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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의 원인과 전개 - 러시아 제국과 차리즘(1)
게시물ID : history_77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산트카치야
추천 : 4
조회수 : 111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2/19 21:24:42

러시아 혁명을 이해하려면 먼저 러시아 제국과 차리즘을 알고 있어야 한다. 러시아 혁명이 지니고 있는 특수성이 바로 러시아 제국과 차리즘이라는 체제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 반대 위치에서 혁명을 막고자 했던 사람들이 러시아 제국과 차리즘을 똑같이 경험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과 차리즘을 안다는 것은 러시아 혁명과 관계된 이들의 배경을 알게 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가 북방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선포한 이름으로, 이전까지는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불렸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키예프 루시를 계승한 국가였다. 러시아 땅에 동슬라브인이 세운 최초의 국가였던 키예프 루시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를 중심으로 세운 공국(公國)이었다. 이후 키예프 주변 도시들에 국가가 세워졌는데, 그 수가 많을 때에는 10개에서 12개에 이르렀다. 이 공국들이 하나의 연합 국가를 세웠는데, 이를 바로 키예프 루시라고 하는 것이다. 키예프 루시는 약 350년 동안 계속되었다.

키예프 루시는 봉건적인 성격을 띤 국가였다. 주된 지배계급은 보야르(Boyar)라고 불린 최고위 귀족 계층으로, 땅을 많이 차지한 지주 계급이었다. 보야르의 영지는 세습되었으며 사병으로서 친위대를 거느리고, 자신의 토지 안에서는 무한한 권력을 누렸다. 이들은 공국의 지배자인 공후(公侯)가 보야르 두마(Boyar’s duma)의 결정에 따르게 함으로써 공후를 자신들의 영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키예프 루시는 1206년부터 몽골에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키예프 루시는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1240년 패배했다. 몽골은 키예프 루시의 도시를 파괴했고, 이 지역에 몽골 제국의 한 부분으로서의 킵차크한국(Kipchak Khanate)을 세웠다. 이후 240여년의 킵차크한국 지배시기가 이어졌는데, 이는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라지는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는 서유럽과 거의 절연됐고, 이로 인해 서유럽의 변화에 발을 맞추지 못했다. 러시아가 킵차크한국에 지배를 받는 동안 서유럽에서는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 일어나 봉건제적 사회에서 탈피할 기회를 맞이했는데, 러시아는 그러지 못했다. 요컨대 러시아의 발전은 서유럽과 비교할 때 2세기 가량 뒤처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대신한 것은 몽골이 남긴 절대주의와 군국주의였고, 몽골의 호구 조사와 징세, 화폐 등 행정기술이 전수되었다. 이 행정기술은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졌다.

원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키예프 러시아의 변경도시였던 모스크바(Moscow)가 차차 힘을 길러나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성장했다. 1380년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 Donskoi) 대공의 지휘 아래에 러시아인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궐기했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킵차크한국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이반 3세 때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었다. 이반 3세는 자신이 즉위하기 10년 전인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새로 들어선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제국임을 강조해서 1472년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틴 팔레올로그(Konstantin Palaeologus)의 조카딸인 소피아 팔레올로그(Sophia Palaeologus)와 결혼했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과 그리스 정교의 수장임을 주장하고 모스크바를 3의 로마로 선언했고, 동시에 러시아 정교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신이 크게 높아졌다.

또한 이반 3세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키예프 루시를 형성했던 지역들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편입시켰고, 킵차크한국의 붕괴를 이용해 1480년에는 몽골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이 공로로 그는 이반 대제(Ivan the Great)라는 칭호를 얻었고, ‘모든 루시 사람의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즉 차르(Czar)가 등장한 것이다. 이 호칭은 라틴어 케사르(Caesar)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반 3세는 새로운 토지 소유제인 포메스티(Pomestie)를 도입했다. 이는 정복한 땅을 장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충성과 복무를 요구하는 제도였는데, 토지에 바탕을 둔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농노제의 탄생을 불렀다.

이반 3세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팽창을 거듭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반 4세는 동쪽으로는 볼가 강, 북쪽으로는 발트 해까지 영토를 확장시켰으나, 독일과 폴란드 등의 국가가 동맹을 맺어 모스크바 대공국의 북진을 저지해서 발트 해를 빼앗겼다. 하지만 이반 4세의 사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혼란의 시간(Time of trouble)을 맞이했다. 이 시기 이반 4세의 아들인 표도르가 새 차르가 되었는데, 무능한 표도르는 곧 표도르의 처남이었던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고두노프는 표도르의 어린 동생인 드미트리를 모스크바 북쪽의 소도시로 유배시켰는데, 드미트리는 거기서 죽었다. 그러나 표도르가 죽은 후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 폴란드 세력을 등에 업고 차르 자리에 올랐다.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 사람들을 고관으로 등용하고 국고를 폴란드에게 열어서, 많은 러시아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이 시기 혼란이 멈추지 않으면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농민전쟁이 일어났고, 가짜 드미트리는 이후에도 한 번 더 나타났다. 이 혼란의 시간은 러시아 국민이 일어나 국민군을 조직해 폴란드 점령군에 대한 항쟁을 벌여, 로마노프 왕조가 개창됨으로써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며 가뜩이나 낙후되었던 러시아는 더욱 피폐해졌다.

혼란의 시간을 수습한 로마노프 왕조 중에서 이후 러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표트르 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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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각주가 달려 있었습니다. 옮기기가 어려워서,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은 다 아실 거라고 생각해 생략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꽤 길죠? 이 파트 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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