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 / 윤동욱
죽은 이들이 모인 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는 몰라도
일단은 죽고 나면
사자(死者)들이 모인 곳이 있으리라
한평생을 살고 나서
혹독하게 피운 국화꽃이
내 사진 앞에 놓이면
그제서야 어린아이처럼
아버지께 버선발로 달려나가서는
어두운 북망산천 떠나가라
요단강을 가득 메울 눈물을 쏟아내며
그대 없던 나날을 토해내리라
이다지도 힘든 나날의 반복이지만
당장은 참아보리라
한없이 울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팽배 / 윤동욱
계절이고 시간이고
사람 기다려주며 흘러가지 않는다
흐르는 걸 원망한다고
멈추라고 소리치거나
가지 말아라 애원을 해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흘러간다
내가 춥다며 아파할 때
누군가는 세찬 눈을
다른 이와 함께 나눌 것이며
내가 비가 온다며 짜증을 낼 때
누군가는 가뭄에 시달리다
단비를 만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나는 내가 힘들단 이유로
이기적이게 멈추라고 화를 냈던 것이다
반창고 / 윤동욱
적어도,
나로 인해
이전부터 아팠던 네 흉터가
조금이나마 아무는 데 도움이 됐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 상처, 벌어지지만 않았으면
그네 / 윤동욱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느끼지 못하던걸
느껴버린 순간
참 작아지고 초라해지더라
그냥 계속 미워해라
너 없이 널 사랑하는 건 이미 버릇이니까
손톱 / 윤동욱
창문에는
하늘이 흘리는 눈물이
타닥타닥, 안을 두들기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묻기를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크기로 표현해보라고 했다
나는 손톱만큼이라고 대답하고 뒤돌아섰다
하지만 잘라도 잘라도
계속 자라나는 네 생각을
크기로 표현할 수 없던 나는
무심한 척, 손톱만큼 이라고 말을 한 것이다
뒤돌아선 곳에는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눈물이 가득 했다
당신에게 / 윤동욱
수없이 갈기갈기 찢긴 허망한 가슴을 부여잡고
흘러내리는 추억을 두 손 가득 잡아보려 했지만
힘을 줄수록 손 틈 사이로 흐르는 미련이
작은 문장을 써내려갔다
" 한평생을 살아도 내 모습이 변치 않으면
절대 오지 않을 사람아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아픔이 또 있겠는가
언젠간 너도 눈이 녹고 꽃은 피겠으나
널 녹이고 꽃 피울 사람은 내가 아니기에 "
시 아닌 시를 써내려간 뒤
나는 멍하니 연필로 쓰인 시를 바라보노라면
저 시가 나를 비웃는 듯하여
참을 수 없음에 신경질적으로 찢어냈다
구겨진 종이가 나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