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의 기원은 중국으로 학계에서는 중국의 황토고원 지대에 기원을 두고 중국 황토고원의 굴집 거주민들에 의하여 발생되었다 라고 보고있습니다.
즉 주택풍수가 먼저 생기고 묘지풍수가 나중에 발전되었다는 풍수 원리의 형성 배경에 대한 지리적인 추론에 근거한 설이며 국내외 학계에서 주요한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풍수라는 것은 단순한 자연 환경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동양에서 지리를 바라보는 관점인 동태적이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며 단순하게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키워내는 자연환경 전체를 일컫는 말인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니 풍수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이는 달리 말해 신령이나 자연 재해, 죽은자 등 자연의 아래에 있는 모든것은 풍수에 의해 지배가 가능하다는 말로서 풍수가 가지는 사상의 실천적 체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풍수는 자연의 호흡인 기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의 구상적이며 긍정적인 형태인 생기에 의하여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가 마을이나 묘지를 점지할때 가장 명당으로 택하는 배산임수가 바로 이러한 생기가 자연에 역행하지 않고 균형잡히게 모인 혈입니다.
이러한 풍수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중국 문화의 유입과 같은 시기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초로 확인할수 있는 기록은 798년 신라 원성왕 사후 왕릉을 논하는 구절이 나오는 최치원의 승복사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서 풍수의 조종으로 알려진 청오자가 거론되며 지맥을 가려씀으로써 후손에게 복이 간다고 하는 등 풍수 사상이 들어간 글로써 원성왕의 능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곡사 라고 하는 절터에 모셔졌다 하는데 이는 풍수적으로 좋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문에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미 798년 이전에 한반도에는 풍수가 전래되어 절을 허물고 왕릉을 쓸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솔직하게 이 보다 앞선 기록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라 탈해의 이야기에서 볼수 있듯 4대 왕이 되기 위해 숱을 묻어 호공을 속이고 초승달 같이 생긴 명당을 차지해 살았다는 것이나 가야가 세워질때 수도를 정하는 이야기 등 풍수의 영향을 생각해볼수 있는 단편적인 사실들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라 말 도선이 한반도에 풍수를 전래한 이가 아닐까 합니다만, 이미 중국 한나라, 당나라 시절 부터 풍수는 중국에서 만연하였으며 한사군의 성립이나 삼국 통일 전쟁 당시 등 중국과 직접적으로 접하였던 시절도 많을 뿐 아니라 민간 국가간 수없이 행하여진 교역과 교류를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가령 동사강목을 본다면 무왕 35년 2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리 넘어나 끌어들였고 연못가에 능수버들을 심고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을 본따 만들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도 궁남지라는 이름으로 일부 복원이 되어있는 곳인데 풍수에서는 물길이나 연못을 집 앞마당 되도록 남쪽에 만들어 생기가 물을 건너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집에 생기를 잡아두는 일을 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미 무왕 35년 즉 634년 이전에 풍수가 퍼져있었다는 것을 가늠해 볼수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7년 그러니까 AD 391년의 기록에도 궁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방향은 가늠하기 힘드나 이러한 기록들에서 우리는 391년 이전 늦어도 634년 이전에는 한반도에 풍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일본에 풍수가 전래된 것은 일본 서기에 따르자면 602년 10월 백제의 승려 관륵이 일본 왕실에 천문 지리와 역술에 관한 책을 가져왔고 서너명의 일본 학자들이 관륵에게 이를 배웠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문에 대비되는 지리는 풍수로 보는것이 자연스러우며 이로써 알수 있는것은 아무리 늦어도 일본에는 602년에 풍수가 전래되었다는 점인것과 동시에 이미 이 이전부터 백제에는 풍수가 만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에서의 추론과 다르게 역시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누가 전래하였는가는 역시 불명확한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전래된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짜맞추어 추론해 볼수 있는 것이 바로 고대 일본의 도시와 정원의 건설입니다.
일본기에 따르자면 일본 정원의 시초는 612년 수이꼬 천황 당시 백제 사람 로자공이 일본 왕궁 남쪽에 수미산을 만들고 아치형의 오교 다리를 만든것이라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백제의 그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풍수술에 영향을 받은 공사가 아닐수 없는 부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서로 알려진 사쿠데이키作庭記가 지형의 기복, 나무를 길한 곳에 심기, 물이 흐르는 모양과 방향을 결정하는 등 풍수 사상과 큰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원의 시작과 발달은 풍수와 밀접한 관계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헤이조쿄平城京 나 헤이안쿄 (도쿄)와 같은 도시의 성립 역시 풍수와 뗄수 없는 관계에 가깝습니다.
헤이조쿄의 경우 속 일본기 708년 2월 15일 나라의 땅은 사신사(도교의 그것)의 법률에 맞고 삼산이 막혀있어 도읍을 건설하기 좋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즉 우리가 아는 배산임수의 조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헤이안쿄 역시 조영대부 와게노 기요마로는 도쿄 분지의 사신사가 맞는지 확인하고 도읍을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즉 708년 이전 더 나아가 최소한 612년 혹은 그 이전에는 풍수가 전래되어 있었을 거라는 것이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국과 중국 일본의 풍수가 모두 같은가 본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학파의 형성은 9세기 중국 양균송이 형세학파, 다른 이름으로 강서학파라는 것을 조성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들은 산세나 수류등 지세 판단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지요, 이에 대응해 11세기 송나라에서 왕급이 주축이 되어 괘, 10간, 12지 등 세상의 규칙적인 운동과 법칙에 주목한 원리 혹은 복건학파라는 학파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중국과 한국등 기타 국가는 부계 조상의 친족 자손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시 되는 문화 아래 묘상학을 중요시하는 풍수가 주가 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부계 조상의 친족 자손이라는 것 보다는 가문이 주축이되는 문화가 기반이 되어 가문 그리고 가계도등을 상징하는 가옥의 가상을 중요시 하게 됩니다.
즉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명당에 묘자리를 두는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일본에서는 나와 내 자손들이 살고 또 살게되는 이 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이나 중국과 일본은 서로 무관한 사이 즉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덧붙이자면 근래에 들어 혈자리를 끊었다 라고 하는 카더라가 매우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참 한국과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인 국가라는 점에서 더욱 크게 신봉받고 있는 이야기인데, 실상을 알아보면 참 이렇게 답답한 이야기도 없지 않습니다.
풍수는 자연을 역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용하고 또 받아들이며 순응하는게 풍수이지 인위적으로 명당을 조종하는 가령 혈자리를 끊는 행위는 자연을 역행하는 행위로서 이를테면 역천인 까닭에 그 시전자에게 생기의 반대가 되는 살기 등 반작용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마련이라 사실상 제일 가는 금기라 봐도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쇠말뚝을 박는것은 어떤가 본다면 사실 큰 일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고 또 활동하고 있는 지역에도 명당이나 생기가 흐르는 흐름이 있는 곳은 많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이 명당일수도 생기가 흐르는 흐름의 한 가운데 일수 도 있습니다.)
또 이름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이나 관광지에도 그 숫자만큼이나 셀수없는 명당이나 흐름은 많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될것은 현대 건축의 기본은 파일 공법 즉 말뚝을 박아 지반을 안정화 시킨뒤에 건물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를 전후하여 벌어진 경제 발전 계획들을 본다면 수많은 산세를 부수고 또 길을 내어 흐름을 끊어냈습니다. 사방 팔방 이름난 관곳마다 모텔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풍수를 중요시 한다면 쇠말뚝 카더라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쇠말뚝을 박아 혈맥을 끊는다.. 뭐 그렇듯한 소재인데 실상은 당시 일본제국이 그 엄청난 인력 동원과 자금 동원을 단 한명의 목격자나 서류도 남기지 않고 비밀리에 할 만큼 중요한 사업도 아니고 가치가 있는것도 아니고, 여유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런 지식을 잘 아는것도 아닌것은 둘째치고 그렇게 역행해서 벌어질 부작용은 누가 책임지라고 일을 벌였을까요?
사실 일본이 국가적 혹은 개개인들이 일본의 풍수적인 입장에서 행한 것으로 추론되는 것은 여러군데 있습니다. 가령 국내 각지에 세워진 신사나 일본 총독부, 저택 등의 건축물 들이 그것입니다. 대개는 메이지 유신의 영향으로 큰 가치를 두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바로 이런 곳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