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오늘 25년 동안 억울함과 고통속에 담아왔던 얘기를 꺼내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25년 전 LG 미국 Washington 지사에서 근무했던 제 남편(본명: 정상대)의 억울한 자살 미수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2. 제 남편은 한양공고를 수석으로 졸업해 한양대학교 공대와 연세대학교 대학원, ROTC 육군 참모총장상을 받았으며 메릴랜드 대학 졸업 후 LG의 워싱턴 지사에서 4년여 간 회사에 충성을 다해 일을 했던 한 건강한 가장이며 남편이었습니다.
3. 당시 41살의 그 날도 제 남편은 남들이 쉬는 일요일에도 쉬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 사무실에 혼자 출근했습니다. 당시 LG상사 주재원이었던 이민우 부장은 휴일에 출근한 제 남편에게 업무를 맡긴 상태였습니다. 제 남편은 업무 도중 이민우 부장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부장은 다짜고짜 LG 관저에 있던 카펫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이 부장은 제 남편에게 누명을 씌워 도둑으로 몰았고 당시 큰 충격을 받은 남편은 단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과의 말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남편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기에 남편은 쉽게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내다 나중에는 헛소리까지 하며, 이성을 잃은 말과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병원에 입원할 지경에 다달았고, 병원 입원 예약을 기다리던 중 뜻하지도 않았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90년 8월 24일 아침 집 차고에서 남편이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저는 그 때의 기억을 꺼내고 기억조차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4. 차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남편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러 어린아이들을 깨워 Fairfax 병원으로 후송되어 여러명의 의료진들의 수술과 노력으로 3개월동안 생명장치를 의지하며 목숨을 연명했습니다. 의사(4명 주치의)들은 99%, 제대로 숨쉬기,말하기,먹는것등이 불가능하며 예전처럼 정상인으로 살아가기 힘들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시는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나무막대라도 살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눈물로 참고 인내하며 지금까지도 제 인생을 포기하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되새기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통 분담 할수 밖에 없었던 우리 아이들, 그리고 한 가정과 가장의 꿈을 송두리채 날려 버리고 나마저도 기나긴 고통의 터널로 빠뜨린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저의 가슴에 사뭇혀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지금까지도 남편의 재활과 간병을 위해 저의 삶을 포기한체 남편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저는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엄마의 곁을 지켜준 자녀들과 이런 억울함을 아는 많은 분들의 기도와 도움으로 25년의 긴 세월을 간신히 하루하루 버텨오고 있습니다.
5. 남편의 사고가 일어난 후 LG 지사의 구 자극 회장님께서 병원으로 이 민우 부장과 이완경 부장을 문병을 보내 주셨고 이 민우 부장이 이 원상 목사님을 뵙고 잘 보살펴 주라는 부닥과 확실히 저에게 약속을 하고 떠나면서(남편을 만나러 오겠다는)하였으며 100% 라이어빌리티 보험으로 처리가 될 것이다 (Fairfax 병원측 Dr.박 동수)라고 LG 뉴저지 본사에서 연락을 받고 안심 하였읍니다 그리고 얼마 후 뉴저지 본사에서 구자극회장, 이완경, 조정규, 이민우부장과 저와 함께 동행해준 이성균 선생님 (남편의 선배) 과 함께 1시간 여의 미팅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구자극회장은 병원비 일체와 생활비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갚지못한 병원비와 생활비등이 47만불의 빚(부채)과 정신과 의사의 병원비로 인하여 버지니아 법원에서 3번이나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후 치료가 중지되어 아이들 과 저의 고통은 교회 와 이웃과 경찰의 도움을 호소하며 집안은 긴장의 공포 었으며 (비 정상적인 말과 행동) 남편 하나도 돌보기 힘들었던 저에게 경제적, 심리적 중압감은 여자 혼자로써 짊어지기 너무 비참하고 미칠것 깉은 나날 이었읍니다. 구 자경 회장님 과 구 자극 회장님을 신뢰 하면서 눈물로 고통을 감당한 25년을 약속만을 믿고 기다리고 기다려 왔지만 지금 저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6. 구자극 회장님의 조카인 이선용 장노님께서 내가 알아 회사에서 주기로 한 3만불을 먼저 받지않고 고집을 부리면 나머지 돈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회사 사무적인 일을 마무리 짓도록 속히 3만불을 먼저 받고 나머지 돈은 구자극 회장을 조용히 찾아가면 줄것이라고 확실히 말씀 하셨습니다. 남편 또한 이 선용 장노님 말씀은 무조건 순종 하여도(믿어도)된다는 허락을 받은후 뉴저지 본사 법률 담당자 ( 당시 조 정규부장 후임) 께 연락을 한후 3만불을 받았습니다. 이후 박 재희 비서께 연락을 드리고 뉴저지 본사 구 자극 회장님을 찿아 갔을때 미딩룸에서 윤인걸 보좌관과 법률 부장과 미딩(30분)을 한후 조용히 구 자극 회장님을 기다리게 한후 구 자극 회장님은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수갑을 채운 비 인간적인 그때일을 고백 하면서 저는 누가 명령한 행위인지 구 자극 회장님의 지시 였는지 아니면 법률담당자 행위 였는지 확실히 궁금 합니다. 구자극 회장님의 사모님께서 20만불을 줄테니 가게라도 하면서 아이들 보살펴라 하셨습니다. 구 자극 회장님 보좌관으로 계셨던 윤 인궐 보좌관 께서도 구 회장님께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라고 하였읍니다. 제 남편이41살의 젊은 나이에 불구가 돼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4년여 동안 근무 하면서 구자경 회장님과 양윤세 사장님을 아무 실수없이 모셨고, 한국의 부모님 의 눈물의 기도를 가슴깊이 의식 하면서 지난 25년을 참고 살아온 처지를 구자경 회장님과 구자극 회장님이 계속 모른척 하는 건 도리가 아님을 호소합니다.
7. 세월이 흘러도 접을 수 없는 한맺힘을 안고 살아가면서, 처음부터 언론에 알리지 말라고 구 자극 회장님 께서 언급 하셨고,구 자극 회장님께서 변호사를 선임 하라고 하셨지만 구회장님 뜻에 의지 하겠다고 했습니다. 여자로서 35세의 부족함이 많은데도 아이들과 살아가기 위하여 이민우 부장을 처음부터 용서 했으며, 25년 세월을 회사 담당자들과 전화와 편지를 수없이 보내며 반복하여 눈물로 호소한 사실을 회장님들께서는 보고받은 바가 있으신지요?
8. 구자극 회장님 사모님께서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아이들 잘 보살펴라 하셨습니다. 부디1990년 8월24일 남편의 사고를 가지고 더이상 LG와 시름 하지않고 얼마 남지않은 남편의 삶을 보살피며 조금 이나마 평안을 얻도록 협조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법률고문 윙게이트가 한국에 가서 소송을 하면 본사에서 도와 준다는 말을 믿고 제 남편이 한국까지 찾아가 소송을 하게된 이후 구 본무 회장님 비서실을 통해서 남편이 소송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0년이 지난 사건을 소송을 하도록 한 LG회사(윙게이트)측의 태도가 몹시 원망 스러웠읍니다 2012년 2월 한양 대학 병원에서 퇴원후 LG본사 의 회장님을 뵙기 위하여 아픈 몸으로 찿아 갔지만 (비서실에 젼화외 Fax로 알렸음) 남편을 로비에서 누군가 나타나 서류를 받고 연락 한다는 말을 하면서 문전박대 하였읍니다. 2번 죽음으로 몰아부친 비인간적 행위 였으며 ,비행기를 태울수 없다는 공항의 전화를 받고 동생의 보살핌과 병원 진료를 재차 받다갸 힘들게 돌아와 이재우 부장이 2주동안 저와함께 대화하는(전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약속을 속이는 LG의 속임수에 충격을 받고. 완치되지 않은 몸에 두번째 자살을 시도하여 LG본사와 이재우부장 측에 사실을 알렸으며 죽었던 남편은 기적적으로 의식을 겨우 깨어서 이젠 충격성 치매가 겹처서 보살핌에 목욕까지 시키는 여러가지 고난의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15년동안 아버지도 뵙지 못하고 돌아 가시게 하였으며, 어머니는 10년동안 뵙지 못하고 15년 전 돌아 가셨으며(눈물로 새벽마다 기도 하시다가), 부디 주 안에서 구 자경 회장님과 구 자극 회장님께서 마무리 지어 주셨으면 고맙겠읍니다 .
1. 저는 오늘 미국 LG Washington 지사에 4년여 동안 남편이 근무 중 억울한 도둑 누명으로 심한 디프레스 때문에 자살 사건으로 말하기 , 숨쉬기 ,먹는것, 정신적, 신체적 불구자가 되어 , 살아 오던 중 또다시 LG의 속임수의 충격을 받고2번째 자살을 시도하여 이젠 충격성 치매 와 목욕까지 시키며 25년동안 남편과 가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한맺힘을 올리고저 합니다.
2. 1990년 8월 24일 당시 41살의 제 남편은 한양공고를 수석으로 한양 대햑 공대와 연세 대학원 과 메릴랜드 대학교를 졸업한후 당시 LG Washington지사 첫 사원으로 , 양 윤세 사장님 과 조 기송 부장님 과 4년여 동안 근무 하였으며. 조 기송부장 후임으로 이 민우 부장 과 함께 회사일을 하던 중 일요일 아침 교회도 가지 못하고 이 민우 부장은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남편 혼자 종일 핫도그 하나 먹었다며 5시경 집에 돌아 와서 곧 식사를 먹기전 이 민우 부장 으로부텨 걸려온 전화를 남편이 받은후 나를 이 부장이 도둑으로 몰아 부친다는 말을 하면서 밥도 먹지않고 주저않는 모습을 보고 저는 이 민우 부장집에 전화를 했을떼 부인이 전화를 받아 저에게 구 전무님께 혼난다는 말을 저도 듣게 되었으며. 관저에 있는 오리엔탈 카펬을 남편이 가져갔다 는 어이없는 충격과 습습함으로 뜬눈으로 벽에 기대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남편 을 보면서 저도 월요일 아침 직장을 쉬며 남편과 함께 대화를 하며 습습함을 함께 잊어 버리려 친구 가계에 들려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오 석봉 한인 연합 회장자님께 남편의 억울함을 말씀 드렸으며 아침 일찍 우리집을 방문 하셔서 남편을 위로해 주셨지만 남편은 열심히 일했는데 도둑으로 누명을 씌운 본인의 처지를 허탈해 하면서 아무런 의욕을 보이지 않고 운전 중 갑자기 중앙선을 무의식 적으로 넘어 가기도 하여 차를 세워 저가 운전을 할수밖에 없었으며 당시 저는 남편이 심각한 디프레스 였음을 경험이 없었기에 짐작조차 못했으며 자살 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있을수 없는 사고 이었으며 남편에게는 LG(이 민우부장)의 이해할수 없었던 경솔함(비인격적)때문에 남편의 존엄성(우리 가정)을 무너지게 하였읍니다 4년동안 근무 하면서 구 자경 회장님 께서도 남편에게 틀림없는 사람이라고 말씀 하셨다는 말을 들은 기억을 이 기회에 전하고 싶으며 양 윤세 사장님께서도 과분함까지 남편에게 말씀 하신것 또한 고백 합니다 살아 오면서 아이들과 저와 부모 형제들 친구들에게도 실수없이 씩씩하게 살아왔던 남편 이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