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이 순간
나는 주머니 속에서 불거져 나온 주먹처럼
너는 주먹 안에 쥐어진 말 한마디처럼
나는 꼭 쥔 주먹 안에 고이는 식은땀처럼
너는 땀띠처럼
너는 높은 찬장 속 먼지 커다란 대접처럼
나는 담겨져 찰방대는 한 그릇 국물처럼
너는 주둥이를 따고 몸을 마음에게 기울인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따라지기를
나는 기울였다 세워진 술병처럼 반은 비어 있다
마개처럼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몇 바퀴를 돌다 멈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너는 벽을 껴안고
나는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너는 고맙다며 두 팔을 뻗고
나는 미친 척하고
너는 제정신인 척하고
나는 부딪힐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빗방울이 되어
흔적만이 환한 눈송이가 너는 되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행복한 너와
이미 만났었기 때문에 괜찮다는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나는
심장이 제대로 뛰기 시작하는 너는
이제야 죽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지는
이 순간에
이병률, 화분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유용주, 개같은 내 인생
숨넘어갈 때까지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침 뱉어버린 우물에서
새벽 찬물을 떠 달게 마신 적이 있었다
그대가 나를 버려도 좋으니
내가 그대를 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무릎 꿇고 운 적이 많았다
병든 다음에는 태어난 걸 저주하면서도
죽음 직전에 서면 늘
살려고 발버둥 쳤다
너무 맑게 개어 기침이 나올 것 같은 하늘 아래
흙이라도 파먹고 싶을 때가 많았다
산이라도 떠밀고 싶을 때가 많았다
나태주, 너를 두고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