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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과 김유신
게시물ID : history_77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바람
추천 : 11
조회수 : 167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2/19 10:18:59

이 포스팅의 주인공은 의자왕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저평가받고 있는 군주중 한명이면서도 많은 이야기거리와 함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 있다.

다들 고구려 왕족의 성은 '고'씨이며 신라는 '박,석,김' 발새는 '대씨' 교려는 '왕씨' 조선은 '이씨'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참고 고구려의 성중 해씨도 있다. 공룡황제님이 지적해주서서 첨언하는 것이며 자세한 설명은

공룡황제님 댓글에 있다.

그런데 백제 왕족의 성씨는 아는 분이드믈다.

백제의 왕족은 '부여'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여러분들 주변에 '부여씨'를 사용하는 분을 본적있는가?

여기에 아주 슬픈 역사가 숨어있다.

백제의 전성기는 4세기 칠지도의 근초고왕과 7세기 삼천궁녀의 의자왕때였다.

사실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역사적 기록은 그어디에도 없으며

조선 중기 시에 문학적인 수식어로 처음 등장하였고 일제시대 대중에게 역사로 각인된 것 뿐이다.

나한테 국사 시간에 역사적 사실처럼 말씀들 하신 국사 선생님들은 정년퇴직들 하셨겠지?

그분들도 그렇게 배운것이니 잘못은 없다.

의자왕은 국내외에서 "해동증자"로 칭송될만큼 어진 성군이었다고 한다.

물론 망국의 왕이니 그가 비판받아야하는 것은 일견 있을것이다.

과거 우리가 배웠던 국사 교육에서는 백제의 멸망의 원인중 의자왕의 방탕함과 무능함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의자왕은 전투형 군주로 어머니 '선화공주'로 인해 적대적 귀족들과 대립을 하곤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신라에 대한 맹공을 퍼붓는데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개 성을 빼앗고

옛가야 땅이며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마저 함락시켜버린다.

이 전투에서 신라 왕실 귀족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여 신라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 40여개 성이나 빼앗겼으니 이것이 관계 악화의 가장 큰원인이었으리라

한편 의자왕의 입장은 적대적 귀족들을 상대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라를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했고 그 결과 이시기를 백제의 제 2의 전성기로 만들며 강력한 왕권 강화를

구축하였다.

이에 멈추지 않고 41명의 왕자들에게 귀족들이 누리던 좌평직을 주며 식읍까지 하사하였고

귀족들의 불만은 커졌으나 워낙 강력한 왕권이었기에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와 당의 교류의 핵심인 당항성마저 점령하여 당과의 교류를 단절 시키려고 하였으나

당의 강력한 반발로 당항성은 신라에게 돌려주는데 만약 이때 당항성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역사는 상당부분 변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북으로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고구려, 남으로는 백제의 우방 왜, 서쪽으로는 의자왕의

백제로 사방이 꽉 막힌 상태로 전력상으로도 의자왕이 이끄는 백제군을 상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의자왕의 왕권강화는 신라를 공격하면서 이루워졌기에 신라에 대한 공세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으며

백제군은 항상 신라를 상대로 승리하였으니 신라로서는 머리에 빨간 비상등이 켜졌을것이다.

김춘추는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 단신으로 고구려의 보장왕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것은 고구려 최고의 카리스마 대막리지 연개소문이었고 김춘추의 제안은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하며 김춘추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신라로 냅다 도망쳐야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자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제안하였고 김춘추의 어리것은 행동으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는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게된다.

결국 신라는 백제에게 주요 거점성 7개마저 빼앗기고 국가비상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제 신라가 믿을 곳이라고는 '슈퍼파워'이지만 고구려와 백제에게 항상 무시당하는 당나라뿐이었다.

당나라도 고구려 연개소문은 원수같은 사이고, 백제는 은근 당나라를 무시하고, 왜는 백제와 친하고

신라와 비슷한 처지인지라 평소 교류가 깊었고 그런 신라의 하소연을 듣자 당나라는 백제의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게 빼앗은 7개 성은 돌려주고 신라 좀 그만 공격해랴" 라며 오만을 떨었다.

의자왕은 당의 제안을 거절하였는데 그가 믿는 것은 두가지가 있었다.

고구려와 서해바다였다.

당이 백제를 치기 위해서는 고구려를 지나쳐오거나 서해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고구려가 호락 호락

길을 내주지 않을 것이란 점이며 당군이 서해 바다를 건너는 것은 2일이면 가능하지만 대군과 함께

보급이 같이 올수 없다는 점 그리고 상륙지가 갯벌이라는 점등에서 자신감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의자왕은 식량을 가져오지 못한 대군은 며칠만 버티면 돌아갈 것이고
예상 상륙지가 갯벌이라 방어하기 용이할 것이란 계산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이란 변수를 빼고 계산한 것이 첫번째 실수였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여 화가 나있던 당은 폭발하고 신라와 함게 비밀리에 대군을 이끌고 백제공격에 나섰다.

나당 연합군은 대군을 이끌었지만 공격 목표는 극비로하였고 그들의 공격 루트가 묘하게도 고구려

침공루르와 유사하였기에 백제는 비상 경계는 하였지만 지방에 있는 군대는 모우지 않았다.

드디어 인천 앞 바다에 13만 대군을 태운 당나라 배가 도착하였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이 경기도 이천까지 당도하였다.

당군은 신라 함선 100척이 싣고 온 군수품을 1차로 보급받는데 그때서야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차 보급을 마친 당군의 배는 백제로 향하였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은 당군 13만과 자신들 5만이 당부간 먹을 식량을 싣고 백제를 향해 남하하였다.

신라군 5만은 신라가 탈탈 털어 끌어 모울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이었고 백제역시 지방 거점에 배치된 5방군을 모우면 5만 이상은 충분히 보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시간이다.

 



"계백아 니가 좀 거시기 해야쓰것다"

황산벌 전투는 비장미 넘치는 유명한 전투로 잘 알려져있는데 그 이유는 계백이 이끄는 5,000의 결사대 목표가 승리가 아닌 시간 벌기였기 이었고 살아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있었기

때문일것이다.

 

고대의 보편적 전술은 거점성 점령 뒤 주변을 평정하며 진군하는 것이었다.

적의 성을 배후에 남겨두고 전진했다가는 보급로가 차단돼 싸우기도 전에 굶어 죽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김유신은 고대 전투의 기본을 무시해버리고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실패한 별동대 전술을 사용하는데 전쟁의 목표가 정복 전쟁이 아닌 백제 멸망이며 한때 미국의 목표였던 "사담 후세인" 체포 작전처럼 의자왕을 최대한 빠른시간에 잡는것이 목적이었다.

만약 시간을 끌게되면 당의 13만 대군은 굶주리고 김유신이 이끈 5만 대군역시 배후의 공격과 기아에 허덕이다 패하게 되는 위험한 전술이었다.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는 지금의 논산 "항산벌"에서 4차례나 김유신의 신라군을 막아내며 버티기에 들어가지만 김유신의 극약처방 "꽃은 아름다울때 지는 것이다."라며 젊은 화랑들을 앞장세워 죽게만들며 신라군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고조된 분위기를 앞세워 전술이고 뭐고 없이 5만의 대군으로 일격에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를

섬멸하고 엄청난 속도로 의자앙이 있는 사비성을 향하게 된다.

목표는 의자! 의자만 잡으면 이전쟁은 끝나고 만다. 아마도 김유신의 생각은 이랬을것 같다.

백제군은 기벌포에서 신라 수군과 합류한 당군을 맞아싸우게 되는데 당군의 상륙잔전은 또 한번 김유신의 지략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최전방에 버드나무로 짠 자리를 펼쳐든 신라수군이 앞장섰고 당군은 버들자리를 딛고 갯벌을 통과해 상륙에 성공한다.

이후 사비성 남쪽에서 백제군은 다시 당군과 결전을 벌이지만 1만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고 만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당군은 합류하게 되며 개전 5일째만에 사비성이 포위되자 의자왕은 현재

부여에 위치한 사비성 방어를 포기하고 지금의 공주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겨 2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사비성은 나당 연합군에 합락되면서 식량창고가 불타게 되는데 이것이 백제의 마지막 반격 기회를

기대하게 하는 사건이다.

웅진성은 백마강을 끼고 절벽에 위치하 천연의 요새로 풍부한 무자가 비축되어있었으며 다시 한번

시간을 벌수 있다면 지방에서 군대를 모우고 배후 거점에서 나당 연합군의 보급을 차단할 수있다면

전쟁은 백제의 승리로 마무리 될수있는 기회가 온것이었다.

다시 한번 문제는 시간이었고 의자왕에게 승산이 있어보였다.

그런데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를 보면

“웅진성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여 가니라….”

애석하게도 의자왕은 웅진성 수비대장 예식의 배신으로 포로로 넘겨지고 만다.

그도안 우리는 국사시간에 의자왕이 항복하였다고 배웠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이야기인것이다.

그리고 의자왕을 배신한 예식은 당나라 대장군이되어 현재도 중국 시안의 그 묘가 있다.

의자왕이라면 치를 떨던 신라에 의해 부여씨는 사라지고 의자왕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승자의

관점으로 작성된 기록에 의해 호색한의 무능한 왕으로 묘사되어왔다.

의자왕이 잘못을 한점이 있다면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와의 외교 마찰과 그로 인한

망국의 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지만 그의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워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원본글 출처 '내 블로그'

이미지 출처 '황산벌,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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