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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갑옷 - 아미타빌(입시지옥 後 이야기)
게시물ID : panic_43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서커스
추천 : 4
조회수 : 290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9/08/30 01:17:26
리플에보면 너무 이야기가 진행이 빠르고 판타지가 되간다는데 전 아직 안읽어봐서 모르겠네요, 글원작자 님말로는 절대갑옷 은 챕터로 나누어져있고 이 다음이 '전설의시작'이라고 합니다.(아직 연재는 안된듯 하네요) 
* 글 원작자는 웃대의 'k12kb'님입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 여객기 티켓이라는 놈의 가격은 지나치다고 생각해, 그렇지?

사실 내 친척동생이 스튜어디스를 하는데, 아니 뭐 자랑은 아니고.. 

그래서 이쪽의 구린내나는 일을 좀 알고 있어"

"....."

"비행기 연료가 뭔줄 아나? 왕복일 경우에는 AV가스를 쓰거든. 아 참 AV가스는 최고급휘발유라고

말할 수 있구, 헌데 이놈의 가격이 장난이 아니거든. 원유를 정제해서 얻는 얘들 중에서 가장 가격이 비싸.

미국이나 영국이 이 가스를 쓰는데, 혹시 우리와 티켓 가격을 비교해 본 적 있나?"

"......"

"그래, 그거거든. 터무니 없이 싸단 말야, 택시값이나 배삯과 비교해도 결코 많지 않아

헌데 우리나라 한번 보라구, 서민들은 웬만한 결심 아니면 외국 나가기도 힘들거든...

그러면 우리나라 비행기 연료가 AV가스냐... 그것도 아니야, 그보다 질이 훨 떨어지는 JP유를 쓴단 말야

연료는 질이 낮고 운임료는 턱없이 비싸고.. 물론 연료는 아무거나 쓴다고 치자, 그런거야 주인 마음이니.

사실 비행기 연료는 굳이 휘발유쪽을 쓸 필요는 없거든, 경유쪽을 써도 끄떡이 없어. 왜 그런지 아나?"

"....."

인천발 뉴욕행 항공기인 KE81 기내에서 여승무원 둘의 표정이 마침내 사라졌다.

직업 특유의 인내심과 습관처럼 훈련된 미소는 성형중독자의 그것처럼 어색하게 변했으며,

종래에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싸늘한 무표정이 자리를 잡았다.

저 사람은 착석한 후로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이라지만, 가능하다면

바늘로 입을 꿰매놓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아홉번째로 입을 꿰맸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녀는 천성이 착했고, 결코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살의에 잠시 반성을 했다.

그녀의 시선이 수다를 떨어대는 남성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폈다.

머리는 어깨까지 길러 하나로 묶었고, 옷은 저급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별 특징이 없이 평범했는데, 많이 보면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다시 그녀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사실 그녀보다는 직접 듣는 저 사람이 더욱 힘들것이다.

남자의 옆좌석에는 갈색의 야구모자를 눌러 쓴 젊은 사내 한명이 눈을 감고 있었다.

막 군대를 제대했거나, 그즈음의 나이로 보였다. 모자로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희끄무레한 피부에 오똑한 콧날은 꽤나 호남형임을 짐작케 했다.

"저기요.."

멍하니 바라보던 스튜어디스의 얼굴이 황급히 돌아갔다.

사내가 별안간 눈을 뜨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네.네 손님, 무슨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표정을 가다듬고 그녀가 사내에게로 걸어갔다.

"혹시..."

사내는 모자를 벗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젊은 남자의 강렬한 눈빛에 그녀의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아..'

그녀의 예상을 웃돌았다. 사내는 선이 무척 고운 미남이었고, 야수같은 박력을 가지고 있었다.

"....."

그녀가 멍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 보았다. 잠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본능에 이끌렸다.

"혹시..."

사내가 재차 말을 꺼내며, 옆쪽을 훽 째려 보았다. 

"이 곳에 귀마개가 있습니까?"

"네? 귀..귀마개요? "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귀마개가 있었던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그녀의 옆으로 또 다른 승무원이

다가왔다.

"여기 귀마개 있습니다, 손님. 또 불편한 사항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사내가 여자의 손에서 냉큼 귀마개를 낚아채 갔다.

"미스터 권도 한번 생각해 보게나, 글쎄 내 말이 틀린가?

셰브론 사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차별이거든..

왜냐하면..."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화제는 이제 석유회사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김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좀 졸리군요"

귀마개를 잽싸게 꽂은 그가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옆에서 무슨 말이 들려 왔지만, 그것은 아득한 곳에서 울리는 메아리 같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에 그가 전신을 릴렉스 하게 풀었다. 노곤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이

묘한 쾌감으로 변했다.


비행기는 여섯시간을 더 날아간 뒤 뉴욕 JFK공항에 착륙했다.

비행기가 멈추자 두 사내가 자리서 일어났다.

"와우, 드디어 뉴욕이군"

긴머리의 남자가 창밖을 보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으드득"

야구모자의 사내는 굳었던 몸을 활짝 폈다.

전신에서 근육이 힘껏 확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나갑시다, 김선생님"

기내의 사람들이 안내방송에 따라 하나 둘 움직이고 있었다.

입구에서 승무원들이 인사를 했다.

"편안한 여행 되셨습니까? 저희XX항공에서는 여러분들의 쾌적한 여행을 위해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

"고마웠어요"

그가 웃으며 귀마개를 돌려 주었다.

스튜어디스는 아쉬운 듯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사내는 서둘러 내려버렸다.

"후욱"

바닥을 내려서자 사내가 힘껏 공기를 들이 마셨다.

차가운 뉴욕의 공기에 폐가 서늘해졌다. 지금은 밤이었지만, 공항은 온갖 조명들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둘은 일렬로 늘어선 택시로 다가갔다.

"Whats your destination?"

"몬텔리가 lake"

택시기사의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이내 택시는 출발했다.

사내는 꽤나 유창한 영어로 기사와 얘기를 나누는 반면, 긴머리의 남자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학은 필수 코스인데, 안 거치셨어도 괜찮나요?"

"영어는 내가 사탄 다음으로 싫어하는 거야"

"김선생님이 능력에 비해 외국으로 못 나간게 그것 때문이었군요"

"얼마든지 놀려라, 단단히 기억해 둘테니"

"농담입니다, 하핫"

택시는 커다란 키의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반짝 거리는 무언가가 드러났다.

"저 곳이 몬테리가 호수입니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사내는 달빛에 반짝이는 호수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호수가 다가오면서 나무는 사라졌고, 마침내 택시가 멈추었다.

"헌데 손님들도 거기 가려고 오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못 들어 갈텐데요, 철통경비예요 그곳은"

"우린 일반인이 아니거든요"

사내가 달러를 지불하고,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둘이 차에서 내리자. 택시는 곧 되돌아 가버렸다.

잠시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긴머리의 남자가 팔을 잡았다.

"가자"

둘은 서쪽으로 난 오솔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은 적막했고, 가끔 짐승들의 움직임에 잎들만 조금씩 흔들릴 뿐이었다.

오솔길이 끝나고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지붕에는 정교하게 새겨진 악마의 동상이 죽음의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악마의 벌어진 입안은 깊고 어두웠다. 악마의 눈은 불길이 이는 듯 했고, 푸르스름한 피부거죽은

생생한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었다. 

사내가 오른손을 들어 모자를 벗었다.

기분좋은 긴장감에 약간 손이 떨렸다.

저택의 입구에는 여러대의 경찰차량과 함께 경찰관들이 부산하게 움직임이고 있었다.

입구의 철문은 열려 있었지만, 노란색 끈이 출입을 가로막으며 가로로 늘어져 있었다.

김선생이 조용히 짐가방을 열었다.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본 사내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규칙적인 호흡의 끝에는 언제나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비계덩어리를 물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느끼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한 기분에 사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호흡이 끝나자 사내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가닥 총명한 기운이 눈에서 흘러나왔다. 옆에서 김선생이 묵주를 쥐고 부적을 정성스레 펼치고 있었다.

사내의 영안이 뜨였다. 영안을 통해 바라 본 저택의 모습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온갖 귀신과 악령들이 겹겹이 저택을 둘러싸여 울부짖고 있었다. 풍겨져 나오는 끈적한 귀기에 사내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들이 다가가자, 경찰관들이 제지했다.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오"

김선생과 사내가 동시에 신분증을 펼쳤다.

"앗, AR 소속이셨군요.. 들어가 보십시오, 이미 다른팀들은 모두 들어갔습니다"

Anti Ruiners... 은빛의 큼지막한 글자가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유치하게시리, 이름이 이게 뭐냐"

"소설속에 나오는 거래요, 그 분 마음이죠 뭐"

문을 통과한 그들이 어둠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이런 어둠이라니.. 이건 마치 블랙홀 속 같군요"

"블랙홀에 가 보았나?"

"그럴리가 있나요, 듣기에 그곳은 상상할 수 없는 어둠속이라는데 이곳과 비슷하잖아요"

"그것도 그렇군"

김선생이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끈적한 어둠은 그들을 감싸고 돌았으나, 둘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돌계단을 오르자 방대한 넓이의 정원이 나타났는데,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쉬식쉬식.."

별안간 뒤쪽에서 풀잎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내 부적을 본 적이 없지?"

"한 번 보죠"

"화르륵"

김선생의 손에서 두장의 부적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부적중 한장이 무섭게 타올랐고, 그것은 뒤쪽의 한 물체에 정확히 부딪혔다.

"쉬쉬쉬식"

희끄무레하게 생긴 물체는 불길에 휩싸인채 김선생에게로 달려왔다.

"잘가라고"

뒤이어 날아간 또 한장의 부적이 정확히 물체의 중앙에 파고들었다.

"퍼엉"

순식간에 물체가 폭발했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자 사내의 얼굴에 불만이 나타났다.

"두번 볼 것은 못 되겠군요"

"그럼 자네가 하지 그랬나? 나도 한번 구경해 보고 싶어

술법같은게 아니라 타격으로 제압한다지?"

"흐흐.."

"영력이 전신에 퍼지게 만들기는 불가능 할텐데, 어떻게 한건지 가르쳐 줄 수 있나?"

"그거 뿐이라서요"

"응?"

사내의 몸이 정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전 평범한 사람이라서 영안 띄우는 것도 힘들었거든요"

정면에 무서운 표정의 여자 하나가 웃으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치고박는 걸로 하는 거죠"

사내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오오.."

김선생이 진정으로 대단하다는 듯 감탄성을 내뱉었다.

"이렇게요.."

사내의 빛나는 주먹이 여인의 전신에 내려 꽂혔고, 여인은 곧 희미하게 변하더니 결국 사라졌다.

"여기가 문인가?"

김선생이 겉이 뜯겨나간 판자문 앞으로 다가갔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장내가 드러났다.

"헛"

드러난 광경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시뻘건 피가 천장서 흘러 내렸고, 계단은 기괴하게 웃고 있는 악령들로 넘쳐

났다.

알몸의 여자 하나가 자신의 눈알을 뽑아냈다. 눈알에 연결된 길쭉한 신경들이 함께 떨어져 나왔다.

"휘익"

여자는 눈알을 문을 연 두사람에게로 던졌고, 사내가 기겁을 하며 피했다.

"둥실"

여자의 몸이 거꾸로 뒤집히면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자는 다리를 휘저으며 발버둥 쳤지만, 공중에서 무언가에 결박당한 채 정지해 있었다.

여인이 다리를 저을때 마다 허벅지 사이로 민망한 부분이 드러났다.

"찌익"

한순간 빛이 번뜩였고 여인의 몸이 사타구니를 시작으로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후두둑"

순식간에 시뻘건 내장 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렸고, 여인의 끔찍한 단면이 비스듬히 쓰러졌다.

"지각하셨군"

금발의 장신사내 한명이 기형적으로 생긴 검 하나를 든 채 다가왔다.

"이름이 뭐죠?"

김선생이 얼굴에 화색이 돌아 대답했다. 아는 영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마..마이 네임이즈.. 김 동수.."

김선생이 옆에 선 젊은 사내를 다시 가리켰다.

"음..음.. 디스 네임..이..즈 .."

"됐어요"

사내가 슬며시 웃으며 칼을 든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아무말 없이 다시 주위를 돌러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총 일곱명이군요, 당신들은 미국지부 소속이죠?"

"영국이랑 일본도 있습니다. 당신들이 한국서 온 사람들이군요"

"맞습니다"

"와우, 그 분도 오셨나요?"

"아뇨, 저희가 감당하지 못할 때 온다고 하셨어요"

"그렇군요"

금발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 이름은 알렉스 입니다, 피터 알렉슨"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그 순간 바닥에서 머리통이 솟았다. 곧이어 손바닥이 솟아나와 사내의 발목을 쥐었다.

사내의 한쪽발이 희미한 빛을 냄과 동시에 슬며시 위로 들려졌다.

"빠직"

영력이 깃든 발이 사정없이 머리통에 내리찍혔다.

"제 이름은 혁수.. 권혁수 입니다"

사내의 전신에서 폭발할 듯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렉스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새어 나왔다.

"대단하군요, 영력을 몸 전체로 두를 수가 있다니."

알렉스는 신기한 듯 혁수의 몸을 이곳 저곳 만지작 거렸다.

"한국서 오신 분들?"

계단 아래쪽에서 약간 서투른 영어가 들려왔다.

혁수가 시선을 돌리자, 푸근한 인상의 사십대로 보이는 스님 한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분은 중국지부서 오신 첸 스님입니다"

알렉스가 스님에게 손짓했다.

"니 하오 마"

스님이 포권자세를 취하자 혁수도 엉겹결에 따라했다.

"호오, 이 빛은 뭐죠?"

스님이 혁수의 몸을 둘러싼 빛을 신기해 했다.

"영력을 체외로 방출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럴 수도 있나 보군요"

"에헴"

옆에서 잔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스님이 어색하게 서 있는 김선생을 발견했다.

"이게 누구신가, 김선사도 오셨구려.."

"니 하오 마"

이미 안면이 있던 두 사람이 반갑게 얼싸 안았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진 첸 스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 영어는 좀 늘었는가?"

"에헴"

김선생은 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멀뚱히 서 있던 혁수에게 넌지시 신호를 보냈다.

"아, 김선생은 영어를 포기하셨습니다"

"뭐? 으하하"

첸과 알렉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다소 민망해진 김선생이 연거푸 헛기침을 내뱉았다.

"그런데 다들 언제 오셨습니까?"

혁수가 장내를 돌아보며 스치듯 물었다.

"나랑 첸 스님은 한시간도 안됐어요, 와보니 저 분들이 있더라구요"

알렉스의 대답에 혁수가 나머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넓다란 돌기둥 쪽에서 검은색 도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허공에 손을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깔끔한 단발머리의 그녀는 동양인이었는데, 주위에 악귀들이 감히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계단 중앙에는 깨끗한 신부옷을 입은 남자 두명이 이러지러 쫓아 다니고 있었는데, 뭔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이마 중앙에 초록색 쇠못을 박은 덩치좋은 괴물 하나가 신부하나를 열심히 쫓고 있었다.

젊은 신부는 괴물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루시안님"

괴물의 뒤를 나머지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년신부 하나가 따라가고 있었는데,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으윽"

루시안으로 불린 청년이 두리번 거리다가 일행을 발견했다.

"도와주시오"

혁수가 나서려는 찰나에 부적 한장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헉.헉"

부적은 괴물의 가슴부위에 부딪혔고, 괴물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따라오던 중년 신부의 손에서 은색 십자가가 빠르게 빠져나왔다.

"치칭"

괴물의 등에 박힌 십자가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두둑"

괴물의 배와 옆구리, 그리고 가슴쪽에서 길쭉한 꼬챙이들이 튀어 나왔다.

괴물은 순식간에 쓰러졌고, 중년의 신부가 거칠게 십자가를 빼내었다.

"루시안님, 괜찮으십니까"

신부는 곧 앞쪽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젊은 신부에게 다가갔다.

"저는 괜찮아요, 하엘 주교님"

안쓰럽게 청년을 바라보던 신부가 일행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신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반백의 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겨져 있었고

약간 내려간 눈꼬리가 성격이 무척 좋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거 못난 모습을 보여서, 부끄럽습니다"

"아니예요, 주교님.. 다 저 때문인걸요"

루시안으로 불린 젊은 신부가 손사를 치며 부정했다.

"AR 분들 이시죠? 반갑습니다, 저희는 로마에서 왔습니다"

"로마? 그럼 AR소속이 아니시군요"

알렉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저희는 교황청 소속입니다"

"그렇군요, 피터 알렉스입니다"

"이쪽은 첸 스님, 그리고 이 두분은 한국서 오신 김선생과 미스터권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알렉스가 일행을 소개하자, 이번엔 하엘주교가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는 교황청에서 엑소시즘 관련 대외부서에 있는 하엘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루시안.. 페드릭 루시안 신부님입니다"

하엘이 젊은청년을 소개했다.

"쿠쿵"

별안간 2층에서 문짝이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문짝이 바닥과 부딪히면서 고여있던 피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뭐야"

"윽"

일행이 재빨리 피했지만, 몇몇의 옷에 핏방울이 묻는 것을 피할 순 없었다.

"그대가 페드릭 이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2층의 떨어진 문 안쪽에서 세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묵중한 발소리와 함께 은색 갑옷을 투구까지 착용한 기사 두명이 나왔고, 그 뒤를 가벼운 체인래더를

가슴에 부착한 인물 하나가 걸어나왔다.

마지막에 나온 인물의 입에서 다시 말이 흘러 나왔다.

"페드릭 루시안이면, 교황청 최후의 보루로 알고 있는데 잘못 알려진 것인가?"

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일행을 향했다.

아무 특징없는 얼굴 위로 짙은 웨이브의 갈색머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셋은 계단으로 향했는데, 그들이 등장하자 악귀들이 서서히 몰려 들었다.

"치이익"

두 기사가 단단한 재질의 흑색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중세시대에 쓰였던 바스타드류의 커다란 검이었다.

"교황청 최후의 보루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페드릭 루시안 인것은 맞습니다"

루시안의 대답에 남자의 얼굴에 옅은 조소가 피어 올랐다.

"이깟 애송이가 무엇이 두려운가, 소문이 와전 됐구나"

남자의 얼굴에서 잔인한 살기가 일었다.

사뭇 달라진 기세에 앞에 있던 두명의 기사가 계단을 빠르게 내질러 갔다.

"찌익"

"으르르.."

둘의 검이 수직으로 들려진다 싶더니, 사정없이 악귀들을 쓸어갔다.

악귀들의 수는 대단히 많았는데, 원망에 찬 눈빛으로 기사를 애워쌌다.

"비켜라"

남자가 짜증이 섞인 음성과 동시에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아아아"

남자의 짜증에 두 기사가 미친듯이 검을 휘두르며 앞을 뚫어 나갔다.

거대한 검들은 무차별적으로 악귀들의 몸을 도륙내었고, 자리가 비워지면 기사들이 돌진해 나갔다.

"퍼억"

악귀들은 온 몸으로 기사들에게 부딪혔지만, 갑옷을 뚫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페드릭, 한번 보자꾸나.. 알량한 그 능력을"

두 기사가 뚫어놓은 길 사이로 남자가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헉"

혁수의 전신이 반사적으로 움찔 거렸다.

'이 사람, 강하다'

혁수가 살며시 손으로 힘을 모았다.

알렉스가 기다란 장검을 긴장한 듯 굳게 쥐었고, 그 뒤에서 김선생이 부적뭉치를 꺼내고 있었다.

"뒤로 피하시지요"

하엘주교가 십자가를 꼿꼿히 세운 채 일행의 선두로 나갔다.

"흠"

루시안의 얼굴에서 한가닥 살기가 피어 올랐으나,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루시안은 묵묵히 뒤로 물러섰다.

곧 어마어마한 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남자가 검집에서 검 하나를 뽑았는데, 등대불처럼 한줄기 빛이 주욱 뿜어져 나왔다.

검끝에서 밀려나온 빛은 지름 일센치도 되지 않는 크기 였지만, 순식간에 그 주변 공기가 타 들어갔다.

"미친"

알렉스가 황급히 검으로 몸을 막았고, 하엘 주교가 십자가를 내민 채 바닥으로 엎드렸다.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서 있던 혁수를, 김선생이 황급히 밀쳐서 넘어뜨렸다.

"슈욱"

빛은 일행 중앙을 통과해 뒤쪽으로 주욱 밀려나갔다.

"이제 알겠군, 당신은.."

하엘 주교가 헝크러진 머리를 바로 잡으며 일어섰다.

"당신은.."

루시안이 하엘주교의 말을 중간에 받았다.

"템플나이츠.."

남자의 눈이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챙"

거칠게 검을 도로 꽂아 넣은 남자가 이제 막 정리를 끝낸 계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기사의 발 아래로 수많은 악귀들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고, 기사들은 지친 듯 주저앉아 있었다.

"애송이들, 경고하는데 이곳 아미티빌에서 내 눈에 거슬리지 말도록 해라"

남자가 한심스런 눈으로 기사를 내려다 보았다.

"쯧쯧"

잠시 혀를 차던 남자가 계단을 올라갔다.

"레오나르.. 그 년은 내 것이니 건들지 말도록... 물론 그럴 능력도 없겠지만"

남자는 문이 날라가 뻥뚫린 2층의 한 방으로 사라졌다.

"젠장, 뭔 놈이 저렇게 쎄지"

알렉스가 투덜거리며 혁수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알렉스가 나자빠진 혁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혁수는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있었는데, 반응이 없자 알렉스가 무안한 듯 손을 집어 넣었다.

"누구죠?"

힘없이 고개를 돌린 혁수가 물었다.

"템플나이츠.. 다른 말로 템플기사단이라고 합니다"

하엘주교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계단쪽에서 쉬던 두 기사가 남자가 사라진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곱명의 팀플기사단 중 하나입니다, 저 기사둘은 아마 호위병인 것 같군요"

"저렇게 강한 사람이 존재 할 수 있나요?"

"글쎄요"

하엘주교가 김선생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놀란 것 같군요, 하지만 저 정도 실력자는 드물지만 분명 존재합니다"

하엘주교가 김선생에게 어색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키, 키원?"

"혁수군, 내가 보기에도 저자는 강하지만 구부장님의 윗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걸"

혁수의 시선이 김선생을 향했다.

"왜 저를 이곳으로 보낸거죠? 전 도움이 안될 것 같아요, 자신감 완전 상실입니다.."

"Snap out of it (기운 내세요)"

루시안이 밝게 웃으며 혁수에게 다가왔다.

"이긍, 제가 어리광을 부렸네요"

혁수는 마음을 추스리고 일어섰다. 억지로 웃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이제 아미티빌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죠"

알렉스가 짐짓 유쾌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2층은 템플인지 뭔지 있으니까, 우리는 지하쪽을 살펴보는게 어떨까요?"

첸 스님이 왼편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윗쪽에 구슬세개가 새겨진 문이 하나 있었다.

"저희는 여러분들과 소속이 다르니 따로 행동할까 합니다"

하엘주교의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갑시다, 어차피 주교님도 마녀 때문에 오신 것 같으니"

"그럽시다"

"그래요"

혁수와 첸 스님이 동시에 찬성을 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다"

하엘주교와 루시안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

알렉스가 먼저 문으로 다가가자, 나머지가 뒤를 따라갔다.

알렉스가 문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루시안이 외쳤다.

"헌데, 저 여자분은 어쩌죠?"

모두의 시선이 멀찍히 떨어진 기둥쪽을 향했다.

단발머리의 여인 한명이 불편한 자세를 취한 채 한발로 서 있었다.

"무슨 요가동작 같은데.."

혁수가 천천히 여인에게로 걸어갔다.

여인은 검은색 도복이 타이트하게 매어져 있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여인의 용모가 드러났다.

잡티없는 하얀 피부에 유난히 새까만 머리카락이 꽤나 미인이었다.

"저기요"

혁수의 손이 여인의 어깨로 다가갔다.

"스윽"

여인의 눈이 갑자기 떠지고, 혁수의 몸이 반탄력으로 뒤로 날라갔다.

"털썩"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쳐박힌 혁수가 볼썽사납게 드러누웠다.

"何の仕業だ(난노 시와자다)?"

- 무슨 짓이야? -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혁수의 모습에 김선생이 껄껄대며 웃었다.

"개구리가 패대기질 당한 모습이구나, 큭"

"젠장"

안면으로 피가 쏠린 혁수가 허둥지둥 일어섰다.

기둥쪽에는 첸 스님이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여인은 혁수와는 달리 첸 스님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둘은 낮은 소리로 얼마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혁수에게로 걸어왔다.

"스미마셍, 초면에 미안하게 됐습니다"

여인의 입에서 일본어와 영어가 섞여서 튀어 나왔다.

"일본인이군요, 어쩐지 무례하다 싶었습니다"

혁수의 빈정거림에 첸 스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비꼬아 말하지 마세요, 사과도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니까"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사과 받느니 차라리 원숭이가 낫겠습니다"

여인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이거 왜들 이러시나, 앞으로 동료될 사람들끼리.. 이제 그만하게나"

첸 스님의 말에 혁수가 일행쪽으로 대꾸없이 걸어가 버렸다.

"키유양이 이해를 하게나"

첸 스님이 여인을 데리고 일행쪽으로 다가왔다.

"인사들 하시죠, 이쪽은 AR 일본지부서 오신 이시이 키유양입니다"

키유의 머리가 살짝 숙여졌다.

"반갑습니다, 피터 알렉스입니다."

"반갑소, 하엘이라고 불러 주시오. 그리고 이쪽은 루시안님 입니다"

키유의 머리가 연거푸 숙여졌다.

"마이 네임..즈 김동수..에..마이 인트로..듀스..."

김선생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반갑습니다"

키유가 김선생의 긴머리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알렉스가 짐짓 유쾌한 어조로 혁수를 가리켰다.

"이쪽은 미스터 권입니다. 이름은 어려우니 그냥 이렇게 부르면 됩니다"

키유의 새까만 눈이 혁수를 골똘히 응시했다.

"뭘봐, 재수없게시리"

혁수의 말에 김선생이 순간 크게 당황했다. 모두의 눈에 의문의 표정이 생겨나자 그제야 김선생이 안심했다.

"깜짝 놀랐잖아, 이놈아"

"한국말 하는데 뭘 그리 놀라요?"

혁수는 키유를 한번 더 노려보곤 지하실 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철컥"

지하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열린 문 사이로 차가운 한기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지하에 냉동실이라도 있나?"

혁수의 뒤를 김선생이 양팔을 문지르며 따랐다. 

"추운건 딱 질색인데.."

투덜거리는 알렉스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눅눅한 공기와 함께 오래된 나무냄새가 확 끼쳐왔다.

천장 모서리쪽에는 굵은 거미줄이 겹겹히 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여러겹의 판자 따위를 덧대어

군데군데 떨어진 부위를 메꾸고 있었다.

"탁"

김선생이 가방에서 비상용 램프를 꺼내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한결 나아진 일행들의 눈에 길게 펼쳐진 복도가 보였다. 빛이 닿지 않는 멀찍히 떨어진 어둠속에서

묘한 공포심이 느껴졌다. 무저갱속의 어둠이 저러할까.. 잠시 일행이 어둠을 바라보는 사이

알렉스가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앗"

알렉스의 외침에 김선생이 램프를 벽으로 비췄다.

"헛"

"아악"

헛바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모두의 눈에 여지껏 없던 떨림이 서서히 생겨났다.

벽에는 섬뜩한 빨간색의 무언가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벽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림의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그림의 시작은 우울한 표정의 모녀가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묘한 슬픔과 공포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다음 장면이 끔찍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손에 바늘과 실을 들고 아이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엄마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늘에 실을 끼우고는 아이의 입으로 그것을 가져갔다.

아이의 놀란 눈이 크게 떠지고, 바늘이 아이의 입을 꿰메기 시작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로 수없이 바늘이 통과하자, 아이의 입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아이는 두려운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아이가 앉은 바닥으로 소변이 그려져 있었다.

엄마가 바느질을 끝내자, 마침내 아이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서러움이 복받히는 듯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

졌으나, 입만 움직이지 못하자 꽤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다음 장면부터는 엄마가 아이의 눈가죽을 꿰매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에 루시안이 소리를 질렀다.

"그만보세요, 이런걸 보면 우리한테 도움이 안된다구요"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던 혁수가 정신을 차렸다.

"정말 끔찍하군요, 루시안님 말이 맞아요. 다들 그만 봅시다"

모두의 시선이 그림에서 떨어졌다. 그들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혁수가 스치듯 키유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녀의 눈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갑시다,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알렉스가 빙긋 웃으며 김선생으로 부터 램프를 건네 받았다.

일행이 천천히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직선인 줄 알았던 복도는 얼마를 더 들어가자 오른쪽으로 꺽여 있었다.

모두들 의식적으로 벽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호기심들이 피어오르는 상태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혁수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악"

혁수가 순식간에 뒤로 서너걸음 물러섰다. 모두가 멈춰서고 램프가 이리저리 비춰졌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램프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알렉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때까지도 혁수는 얼굴이 굳어 있는 상태였는데, 한쪽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안 보이나요?"

혁수의 손짓에 다들 한 곳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보이다니? 뭐가 보인단 말이지?"

"아무것도 없는데.."

김선생과 알렉스가 허공으로 애꿎은 손을 휘둘렀다.

"소녀 말이예요, 그림에서 본 소녀.."

혁수가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뭐?"

일행이 다시 한번 유심히 관찰했지만, 빈 벽뿐이었다.

"똑같아요, 입을 꿴 모양까지도요..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어요"

혁수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꼬마야,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지?"

혁수가 무릎을 굽혀 키를 낮추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은 무얼 뜻하는 거지?"

혁수가 허공과 대화를 하자 일행이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흠"

팔짱을 끼고 있던 첸 스님이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휘익휘익"

요상한 손동작을 선보인 첸 스님이 일행에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무언가 있군요, 저곳에 불안정한 무언가가 있어요"

첸 스님의 말에 하엘주교와 알렉스가 의문스럽게 반문했다.

"제 감각에는 느껴지지 않는 걸요"

"저도요, 제 심미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첸 스님의 입이 다시 열렸다.

"글쎄요, 저도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쭈그려 앉아 있던 혁수가 슬며시 일어났다.

"그냥 갑시다"

알렉스가 다시금 램프를 정면으로 비추었다. 잠시 이동한 뒤 김선생이 혁수에게 물었다.

"이젠 안 보이지?"

혁수가 김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고 있어요"

"헉"

머리가 쭈뼛해진 김선생이 알렉스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램프 떨어집니다, 조심하세요"

알렉스가 충격으로 흔들리는 램프를 잽싸게 고정시켰다.

루시안이 안쓰런 표정으로 혁수를 바라보자, 혁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보기 싫습니다, 신경 안 쓰이도록 이제 물어보지 마십시오"

일행은 한참을 더 걸었다. 길은 여러차례 꺽어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방향감각이 사라진 듯 했다.

저만치서 두개의 구멍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알렉스가 멈춰선 것은 그 무렵이었다.

"탁"

무심코 걷던 김선생이 알렉스의 등에 코를 박고 정지했다. 모두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갈림길이군요"

구멍은 성인 남자가 불편한 자세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는데, 정확히 양갈래로 두개가 뚫려 있었다.

"어쩌지?"

"잠시 흩어지는 것이..."

첸 스님의 말을 알렉스가 잘랐다.

"보여요.."

"응?"

알렉스가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일행을 돌아보았다.

여태까지의 그가 아닌,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은 알렉스의 표정이 보였다.

"할머니가 보여요"

알렉스의 손가락이 쉴새없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찬찬히 설명해 보게나"

첸 스님의 두손이 알렉스의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왼..왼쪽 구멍 입구에서 17년전 죽은 할머니가 서 있어요"

"그게 무서워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엘 주교가 정면에 드러난 구멍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정이 좀 길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악몽이 할머니가 나오는.. 꿈입니다"

알렉스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그만 물어 봅시다"

첸 스님이 일행을 둘러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되면 흩어지지 말고 이대로 같이 다녀야 겠군요"

"그럽시다, 뭔가 조짐이 불길해요"

하엘주교가 긍정을 표시했다.

"그럼 뭘 망설이세요? 어서 가자구요"

키유가 성큼성큼 오른쪽 구멍으로 다가갔다. 반쯤 몸을 집어넣은 그녀가 일행에게 소리쳤다.

"안 갈 거예요?"

그녀의 재촉에 김선생이 일행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에 할머님이 계시니 오른쪽으로 가면 괜찮을 거요, 알렉스씨"

하엘주교와 첸 스님이 알렉스의 양쪽에서 그를 부축했다.

김선생이 램프를 건네 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램프로 왼쪽 구멍을 비췄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눈을 질끈 감고 구멍으로 걸어 갔는데, 휘청거리는 다리가 언제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혁수는 키유의 재촉이 뭔가 마음에 걸렸다. 마음 한 구석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일행이 모두 통과하고 혁수가 마지막으로 구멍을 통과할 차례였다.

왼쪽을 슬쩍 보니 역시 어둠뿐이었다. 고개를 슬쩍 뒤로 돌리자, 입이 꿰인 소녀가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왠지 모를 한기에 잽싸게 혁수가 구멍으로 몸을 집어 넣었다.

구멍을 빠져 나가자 일행이 혁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태껏 걸어왔던 비슷한 모양의 복도가 그들을 맞이했다.

"갑시다"

혁수가 나온 것을 본 김선생이 출발하려 하자, 혁수가 제지했다.

"잠깐만요"

"왜?"

혁수가 빠져나온 구멍을 직시하고 있었다.

"흐음"

잠시 후 구멍에서 소녀가 빠져나왔다.

"허억"

알렉스의 놀란 눈이 부릅뜨였다.

"할머니도 나오셨나 보군요"

혁수가 알렉스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이제 출발하죠"

일행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뒤는 돌아보지 마세요"

"그..그래요"

혁수의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첸 스님이 유심히 살폈다.

"제 생각에는.."

김선생과 하엘주교가 첸 스님을 바라 보았다.

"이 곳에 마녀의 흑마술이 펼쳐져 있는 듯 합니다"

"그래요?"

"네, 그리고 아마도 그건 각자가 지닌 가장 두려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아.."

하엘주교가 나직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제 앞에는 곧 그것이 나타 나겠군요"

루시안의 시선이 하엘주교로 향했다.

"그것이라뇨?"

"....."

하엘주교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은 하엘이 일행에게 빠른속도로 입을 열었다.

"뜁시다, 괜히 말을 꺼냈나보군요...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일행이 말없이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셋이 따라오고 있는 거군요"

루시안이 달리는 와중에 뒤를 힐끔 거렸다.

"그만 뜁시다"

선두에서 뛰던 하엘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계속 뛰다간 레오나르를 만나기도 전에 체력이 바닥나겠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첸 스님이 손수건을 꺼내 땀방울이 맺힌 콧잔등을 닦았다.

"어라"

루시안이 저만치 앞으로 나섰다.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제 눈에 나타났군요"

루시안이 신기한 듯 다가갔다.

"근데 이상한대요, 전 처음 보는 것인데.."

일행의 표정이 일제히 변함과 동시에, 하엘이 소리를 질렀다.

"이런, 피하세요 루시안님. 그놈은 진짜예요"

"네?"

루시안이 대경실색하여 바닥을 굴렀다.

눈 앞에는 반인반수의 괴물이 거대한 손톱으로 루시안을 찍어내리고 있었다.

하엘이 순식간에 십자가를 뻗으며 달려갔고, 알렉스의 장검이 거칠게 뽑혔다.

"콰앙"

손톱이 바닥과 충돌하자 판자가 거칠게 뜯겨져 나갔다.

"이런"

루시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행의 뒤로 숨었다.

괴물의 상체는 인간이었지만, 하체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두개의 뱀이 몸을 지탱하며 서 있었다.

"하앗"

알렉스의 장검이 공기를 가르며 괴물의 목부분으로 날아 들었다.

"스윽"

괴물은 간단히 고개를 젖힘으로써 장검을 피해낸 뒤 손톱을 휘둘렀다.

"채앵"

손톱과 검이 충돌하면서 요란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 틈을 타서 하엘의 십자가가 괴물의 옆구리로 쇄도했다.

"퍼억"

"컥"

십자가가 닿기도 전에 하나의 뱀 다리가 하엘의 몸퉁이를 모질게 후려쳤다.

하엘은 벽으로 날아가 부딪힌 뒤 움직이지 않았다.

"하엘"

루시안이 재빨리 하엘에게로 다가갔고, 김선생이 여러장의 부적을 치켜 들었다.

"챙 챙"

알렉스가 여기저기를 찔러 갔지만, 쉽지 않은 듯 보였다.

"터억"

그 순간 김선생의 부적 세장이 괴물의 몸에 철썩 붙었다.

"피이익"

기대로 가득 찬 김선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부적이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이다.

"흐아앗"

혁수의 양 발이 빛나기 시작했다. 두 발로 영력을 집중한 혁수가 매섭게 괴물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여러번의 타격이 괴물에게 퍼부어졌고, 괴물이 조금씩 물러섰다.

"푸욱"

괴물이 밀리는 틈을 타서 알렉스의 장검이 깊숙히 찔러졌다.

"크아악"

장검은 괴물의 뱀다리 쪽에 반쯤이나 들어가서 박혔는데,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퍽"

"크어헉"

괴물의 포개진 양손이 알렉스의 등으로 내려 꽂혔다.

피분수를 뿜으며 알렉스가 바닥에 쳐 박혔다.

"젠장"

혁수가 힘차게 도약 한 뒤 괴물의 머리부분을 노렸다.

"처억"

발이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혁수의 몸이 공중에 들려 졌다.

괴물의 손이 혁수의 몸통을 세게 쥐었다.

"육정 육갑 육병 육을 소솔제장 일별병영사귀...."

첸 스님의 입에서 운장주의 주문이 흘러 나왔다.

"크륵"

충격을 받은 괴물이 흔들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자유로워진 혁수가 다시금 돌진했다.

"하앗"

무릎이 한순간 빛난다 싶더니 괴물의 배로 작열했다.

괴물의 고개가 숙여지자 혁수가 크게 뛰어 오르며 괴물의 얼굴을 걷어 찼다.

"치이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줄기 빛이 날아 들었다.

"터억, 데구르르.."

괴물의 목이 비스듬히 절단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괴물이 힘없이 무너졌고, 알렉스가 피묻은 장검을 쥔 채 가쁘게 호흡하고 있었다.

"다들 수고 했..."

첸 스님이 말을 내뱉는 중간에 무엇인가가 접근했다.

혁수의 표정이 굳어갔고, 알렉스가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하엘주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떼를 지어 다가 오고 있었다.

"크크.. 장난이 아닌데.."

혁수의 눈에서 끈적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괴물들의 수는 어림잡아 열마리는 되어 보였다. 일행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많아"

"젠장"

김선생을 중심으로 일행이 똘똘 뭉친 형국이 되었다.

"이변이 없는 한 우리는 죽겠군요"

알렉스의 안타까운 음성이 낮게 들려왔다.

"포기하기엔 일러요"

하엘주교가 분주히 십자가에 무언가를 뿌리고 있었다.

"잘하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첸 스님이 괴물과의 거리를 쟀다. 입안에서 무슨 말을 중얼거렸으나, 너무 작아 들을 수는 없었다.

"내가 막아서면 도망갈 수는 있을 것 같군"

첸 스님의 말에 혁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됩니다, 혼자 희생하시게 둘 수는 없어요"

"맞습니다.. 차라리 다같이 싸웁시다"

알렉스의 동의에 첸 스님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르륵"

괴물들이 천천히 다가오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일행을 덮쳐왔다.

"이놈들"

하엘주교가 십자가를 힘껏 휘둘렀다. 혁수의 몸도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없이 튀어 나갔다.

십자가의 끝부분에서 날카로운 쇠꼬챙이들이 사방으로 삐져나왔다. 금속끼리 격렬하게 마찰하면서

소름돋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앗"

꼬챙이들에 피부를 베인 괴물 하나가 팔을 움켜 쥐었다. 곧이어 혁수의 곧게 뻗은 두 발이 괴물의 선두에

부딪혀 갔다. 강력한 충격이었지만, 괴물들의 속도가 잠시 늦춰지는 데 그쳤다.

"퍼어엉"

그 순간이었다. 벽 한쪽이 무너지면서 누군가가 그대로 돌진해 왔다.

"쿠웅"

은색 갑주를 걸친 기사 둘이 괴물과 충돌하면서 묵직한 타격음이 울려 나왔다.

괴물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채앵"

괴물의 손톱이 기사 한명의 등에 적중했다.

"쉬익"

"꺼어어..."

순식간에 돌아선 기사가 바스타드로 괴물의 팔뚝을 날려 버렸다.

"꾸아아"

동료가 주저앉자 네 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기사에게 달려 들었다. 짧은 시간에 기사의 몸에 수십번의 타격이

들어갔다.

"부우웅"

나머지 기사 한명이 칼을 크게 휘두르며 흥분했지만, 그도 괴물들에게 둘려 쌓인 상태였다.

"놀고들 있군"

무너진 벽 사이로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청은 그렇다 쳐도, AR놈들도 형편 없는 걸.."

남자의 검집에서 검이 뽑혔다.

"다들 엎드려"

기사 두명이 엎드리는 것을 본 하엘 주교가 재빨리 소리쳤다.

"찌잉"

검끝에서 주먹만한 빛이 응축 되었다. 응축된 빛은 한순간 직선으로 쭈욱 뻗어 나갔다.

"크으아"

괴물 하나의 가슴에 빛이 관통되었다. 순식간의 가슴은 구멍이 뚫리면서 타들어 갔고, 매케한 냄새가 진동을

해댔다.

"슈웅"

남자는 검을 움직여 빛을 이리저리 조종했는데, 흡사 엄청난 길이의 광선검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크르륵"

"카아악"

잠깐 사이에 괴물들의 온 몸에 구멍이 뚫렸다. 고기 타는 역겨운 냄새와 함께 뿌연 연기가 피어 올랐다.

"아"

일행은 멍한 표정으로 괴물이 학살 당하는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푸욱"

"퍽"

모든 괴물이 나자빠졌고, 기사 두명이 확인사살로 마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터무니 없이 강하다..."

혁수가 새삼 존경의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검을 집어넣고 일행쪽을 훑어 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템플기사여"

하엘주교가 가슴을 쓰러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것 없어, 저놈들의 악취가 거슬렸을 뿐이야.."

"아니오, 그대의 진심을 난 느낄수가 있소"

첸 스님이 호의적인 어투로 남자에게 말했다.

"아아, 필요없다니까.."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익 저었다.

"그따위 실력들론 레오나르년을 만나기도 전에 몰살 당하겠군"

남자가 키유의 위아래를 훑어 보면서 빈정 거렸다.

"당신이 구해준 건 고맙지만, 말은 가려서 하십시오"

얌전히 있던 루시안이 앉은 자세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루시안의 반응에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다가갔다.

"싫다면 어쩔거지?"

남자의 입이 루시안의 귀에 바짝 다가갔다.

"어쩌긴요, 끝까지 가는 수 밖에요"

루시안의 입꼬리가 실룩 거렸다. 지켜보던 하엘주교가 급히 둘 사이로 파고 들었다.

"그만 하십시오, 루시안님 답지 않습니다"

둘의 대립을 일행이 바짝 긴장한 채로 구경하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모두의 시선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의 호위병인 두 기사도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일이 벌어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모두를 둘러싸고 있었다.

"크큭.."

말없이 루시안을 노려보던 남자의 입에서 쓴웃음이 터졌다.

"눈빛 하나만큼은 교황청 최고로군"

남자가 미련없이 몸을 돌려서 걸어가 버렸다. 남자가 정면쪽의 복도로 걸어가자, 두 기사가 천천히 뒤따랐다.

"후아"

셋이 사라지자 혁수의 입에서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우"

긴장이 풀린 알렉스도 장검을 내려 놓았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합시다"

첸 스님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가자고 했어도 안 갔을 겁니다"

혁수와 알렉스가 주저 앉았고, 김선생과 하엘주교도 넘어지듯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루시안은 선 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 루시안님.."

혁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루시안이 굳은 표정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보세요"

혁수가 하엘주교와 루시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까전에 템플기사가 한 말이 무슨 뜻이죠? 루시안님을 보고 교황청 최후의 보루라고 했던 말.."

"흠"

루시안의 얼굴에서 난처한 표정이 지어졌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게 궁금했었어"

알렉스의 호기심어린 눈빛에 루시안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대답해 드리죠"

하엘주교가 쓸쓸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올려다 보았다.

"루시안님은 명실상부 저희 교황청 최고의 무력입니다"

부끄러운 듯 루시안이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헌데 왜...."

하엘주교가 혁수의 말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하지만 반쪽짜리 힘입니다, 신께선 절대적인 힘에 제약을 걸어 놓으셨습니다"

"제약이요?"

"네, 루시안님께서는 한달에 한번씩만 싸우실 수 있습니다"

"어째서죠?"

하엘주교의 말이 잠시 멈춰졌다. 루시안이 제스쳐를 취해 왔기 때문이다.

"제가 말하죠, 저는 한번 힘을 쓰면 한달간을 요양해야 합니다..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죠"

"헛"

"죄송스러워 죽겠습니다, 밥만 축내는 신세니까요"

하엘주교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요, 루시안님이 최고라는 건 누구도 토를 달수 없는 진실입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루시안님께서는 마녀를 위해서 힘을 자제하고 계신거군요"

"그렇죠, 루시안님은 '에이스 킬러' 입니다.. 우두머리만 제거를 하는 것이죠"

"알았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혁수가 씨익 웃었다. 첸 스님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만 출발들 하십시다"

"끄윽"

"벌써.."

일행이 휘청 거리며 일어섰다. 혁수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키유를 스쳐 지나갔다.

'흠, 그러고보니..'

혁수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저 일본년은 전혀 싸우지 앉았다.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어'

혁수가 키유를 바라보자, 키유도 혁수를 쳐다 보았다.

"뭘 보는거죠?"

혁수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

'분명 뭔가가 있어..'

첸 스님을 선두로 일행이 복도를 따라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좀전에 템플기사가 사라진 방향쪽이었다.

"아마도 그자가 무언가를 느끼고 벽을 뚫었던 것 같군"

첸 스님이 전방을 유심히 살쳐보기 시작했다.

"그럼 우릴 도와준 것도 우연이란 말인가요?"

"아마도 그럴것이네, 지금 거대한 무언가가 앞쪽에 있거든"

첸 스님의 말에 모두들 안력을 돋구고 앞을 주시했다.

"보이진 않을거야, 나도 희미하게 느낄 뿐이니까"

혁수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뒤로 돌렸다.

'헛'

혁수의 고개가 재빨리 원래자리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알렉스의 고개가 돌려지려 하자 혁수가 잽싸게 제지했다.

"보지 말아요, 따라오고 있는 걸 깜빡했네요"

"젠장, 아직도.."

알렉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근데 이상한게 있어요, 안 나타나는 사람은 뭐죠?"

혁수의 의문에 첸 스님과 루시안이 동시에 대답했다.

"난 보여요"

"저도 보입니다, 말을 안했을 뿐이지"

"아, 그렇군요... 김선생님도 보이시나요?"

혁수가 한국말로 김선생에게 질문했다.

"나 긴장한거 안보여? 난 천장에 붙어서 따라오고 있다"

혁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김선생의 고개가 정면으로만 고정되어 있던

것이 떠올랐다.

"무슨 집이 이렇게 크지? 사람 피곤하게 말야.."

알렉스가 투덜거리자, 하엘주교가 대답을 했다.

"이 집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아미티빌 하면 유명하지 않습니까, 저는 물론 들어 봤습니다"

"말해 주세요, 저는 잘 모르는 걸요"

혁수의 부탁에 하엘주교가 빙그레 웃었다.

"수십년 전에 이곳에서 일가족이 끔찍하게 살해 당한 채 발견되었소, 범인은 바로 이 집의 장남이었죠"

"장남이요?"

"네, 장남인 로날드가 악령에 씌여서 자기 가족을 죽여버린 겁니다"

"끔찍하군요"

"그 이후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바로 이곳 아미티빌에서..."

"혹시 그것이 레오나르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군요.."

"쉿"

별안간 첸 스님이 입에서 바람 소리가 터졌다.

"들어보세요"

일행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템플 나이츠?"

모두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 보았다. 그리곤 동시에 입이 열렸다.

"레오나르.."

"두둑"

앞에서 소리과 들림자 모두가 그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새까만, 아주 칠흙같이 새까만 숫염소 한마리가 보였다. 염소의 뿔은 세개나 있었고, 그것은 무척 거대했다.

일행은 순식간에 얼어 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고, 염소가 일행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헉'

혁수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을 뻔 했다. 염소의 새하얀 눈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악...악..마.."

하엘의 입이 힘겹게 벌어졌다.

"히죽"

염소의 양쪽 입꼬리가 기괴한 모습으로 벌어졌다.

혁수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한번 자라난 공포심은 끝없이 팽창해 나갔다.

심장은 터질듯이 두근 거렸고, 극도로 예리해진 오감을 통해 누군가 뒤에서 접근하는 걸 알아 차릴수 있었다.

"스윽"

혁수의 얼굴 앞으로 누군가 얼굴을 드리 밀었고, 그것은 자신을 따라오던 입이 꿰매진 소녀였다.

십자가를 있는 힘껏 움켜 쥔 하엘의 양손 사이로 피가 흘러 내렸다.

터져버릴 듯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두 눈은 완전히 뒤집혀서 흰자만 보였는데,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갈"

첸 스님의 벼락같은 호통소리가 터졌다. 눈알의 실핏줄이 터져 광대뼈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파하...."

첸 스님의 주문에 일행이 한순간 정신을 차렸다.

"대..체 무슨..일이..죠?"

혁수가 마구 떨리는 두 팔을 감싸며,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모두들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오게나"

첸 스님이 주문소리와 함께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첸 스님을 뒤를 쫓았다.

"으..으.."

혁수는 감히 옆을 바라볼 생각을 못한 채 염소를 지나쳤다.

"내가 뒤로 돌아보면, 한꺼번에 뛰게나"

첸 스님이 주문을 멈추었다.

"휘익"

핏자국으로 흉칙하게 변한 첸 스님의 몸이 염소를 향했다.

"뛰어"

일행이 엉기적 거리며 필사적으로 뛰어갔다. 저만치서 빛의 덩어리가 번쩍 번쩍 거리고 있었다.

"그대도 어서 피하... 커헉"

키유의 손가락이 첸 스님의 가슴에 깊숙히 박혔다.

"그 주문 좀 그만 외우지 그래?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키유의 손이 등을 뚫고 빠져 나왔다. 이 모습을 염소가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헛, 이곳은.."

빛을 따라 빠져 나온 일행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제일 처음 만났던 입구였다.

계단쪽에서 템플기사가 빛뭉치를 쏘아대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아래쪽에는 호위기사 둘이 잔뜩 오그라 든채 죽어 있었다.

"헉..헉"

잠시 멈춰선 템플 기사가 미친 듯이 주위를 훑어 보았다.

"어딨지? 당장 나와라, 레오나르.."

두리번 거리던 그가 일행의 뒤쪽을 보고 씹어먹을 듯이 중얼 거렸다.

"거기 있었구나"

일제히 뒤를 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두 명의 키유가 유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빌어먹을.."

혁수가 낮게 읊조렸다. 김선생이 가방을 뒤집어서 모든 부적을 바닥에 털어냈다.

한명의 키유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단발이던 머리는 길게 자라나 허리까지 내려왔고, 키는 점점 커져 이미터에 육박했다.

흰색에 가깝던 피부는 붉게 변했고, 오돌토돌한 것이 수없이 솟아났다.

변화를 마친 그녀는 또 하나의 키유를 날카로운 이빨로 뜯어 먹기 시작했다.

"으드득"

입은 기이한 각도로 찢어져 순식간에 그녀를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웠다.

불룩해진 배 사이로 속이 비쳐졌다. 먹힌 키유의 손가락과 얼굴등이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레오나르.. 오늘 반드시 죽여주마"

템플기사가 검을 수직으로 든 채 천천히 다가왔다. 치켜든 검의 끝에서 순백의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고귀하신 팀플기사단이여, 그대들은 불가능한 일에 수천년을 쏟아붓는 군요"

"헛소리.. 바닥에 쳐박히고도 그 소리가 나오는지 볼까?"

"다같이 상대 합시다, 사탄을 추종하는 일곱 악마는 고유의 권능이 있소"

"날파리들은 보고만 있어, 방해만 되니까"

"당신은 악마와 부딪힌 적이 없구만, 경솔히 덤벼서는 필패일 뿐이요"

하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호오, 그대가 어찌 권능의 존재를 아는가요?"

레오나르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어 보았다.

"피의 날에 벨제뷔트를 본 적이 있다"

"아,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았군요"

"무슨 개소리 들이지? 피의 날에서 살아 남았다고? 그걸 믿으란 말이냐"

템플기사의 눈에서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강한 안광이 쏟아졌다.

"벨제뷔트의 권능은 공간조종 이었소"

하엘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납작하게 깔린 채로 수천명이 폭사했소, 그들의 피가 사방으로 날려서 마치 비처럼 떨어져 내렸지.."

"그럼 잘 알고 있겠구나, 권능의 무서움을..."

레오나르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 올랐다.

흑색 염소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염소는 털이 순간적으로 빠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체형이 변했다.

염소는 사라지고 거대한 날개를 단 푸른 악마가 나타났다. 집의 지붕에 설치됐던 악마동상과 흡사한 외모였다.

악마의 손발은 조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휘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몸 전체는 푸른색 이었는데, 놀랍도록 매혹적인 몸매였다. 여성의 얼굴이었지만, 가슴은 들어가 있었다.

악마의 입이 열리면서 높은 하이톤의 음색이 울려 퍼졌다.

"레오나르, 보여주거라. 그대에게 내린 권능을.."

악마는 날개를 움직여 레오나르의 곁으로 날아갔다.

"영광입니다, 아스타로트시여"

"헉, 아스타로트...."

하엘과 템플기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숨죽이고 바라보던 혁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건 뭐..뭐죠?"

"아스타로트.... 일곱악마에게 권능을 하사한 존재지... 설마....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하엘이 절망적으로 뇌까렸다.

"나 레오나르, 사탄님의 충실한 일꾼이 그대들에게 권능을 보여주겠노라"

아스타로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일행들을 내려다 보았다.

"지옥강림"

레오나르의 한마디와 동시에 바닥이 무섭게 떨려 왔다.

"찌지직"

흔들리던 바닥은 곧 좌우로 갈라 졌는데, 붉은색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아래를 내려다 본 혁수의 동공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곳엔 끝없이 펼쳐진 지옥이 있었다.
갈라진 바닥은 벽까지 밀려났고, 일행은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우아아아"

"으아악"

머리칼이 쭈삣 서는 느낌과 함께 모두의 팔다리가 허우적거렸다.

"쿠웅"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답답한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떨어진 혁수의 손에 끈적거리는 액체가 만져졌다.

"으..으.."

의식적으로 눈을 뜨지 않고, 손을 마구 털었다. 한쪽에서 하엘주교의 절망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오, 맙소사.."

뜨거운 공기에 금세 땀이 쏟아졌지만, 감히 누구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누구 눈 뜬 사..사람 있나요?"

알렉스의 목소리가 꽉 막힌 것처럼 울렸다. 바닥에 고개를 쳐박고 손으로 감싸 쥔 것이다.

"맙소사, 이럴 수가.."

하엘주교의 넋나간 말투에 혁수가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갔다.

""부스슥"

누군가가 혁수의 팔목을 잡았다. 섬뜩한 그 느낌에 혁수가 진저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무..무슨 일이야?"

김선생이 구겨진 부적 뭉치를 움켜 쥐고 물었다.

"다들 동시에 눈을 뜹시다, 이대론 꼼짝없이 죽겠어요"

'안돼'

혁수의 머리가 좌우로 심하게 요동을 쳤다.

"자, 뜹시다"

알렉스의 기합성에 혁수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혁수가 슬며시 실눈을 떴다.

"억.."

혁수의 끔찍한 신음을 시작으로 일행의 반응들도 비슷하게 튀어 나왔다.

"헉.."

"컥"

경직된 자세로 혁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 앞에 지옥이 보였고, 자신들은 중심에 떨어져 있었다.

지옥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수백 아니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하늘에는 붉은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요동을 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천둥과 번개가 끝없이 쏟아졌다.

지상에는 수없이 많은 원통 구멍에서, 짙은 선홍색의 용암 국물이 끓어 넘쳐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는데.

온 몸을 데인 사람들이 구슬픈 비명을 지른 채 피해다니고 있었다.

대기는 역겨운 유황냄새로 가득했고, 불쾌한 수증기로 온 천지가 뿌옇게 보였다.

"으윽.."

문든 숨쉬기가 답답해진 혁수가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억..어억"

"윽..으으.."

일행이 모두 바닥을 구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혁수의 벌어진 입으로 바닥에 고여있던 액체가 튀었다. 호흡이 곤란한 와중에도 그것이 사람몸에서

흘러내린 고름과 진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레오...나르.. 으으.."

템플기사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악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소감이 어떤가요? 꽤나 운치 있는 곳이죠?"

혁수의 입에서 허연 거품이 보글보글 삐져 나왔다.

"아 참 이곳의 공기에는 산소가 별로 없답니다, 그러니 양해 바랍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렇다고 숨 못쉬어서 죽을 정도는 아니니깐"

"꺼억"

"억..억"

혁수의 흐릿한 눈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뼈에다 살가죽만 두른 몰골이었는데,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뛰어 다녔다.

그들 중 일부가 용암에 입을 쳐박고 그것을 마시고 있었다. 순식간에 입술이 녹아 내렸고, 목과 식도에

구멍이 뚫렸다. 고통에 찬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터졌지만, 그것은 천둥과 번개 소리에 곧 묻혀 버렸다.

"그대들도 곧 마시게 될거예요, 펄펄 끓는 용암물을.."

하늘 중앙에 구름 사이로 거대한 레오나르의 얼굴이 일행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미..미..친..년.."

템플기사의 손에서 검이 던져졌다. 검은 잠깐 솟아 올랐지만 이내 용암속에 떨어져 버렸다.

"모..목..말라.."

뜨거운 기온에 모두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

혁수의 눈에 용암이 자꾸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혁수의 몸이 용암이 고여있는 구멍으로 기어갔다.

일행의 시선이 혁수로 향했다. 다들 일그러진 표정으로 숨쉬기도 벅찬 상태였다.

"치지직"

용암에 입을 가져가려던 혁수가, 흠칫하고는 손을 먼저 갖다대었다.

"끄아악"

순식간에 손톱 두개가 타들어갔고, 혁수가 뒤로 나자빠졌다.

"어라.."

레오나르의 얼굴에 한가닥 의혹이 피어 올랐다.

"지지직"

"지직"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간이 사방으로 확장 되었다가, 어느 순간엔

정상으로 돌아갔다.

"오호, 믿을 수가 없는데.."

레오나르의 놀란 음성이 터짐과 동시에, 공간이 길게 갈라졌다.

위아래로 갈라진 공간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물밀듯이 흘러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몸을 이끌었다.

공간 사이로 중년의 사내 한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체격에 반삭한 머리에서 수십가닥의 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남자는 일행을 보며 빙긋 웃었고, 곧 그들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움직이자 공간은 다시 닫혔고, 차가운 공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으억"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일행이 원망스럽게 남자를 쳐다 보았다.

갑자기 남자를 보던 혁수의 표정에 한가닥 변화가 일어났다.

"기...기..원..님"

축 늘어진 부적을 끌어안고 있던 김선생의 입가도 서러운 듯 일그러졌다.

"구..부..부..장님"

남자는 손을 들어 인사를 한 뒤, 고개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곧 하늘에서 레오나르를 발견한 그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거기 있었군요, 사탄의 종자여.."

"넌, 누구냐?"

레오나르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구기원 입니다, 피의 날에 한번 뵜었죠"

기원의 시선이 지옥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폈다.

"과연, 권능의 힘이란 무시무시하군요... 이것이 지옥의 모습입니까?"

"......."

"혁수군, 김선생... 그리고 나머지 분들도 잘 들으시오"

기원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옥은 존재하지 않소, 그러니 궁상 떨지 말고 일어들 나시오"

기원의 말에 레오나르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지어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리고 그대는 어째서 이곳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냐?"

"지옥은 없소, 지옥이란 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죠"

"지옥은 있다, 우리 일곱악마들의 고향이며, 역겨운 인간들이 발버둥 쳐대는 바로 이곳이 지옥이다"

"지옥은 모순이오, 이 끔찍하고 거대한 곳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걸요"

"살아 생전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대의 말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인가?"

"성경엔 지옥을 확신하게 만드는 그 어떤 글귀나 구절도 쓰여있지 않소"

기원이 재차 말을 이었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 그 기간동안 죄를 지었다고 해서, 자비심 많고 자애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원히 지옥에 빠트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곳을 보십시오..

이런 끔찍한 곳을 하나님이 과연 상상 할 수 있을까요? 절대선인 하나님은 결코 지옥 따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말대로 치자면, 죄를 지은 사람은 대체 어떻게 벌을 받는 다는 거지?"

"윤회할 뿐이오, 죄를 지을수록 비천하고 더러운 존재로 태어날 뿐이죠"

"호호, 그대의 말은 꽤 그럴싸하지만 저들의 마음은 아닌것 같군"

기원의 눈에 여전히 고통스러워 하는 일행들이 보였다.

"잘 들어라, 귓구멍을 열어 젖히고 가슴으로 받아 들여라"

기원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호통을 치듯이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옥이 있다면 천국도 있을터, 내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겠다"

"너희는 살아생전 무수한 선행을 펼쳐 천국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마음이 고약했던

너희들의 부모나 형제, 그리고 자식들은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되지"

일행은 숨도 쉬지 않고 기원의 말에 빠져들었다.

"향기로운 꽃들이 있는, 밝고 따뜻한 천국에서 너희는 두 발을 편히 뻗고 지낼 수 있을까?

바로 옆 지옥에서는 너희의 부모가 배고파서 서로의 살집을 뜯어먹고 있고,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과연 모든 것을 무시하고 천국의 향락을 누릴 수 있을까?"

불규칙적이던 일행의 가슴이 진정이 되었다. 호흡은 안정되었고 얼굴빛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답은 그럴 수 없다다. 천국을 갈 정도로 착한 너희는 밤낮으로 울며 슬퍼할 것이다

제발 그만두라고 하나님께 빌수도 있겠지"

"그럼..."

혁수의 눈에서 깨달은 자의 그것이 나타났다.

"결론은 지옥이란 없다, 지옥은 인간의 망상이며 결코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지"

한순간, 온 세상이 폭발했다. 조각조각난 공간의 파편들이 빛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아, 이곳은..."

"살았군"

일행은 처음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산소는 풍부했고 기온은 알맞게 맞춰져 있었다.

"흐읍"

혁수가 행복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 마셨다. 용암에 닿았던 손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어이없는 듯 멍하니 있던 레오나르의 곂을 아스타로트가 지키고 있었다.

"이럴수가.. 이렇게 흥미로운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아스타로트의 높은 음색에 기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진짜 악마로군"

"지금 흥분해서 전신에 소름이 돋고 있어, 이거 미치도록 유쾌한 걸"

아스타로트는 어린 아이처럼 사방을 날아 다녔다.

"권능이 깨지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또 한번 깨보거라"

레오나르의 흉칙한 이빨이 무섭게 으르렁 거렸다.

"진정하라, 레오나르... 한꺼번에 재차 펼칠 수 있는 따위가 아니다, 권능이란 것은"

"죄,죄송합니다"

"최소 한시간은 필요해, 내가 도와주겠다. 더욱더 소름돋고 더욱더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주겠다"

"감사합니다, 아스타로트시여"

레오나르의 살기등등한 눈빛이 기원에게 쏟아졌다.

"부스럭"

기원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길쭉한 모양의 그것에는 심지가 붙어 있었다.

"찰칵"

라이터로 그것에 불을 붙힌 기원이 공중으로 힘껏 던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펑, 퍼엉, 펑펑"

굉음과 함께 창문사이로 빛이 번쩍 번쩍 거렸다.

"그게 무엇이죠?"

혁수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준비물... 이거 준비 하느라 늦었다, 이곳 아미티빌을 정화해야지"

문이 활짝 열렸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검은 군복으로 무장한 그들의 손에는 짐이 가득했다.

"엇, 저들은 1급요원들..."

AR소속의 1급요원들은 공중에 떠 있는 악마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몇몇이 도구를 사용해 문의 입구를 크게 넓혔다. 또 일부는 가져온 전선을 온 집안에 두르기 시작했다.

할말을 잃은 레오나르와 흥미롭게 주시하는 아스타로트를 기원이 슬쩍 훔쳐 보았다.

"이게 대체.."

입구는 완전히 넓혀져 거의 정원과 연결되다 시피 변했다.

밖으로 나온 혁수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어림잡아 백명도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각종 물건들이 날라지고 있었는데, 의자와 술병.. 식탁과 전구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중장비도 동원이 되었는데, 커다란 크기의 샹들리에가 조심스레 옮겨지고 있었다.

멀리서 수많은 불빛이 비춰졌다. 수십대의 차에서 동시에 비춰진 헤드라이트의 불빛은 정원을 한순간에

대낮으로 만들고 있었다.

"엄청나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알렉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헝클어진 머리에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알렉스의 표정은 신이 난 듯 들떠 있었다.

곧 집안의 천장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설치 되었고, 곧 불이 들어왔다.

휘향찬란한 온갖 보석들이 황홀한 빛을 뿜어 내었다. 삽시간에 집안은 크게 밝아졌고, 사람들의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었다.

트럭에서 둥그렇게 말린 무언가가 떨어졌다. 붉은색의 그것이 떨어지자 두세명이 달라 붙었다.

"와"

그것은 고급 양탄자 였는데, 지저분한 바닥이 금세 사라졌다. 몇개의 양탄자가 더 깔리자 마침내

바닥은 완전히 붉은색으로 뒤덮히고 말았다.

곧바로 식탁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탁들은 기술자의 지휘로 이곳저곳에 배치 되었고, 뒤이어

다량의 의자가 들어왔다. 

"흠..흠"

군침도는 냄새와 함께 음식들이 들어왔다. 통으로 구은 멧돼지에게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수십병의 와인과 유리잔이 들어왔고, 접시와 각종 음식들이 쏟아졌다. 이곳 저곳에 대형 스피커가 놓여졌고

정면에 받침을 덧붙여 무대를 만들었다.

정원에도 화려한 파티장의 모습이 완성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불과 사십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둘러보던 기원의 고개가 끄덕여졌고, 곧 아미티빌의 문이 열렸다.

수십대의 버스에서 일제히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깔끔한 정장 차람의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하나 둘

들어섰고, 이내 정원을 지나 집안까지 들어왔다.

레오나르는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는데, 무척 화가 난 듯 했다.

공중에 떠 있는 악마를 보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안심하십시오, 연출입니다"

1급요원들의 입에서 차분히 음성이 터졌고, 곧 그들은 둘의 모습을 신기한 듯 관찰했다.

기원이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은은한 모짜르트의 선율이 기분좋게 귓속에 파고 들었다.

잠시 후 온 집안이 사람들로 채워졌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정원에 마련된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아"

무대에 올라선 기원이 마이크를 부여 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기원을 향했다.

"말씀드렸다 시피 이번 연회의 목적은 이 지역의 발전입니다, 한 때 살기 좋았던 이곳이

이 빌어먹을 집 때문에 고약하게 변했었죠"

기원의 능숙한 영어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파티를 계기로 이곳 아미티빌은 사라질 것입니다, 자 다들 잔을 들어 주세요"

모두의 손에서 와인잔이 치켜 올려졌다.

"건배"

기원이 힘차게 외쳤다.

"건배"

"건배"

중단 되었던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고, 장내는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미..미친.."

레오나르의 얼굴이 시간을 더할수록 흉칙하게 변해갔다.

그런 레오나르의 모습을 아스타로트가 여전히 생글 거리며 바라보았다.

혁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곳곳에서 너털 웃음이 터졌고, 행복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한시간이 지났다, 모조리 죽여주마"

레오나르가 둥실 뜬 채로 중앙으로 날아왔다.

"우와"

"이야, 원더풀"

"신기한데"

사람들의 입에서 즐거운 비명이 터졌다. 그들은 레오나르를 보고 활짝 웃었고, 일부는 박수를 쳐댔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레오나르가 분한 듯이 중얼 거렸다.

유명한 여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내의 관심은 순식간에 한쪽으로 쏠렸다.

"지옥..."

레오나르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강림..."

일행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었지만 혁수를 포함한 일행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굳었다.

"......."

그대로 였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오나르의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 졌다.

영안이 뜨인 혁수의 눈에 오로라가 보였다.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또 그들의 대화 속에서

맑고 깨끗한 무지개 빛깔의 오로라가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오로라는 레오나르의 몸 주위도 감싸고 있었는데, 저만치서 아스타로트가 다가왔다.

"네가 졌다, 레오나르.."

아스타로트의 시선이 기원을 향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미..미친, 말도 안돼... 이럴 수는 없어, 으아아악"

레오나르의 모공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 나왔다.

"직접 죽여주지, 이 손으로.."

놀란 사람들의 표정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지금이다, 페드릭 루시안!! 출정하라"

기원의 힘찬 목소리가 바락바락 울렸다.

순간 멈칫하던 루시안의 시선이 기원을 향했다.

"죽여 버려"

기원의 얼굴이 잔인하게 일그러 졌다.

그 찰나 였다. 눈 한번 깜빡일 시간도 안되는 바로 그 찰나에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그것의 몸에는 회색빛 비늘이 겹겹히 솟아 났고, 곧 온 몸이 회색으로 둘려 쌓였다.

엄청난 속도로 레오나르를 향해 날아간 그것은, 곧 수없이 충돌해 가기 시작했다.

레오나르의 주위를 빙빙 돌며, 그것의 잔상이 화려하게 뿌려졌다.

수십조각으로 찢기고 갈라진, 레오나르의 몸뚱아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명 한번 지를 시간 없이, 순식간에 천참마륙으로 도륙된 레오나르의 모습은 기이한 아름다움 마저 자아냈다.

"으아악"

"엄마야"

사람들은 얼굴에 빛방울이 뿌려지고, 고깃덩어리들이 사방으로 떨어진 후에야 비명을 질러댔다.

고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전사의 모습이 공중에 떠 있었다.

(이후는 댓글에.. 글이 자꾸 짤려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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