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3 전편에 이어 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이야기들을 간단히 돌아보겠습니다. 이집트, 바빌론과 인도에 이르기까지 대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서쪽으로 잠시 눈길을 줍니다. 그곳엔 소아시아의 변방 이오니아 지역이 있었으며 참주들을 보내 다스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오니아에선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페르시아 군대에 대해 이오니아인들은 그리스 도시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만 오직 아테네만 응답을하고 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반란은 페르시아의 진압군에 의해 손쉽게 평정되고 페르시아의 눈총을 받게된 아테네는 보복성 침략을 당할뻔하지만 애매한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만 공격을 받고 폭풍에 의해 페르시아 함대는 철군을 하게 됩니다. 아테네로의 최단거리로 공격루트를 재정비한 페르시아는 다시한번 마라톤 평원에서 대패를 하고 맙니다. 격분한 다리우스 1세는 대군을 보내 그리스 전역을 정복하기 위하여 준비하던중 전쟁비용을 위한 과세로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위해 시간을 소요하다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전쟁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나 봅니다만 신하들의 강요에 못이겨 4년간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그리스 전역 정복을 목표로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합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정예병을 전멸시킨 크세르크세스 1세는 멈추지 않고 그리스 남쪽으로 육해군을 동시에 진격을 시도합니다. |
[세계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3 전편에 이어 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이야기들을 간단히 돌아보겠습니다. 이집트, 바빌론과 인도에 이르기까지 대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서쪽으로 잠시 눈길을 줍니다. 그곳엔 소아시아의 변방 이오니아 지역이 있었으며 참주들을 보내 다스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오니아에선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페르시아 군대에 대해 이오니아인들은 그리스 도시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만 오직 아테네만 응답을하고 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반란은 페르시아의 진압군에 의해 손쉽게 평정되고 페르시아의 눈총을 받게된 아테네는 보복성 침략을 당할뻔하지만 애매한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만 공격을 받고 폭풍에 의해 페르시아 함대는 철군을 하게 됩니다. 아테네로의 최단거리로 공격루트를 재정비한 페르시아는 다시한번 마라톤 평원에서 대패를 하고 맙니다. 격분한 다리우스 1세는 대군을 보내 그리스 전역을 정복하기 위하여 준비하던중 전쟁비용을 위한 과세로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위해 시간을 소요하다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전쟁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나 봅니다만 신하들의 강요에 못이겨 4년간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그리스 전역 정복을 목표로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합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정예병을 전멸시킨 크세르크세스 1세는 멈추지 않고 그리스 남쪽으로 육해군을 동시에 진격을 시도합니다 |
[세계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3 전편에 이어 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이야기들을 간단히 돌아보겠습니다. 이집트, 바빌론과 인도에 이르기까지 대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서쪽으로 잠시 눈길을 줍니다. 그곳엔 소아시아의 변방 이오니아 지역이 있었으며 참주들을 보내 다스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오니아에선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페르시아 군대에 대해 이오니아인들은 그리스 도시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만 오직 아테네만 응답을하고 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반란은 페르시아의 진압군에 의해 손쉽게 평정되고 페르시아의 눈총을 받게된 아테네는 보복성 침략을 당할뻔하지만 애매한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만 공격을 받고 폭풍에 의해 페르시아 함대는 철군을 하게 됩니다. 아테네로의 최단거리로 공격루트를 재정비한 페르시아는 다시한번 마라톤 평원에서 대패를 하고 맙니다. 격분한 다리우스 1세는 대군을 보내 그리스 전역을 정복하기 위하여 준비하던중 전쟁비용을 위한 과세로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진압하기위해 시간을 소요하다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전쟁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나 봅니다만 신하들의 강요에 못이겨 4년간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그리스 전역 정복을 목표로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합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정예병을 전멸시킨 크세르크세스 1세는 멈추지 않고 그리스 남쪽으로 육해군을 동시에 진격을 시도합니다 |
[세계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3
4.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
살라미스 해전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중심으로 다르돌고하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살라미스 해전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니었다면 존재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며 이에대한 부분은 테미스토클레스 (기원전 524 ~ 459년)의 관해 지금부터 이야기 하는
부분을 들어보면 알 수 있게 될것이다.
아네테의 장군이자 집정관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즉흥적 상황 판단과 전략이 아주
뛰어난 속된 말로 더듬이가 발달된 전쟁의 신이었으며 강력한 리더십과 거시적인
안목도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스어로 장군은 스트라테고스(strategos)’라고 하며 크세르크세스 1세가 침략을을 하자
아테네의 해군 장군으로 춘전하게 되며 전략을 뜻하는 단어 ‘스트래티지(strategy)’는 바로
테미스토클레스 장군 ‘스트라테고스(strategos)’에서 그 어원이 시작되었다.
바로 고대 서양 전쟁사에서 제대로된 전략이란 것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지난편을 통해 우리는 테미크레스가 음모를 꾸며 정적 이리스티데스를 제거한 사실을 알고있다.
그 하나의 사실만 놓고 본다면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로 보일 것이다.
사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인생 전반에 걸처 반대 세력들이 많았고 특히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치루면서
이들과 반목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는 결과가 옳을 수 있다면 일종의 술수나 음모 또는 관점에에 따라 전략을 시기적절하게
구사할줄 아는 인물이었다.
지금부터 테미스토클레스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그 후에 인생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라톤 전투에서 당대 최강의 육군인 무적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육군증강론자인 밀티아데스가 실세를 잡게 되며 약한 육군 증강에 주력을 하고자한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관점은 달랐다.
그의 판단으로는 페르시아를 상대로 육전에서 승리를 거둔겄은 훌륭했지만 당시 페르시아가 보낸
병력의 규모는 변방 이민족들에 대한 정찰 규모의 병력이었으며 대제국인 페르시아는 여력이 충분할 뿐더러 현재의 아테네가 감당하기 힘든 페르시아의 대군의 재침입이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이 판단은 크세르크세스 1세의 원정군 규모를 볼때 옳았음을 알 수 잇다.
당시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끈 원정군은 해군 15만 육군 20만의 대군이었고
상대적으로 아테네는 노예와 간난아기까지 포함하여 20만여명으로 모든 인구를 모아도
이를 훨씬 웃도는 규모였다.
또한 페르시아의 육군은 육전에선 최강의 군대였으며 마라톤 전투 이전까지는 패배를 모르던
강군이었으나 해전의 경험이 적어 두번의 그리스 원정 동안 번번히 폭퐁에 시달리며 악천후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이와는 반대로 아테네는 해상 무역으로 인한 항해기술과 경험이 풍부한 상태였기에
페르시아를 상대로 약한 육군을 보강하는 것은 큰 효과를 보기 어려웠으며 아군의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해군력 증강만이 향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로인해 육군증강론자인 밀티아데스와 번번히 의견 충돌을 보게되며 그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물론 그의 뜻대로 해군증강에 의견이 일치했다고 해도 해군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사서 출병하는
육군과는 달리 배를 건조하는 비용 마련이 문제기도 했다.
그러던중 밀티아데가 세상을 떠나고 테키스토클레스와 온건파 귀족인 이리스티데스가 함께
아테네를 이끌게 되면서 육군이고 해군이고간에 안정적 평화를 유지하자는 온순하고 친절한
성품의 명문출신 이리스티데스와 충돌은 어쩌면 당연한건지도 모른다.
이분이 아테네의 이순신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이다.
그는 이리스티데스를 인간적으로는 싫어하지는 않았던것 같았으나 어찌되었든
음모를 꾸며 제거하게 되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페르시아의 재 침공이 있기 3년전인 483년 아테네의 모든 시민은 희소식으로
열광하고있었다.
국유지에서 질좋은 은광이 발견된것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은광의 발견에 시민들이 왜 열광을 하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는 정부 재정을 함부로 확대하지 않고 이런경우 시민들에게 골고루
배당을 해주는 이상적인 국가였다.
현대 국가에서는 나오기 힘든 아주 이상적인 국가다
국가가 이익을 보면 재정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국민들에게
배당을 해준다면 그 어느 나라 국민이 또는 도시의 시민이 국가와 도시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겠는가?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팔아 큰 이익을 보았다고 한다.
그 이익금 중 일부를 국민들에게 배당하였다고 하는데 현대에도
아직 이런 나라가 있어 부럽기만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은광에 대한 수익금을 시민들에게 배당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으로 3단 갤리를 대량건조하고 싶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온건파 이리스티데스와 충돌을 빚게되고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이용한 음모를 꾸며 이리스티데스 스스로 해외 망명을 가게 만든다.
은광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최신의 3단 갤리를 대량으로 건조하자!
당시 아테네는 3단 갤리에 비해 속도나 크기가 작아 전투에서 위력이 떨어지는 50 여척의
펜테콘테선만 보유한 상태였다.
현대로 보면 경비정만 50척 있는대 대형의 전투함을 200척이나 대량 건조하자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배당금 안주고 밀리터리 놀이에 비용을 소모하겠다는 발표에 시민들의 반발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치력이 뛰어난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규모 국방 사업에 대한 두가지 이유로 시민들을
설득하였다.
" 마라톤에서 이겼지만 페르시아가 또 처들어오면 그때 경비정 가지고 나가서 경비설래?
그리고 군함 많이 건조해두면 향후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위상이 올라가고 주변 해적들도 때려잡아서 해상 무역을 더 쉽게 할수 있거든"
테미스토클레스의 이제안은 정적들이 제거된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강력한 리더십으로 통하였고
사실 페르시아의 재 침입이 있게 된다면 믿을 사람이라고는 현재로서는 남아있는 테미스토클레스 밖에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건조한 이 전함들은 3년뒤 아테네 철수에서 시민들을 구하고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와의 싸움에도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아텐네 원정을 강요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크세르크세스 1세가 무시하고 평화를 선택하였다면
역사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를 음모를 꾸며 정적을 제거하고 시민들에게 돌아갈 배당금을 주지 않고
엉뚱한 곳에 사용한 독재자이며 협작 정치가로 기록하였을것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페르시아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재 침공을 하였고
테르모필레 전투마저 패한 상태에서 그는 입지를 더욱 굳건하게 다다.
육전에서 승리한 페르시아군은 저항없이 아테네까지 진격을 하게 되며
이에 놀란 시민들을 테미스토클레스는 부상자와 여자부터 살라미스 섬으로 철수 시킨 후
나머지 시민들을 3년전에 건조한 3단 갤리에 태우는 대규모 해상 철수 작전을 시도한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철수 작전은 한국전쟁으로 일컬어지는 625전쟁 당시 흥남 철수였다고 한다.
중장비와 차량 군대 그리고 시민들을 철수시켜야 하는 대규모 군사 작전이다
그러나 아테네 20만 시민을 철수 시키는 이 작전 역시 그에 못지 않는 최대의 군사 작전이었을 것이다.
텅빈 아테네를 무혈 입성하는 육군에 비해 페르시아의 해군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아르테미시움 지역까지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많은 수의 군대와 배를(400 척)
잃게 되며 또한 그들은 아르테미시움에 도착해서 전투를 벌였을 때 다시 배를 많이 잃게 된다.
손실된 배는 에게해 지역에서 항복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배로 충당하게 되지만
육군에 비해 오랜기간동안 진형 훈련 및 전술훈련이 필요한 해군으로서는 이 보충은
단순히 수만 채운 것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아르테미시움에 주둔해있던 그리스 해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전 소식을 접한 후에는
자신들 국가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퇴각하여 살라미스 섬으로 이동하게 되며
아테네 시민 철수 작전에동원된다.
또한 이들의 철수로 페르시아의 해군도 진격을 시작하여 육군과 합류하게 된다.
드디어 살라미스 해전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지만 아쉽게도 지친 해군 때문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2주간이나 전열을 가다담으며 휴식을 취하고 만다.
그만큼 바다의 익숙하지 못한 해군의 고생이 심하였다는 것이고
이 기간 역시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시기적 기회를 제공하게 된 원인중 하나가 된다.
바다에 익수하지 못한 해군?의 재정비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타이밍에 따라 즉흥적인 전략을 생각해내는 임기웅변에 달인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제대로 발판을
마련해준 셈이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교훈으로 그리스인들의 군사작전에서 전략 수립은 타이밍과 즉흥성을 중요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아테네시민들이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한 후 그리스 연합군은 4차례나 작전회의를 열었다.
스파르타 측은 살라미스 섬 인근까지 페르시아 함대가 진경해 왔으니 스파르타와 가까운
코린트 해협으로 해군을 이동 시키자고 주장하였고
이는 그들의 영토 스파르타 보호에 대한 뜻도 담겨있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그곳으로 해군이 퇴각할 경우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해 온 아테네 시민들이 페르시아 군의 희생양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그리스 연합군에서 해군은 아테네가 많아 테미스토클레스의 발언권이 높았지만
총 사령관은 스파르타가 맡고 있었기에 소모적인 회의는 4차까지 진행되면서 장기화되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고민에 빠진다.
그는 몰래 회의 장소를 떠나서 그리스 함대가 살라미스 섬에 남도록 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
아주 위험한 발상을 하고 만다.
"그리스의 연합 해군이 철수하기 전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끌어들이면 철수는
포기해야만 하고 선택의 여지 없이 살라미스섬에 주둔하여 그리스 연합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전투를 벌여야만 한다. 페르시아를 움직여 살라미스 섬을 한시라도 빨리 공격하게 하자"
그리스 연합 해군의 방어선 이동을 막기 위해 그는 오히려 페르시아 군의 공격을 끌어드이는 위험한
발상을 하고 그것을 망설임 없이 실천해 버린다.
만일 그의 이 작전으로인해 그리스 연합군이 패하게 된다면 그는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될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의 페르시아 출신 충복을 불러 크세르크세스 1세를 자극할 말을 전단한 후
아무도 모르게 보낸다.
그의 충복은 성실히 임무를 수행한며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스 군의 연합이 와해되고 있으며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끄는 해군이 살라미스섬을 공격한다면
손쉽게 이길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 연합군의 코니트해협으로의 방어진 이동이 곧 있을것이다"
이이야기를 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가 코린트 해협으로 방어진을 이동하면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해군들이 항해를 하는 동안 또 지칠것을 두려워하여 즉시 공격을 감행하고 만다.
해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사실이 그러하였고 이는 군함인
갤리선을 거대하게 만들게되어 또 하나의 패인이 된다.
보통의 해전은 거함 거포가 유리하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살라미스 해전과 로마와 카르타고의
해전 이후 4단 갤리 이상은 군함으로 실전에 투입되지 못한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군함은 4단 갤리이상으로 3단 갤리보다 거대하였다.
전함을 거대하게 만든 이유는 전투에 유 불리를 떠나서 적벽대전 당시 해전에
익숙하지 못한 북방의 병사들을 위해 연환을 사용한 조조를 떠올리면 이해가 될것이다.
여하튼 3단갤리와 5단 갤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단락에서 하도록 하겠다.
페르시아 해군은 야간에 기동을 시작하여 새벽녘에 살라미스 협수로로 진입하였다.
이 시간에 그리스 연합군은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 함대가 협수로로 진입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회의는 즉각 중단되었고 선택의 여지 없이 살라미스에서 일전을
불사하게 되었다. 기원전 480년 9월 28일이었다.
그리스 군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전투를 한눈에 보기위해
아이가레오스 산에 올랐고 그의 주변에서는 신하들이 그리스 전함을 누가 제일 많이 부시는지
적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300 여척의 그리스 연합 함대와 1200 여척의 페르시아의 함대가 드디어 살라미스 해협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페르시아 해군은 함대중 일부를 살라미스 섬을 우회하여 그리스 군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남은 함대는 살라미스 섬 앞의 작은 섬 때문에 두 부대로 나누었다.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함대가 들어갈 동안 그리스 연합군은 전선을 가다듬고 있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선두에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함대를, 중앙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점령지 함대를, 그리고 왼쪽에는 이오니아와 갈리아의 함대를 배치하였는데,
모두 1200 척이었다. 이에 대응한 그리스 함대는 300척으로 3열로 늘어 세우되
왼쪽에 아테네와 코린트 함대를 배치하였다.
페르시아 함대의 전술은 대함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유인하여 넓은 해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측에 가담한 페니키아 함대는 살라미스 협수로의 입구인 Saronic 만에 배치되었다
이때 그리스 함선 몇 척이 페르시아 함대 정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페르시아 함대를 보고
겁먹은듯 급히 해협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페르시아 함대는 맹렬히 그리스 함선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는데 페르시아 함대의 배들이
해협안에 진입하지 그리스군은 배를 빨리 선회하여서 먼저 공격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은 청동으로 만든 배의 머리 즉 선수에 달린 충각으로 들이 받아서
적 함에 구멍을 뚫어 전함 기동과 함대의 전열을 흐트러 뜨리는 것이었다.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함선들을 부시기 시작 하였고 페르시아 함대를 둘러쌌다.
페르시아 군이 퇴각 하려해도 뒤에 있던 페르시아 군에 막혀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고
북쪽에서는 페니키아의 이오니아 함대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충돌하였다.
이렇게 되자 길이 7km, 너비 2km 밖에 안되는 살라미스 협수로에 양측의 함대 1500 척이
뒤엉키게 되었다.
결국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 함대는 상대적으로 해전에 익숙하지 못하였기에 기동이 어렵게
되어 200척이 침몰되고, 4만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반해 그리스 함대는 40척의 함선을 상실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전투가 끝날 즈음에 자리에 일어나서 해전에서 패한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원했던 전쟁도 아니었고 소기의 성과는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테네 점령을 통해서이미 이룬 상태였다.
그는 퇴각을 결정하고 일부 병력을 제외한 페르시아 대군의 철수를 명령한다.
다음날 아침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해군이 헬레스폰트 해협 쪽으로 퇴각하고 있으며
육군도 후퇴 중이라는 보고를 접하게 되면서 또다시 연합군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는 지난번과는 달리 철수하는 페르시아의 배후를 추격하여 공격할 것인가였다.
이전 회의에 비해 상당히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변하였지만 아직도 페르시아의 군세는
상당하였기에 결국 페르시아군 추격전을 포기하고 에게해의 여러 섬을 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그리스 연합군은 그리스 반도와 에게해,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진입하여 델로스 동맹에 가입시켜 이후 아테네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한편 살라미스 해전 직후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육군이 기원전 479년 6월
보에오티아로 진격하자 아테네는 시민을 살라미스로 다시 철수하였고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페르시아 육군에 맞서서 플라타에아전투를 벌이던 중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에서 퇴각을 하였다.
이로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긴 전쟁은 끝을 내고 전쟁이 끝날 무렵 아테네 인들은 아테네 제국의
초석을 만들어 갔고 아테네는 곧 지중해의 힘 있는 국가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 해군은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매년 9월 12일에 기념식을 연다.
반면, 페르시아 제국은 전투 이 후에 쇠약해져가면서 잦은 식민지 지역 반란을 겪으며 150년 더
지속 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5. 3단 갤리와 5단갤리의 싸움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한편 페르시아와의 살아있는 전쟁 영웅 템;스토클레스의 위상은 그리스 전역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또다른 예측을 하고 만다.
전통적 군사 강국이며 그리스의 패권 국가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막강한 해군력으로
입지가 높아진 아테네의 전쟁이 그것이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을 대비하여 아테네의 도심과 항구를 둘러싼 이중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해상무역을 통해 들어오는 식량과 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기간동안 연합군을 형성하여 많은 스파르타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던 그가 스파르타를 가상 적국으로 삼고 전쟁준비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지만 확실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네테가 두꺼운 성벽을 쌓고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스파르타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의 약점은 바로 공성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방패든 긴창병만 있는 스파르타에게 공성전은 그저 포위하여 지키는 것이 전부로
이것마저 아테네가 전쟁 물자를 비축해서 버티면 해결 할 수 잇기 때문이다.
이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첩자를 보내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스파르타와 손잡고 페르시아와 내통하고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아테네의 시민들은 도편추방제를 통해 테미스토클레스를 해외로 추방 시킨다.
정적을 도편추방제를 이용한 음모로 추방한 적이 있던 그에게 이번 경우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소문을 사실로 받아 들인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
지친 시민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무한한 영광을 누려야할 전쟁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불해히도 망명 중 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하며
아테네 시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추방하고 20년 뒤에 그의 예측대로 스파르타의 공격을 받고
항복을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오늘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내요을 다루었다.
다음편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전투 속사정을 이야기해보겟다.
다음편 주요 단락
5. 3단 갤리와 5단갤리의 싸움
6. 전쟁이 남긴 결과 알렉산더 대왕
원보글 출처 내 블로그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름 모를 네이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