왕후(敬順王后) - 태조의 조부모, 능호는 의릉(義陵)과 순릉(純陵)
④ 환조(桓祖)와 의혜왕후(懿惠王后) - 태조의 부모, 능호는 정릉(定陵)과 화릉(和陵)
이 8기의 왕릉은 이성계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함경남도 함흥 일대에 흩어져 있으며, 북한에 있는 탓에 사진 자료들이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상황이 어떤지는 매우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1932년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에 그 귀한 사진이 일부 실려있습니다.
- 우리들을 잊지말아요~~~~~~~~
사진 1 : 태조의 고조부모인 목조와 효공왕후의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의 모습. 봉분이 2개 있는 쌍릉의 모습입니다.
사진 2: 태조의 조부인 도조의 의릉(義陵), 무덤이 하나인 단릉의 모습입니다.
사진 3 : 의릉의 정자각의 모습입니다.
사진 4 : 태조의 부모인 환조와 의혜왕후의 정릉(定陵)과 화릉(和陵)입니다. 조선왕릉의 기본적인 양식을 투박하나마 지키고 있는데, 한 능역에 무덤이 위아래로 위치하고 있는 동원상하릉의 양식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남한에서는 20대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懿陵), 그리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덕릉과 안릉, 정릉과 화릉은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조선왕릉의 형식을 따르자면 능호를 따로따로 사용하면 안됩니다만, 고려왕조의 영향이 남아있던 것인지 능호를 따로따로 쓰고 있음이 재미있습니다.
생각보다 얘기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조선왕릉의 다양한 형식들과 조선왕릉에 숨겨져 있는 다양한 이야기는 이번에는 얘기하기가 어려울 것 같고, 마지막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조선왕릉은 그동안 워낙 신성시되던 곳이라 조선왕조 시기에는 당연히 일반인들은 출입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차례대로 왕릉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하였고, 현재 남한 내의 40기 왕릉 대부분이 현재 일반인들에게 제한 공개, 또는 전면 공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왕릉 보호차원에서 몇 개의 릉은 비공개로 되어있는데요, 11대 중종원비 단경왕후의 溫陵, 12대 인종의 효릉 孝陵, 16대 인조의 장릉 長陵, 18대 현종의 숭릉 崇陵 등이 비공개로 되어있습니다.) 덕분에, 현재 조선왕릉은 역사를 좋아하는 관람객들에게는 훌륭한 역사 체험가 되고,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도 훌륭한 휴식처와 공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릉의 특성상 조용하고 호젓한 장소를 원하는 분들에게도 좋은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 사진 1 : 7대 세조와 정현왕후가 묻혀있는 광릉(光陵)의 정현왕후릉에서 바라본 전경
- 사진 2 : 서울 도심 한복판에 묻혀 있는 11대 중종의 정릉(靖陵)의 전경(사진 오류로 삭제)
- 사진 3 : 11대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가 묻혀있는 태릉(泰陵)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역시 사진 오류로 삭제)
- 사진 4 : 광릉(光陵)의 왕릉으로 향하는 산길
많은 분들이 왕릉을 찾아가서 살아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몸소 느끼시거나,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운이 좋으면 영화 '건축학 개론'의 수지 같은 아름다운 여인을 왕릉에서 만날 수도 있으실 겁니다~~~
※ 참고로, 건축학 개론에 나오는 공원은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정릉(貞陵)입니다. 정릉을 방문했을 때,
정릉의 문화유산 해설사님께서 '영화 촬영을 한다길래 한가인과 엄태웅이 오는줄 알고 신났었는데, 알고보니 이상한
신인 배우? 둘이 와서 실망스러웠었다' 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ㅡ.ㅡ
여유로운 주말에 왕릉을 한번 다녀오시는건 어떨까요?
출처 : http://pgr21.com/?b=1&n=2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