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세계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1
게시물ID : history_77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바람
추천 : 11
조회수 : 166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2/18 10:55:35

세계 3대 해전은 누가 선정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3대 해전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살라미스 해전, 트라팔가 해전, 한산 대첩을 꼽을 것이다.

선정 기준이 극히 주간적인것처럼 보이지만 나름 선정의 이유는 있다.

단지 규모가 크고 큰 승리를 얻어 전투사에 교본으로 쓰여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 해전의 승패에 따라 세계 정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카테고리에서는 전쟁사를 시간 날때마다 이야기를 하겠는데

시대순으로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중 테르모펠레 전투와 전쟁을 종지부 찍으며 서구문명에

큰 영향을 준 살라미스해전을 먼저 다루겠다.

 

문명의 충돌 이오이나반란

기원전 499년 경 당시 가장 번성했던 문명국으로서 바빌론과 이집트까지 지배하고있던

대제국 페르시아 입장에선 변방의 야만지역 이오니아라는 지역은 큰 관심은 없었던것 같다.

다만 지리상으로 가깝기에 지배력이나 좀 행사하고자 참주 들을 보냈는데 이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소아시아의 일부분인 이오니아는 청동기 문명이 시작되었던 지역으로

페르시아의 생각처럼 아주 야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서구 세력이

시작되는 그리스의 입장에서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 또는 ‘동방의 땅’으로

묘사되는 문명의 시발지 오리엔탈 지역이었다.

이곳은 현재 터키,시리아,그루지아등이 위치한 곳으로

지리적 특성상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민족이동의 통로이자

식민활동의 무대였으며 예로부터 갖가지 문명이 꽃피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도시 에리두도 이지역 근처인 소아시아에서 생겨났었다.

그러나 현재 이란 지역이 근거인 페르시아가 볼때는 지방 변두리였을 것이다.

지리상으로 그리스(발칸반도)에서 가까웠던 이곳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의 지원을 받고

페르시아에서 보낸 참주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참주들이 뭔 잘못을 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소아시아 전체가 봉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이당시에 이지역은 페르시아보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영향력이 조금더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변방의 반란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를 진노케하였으며 육군과 해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지역의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일부 기록에서는 다리우스1세는 선전 정책의 일종으로 이지엑에 대해 어느정도 유화적인 정책을 행하였다고 하는데 이분도 그의 아들 크세르르크세스1세처럼 관대하씨 부류일지 모르겠다.

최초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충돌은 페르시아의 압승으로 정리되었고

전후 처리를 하던 다리우스1세는 반란의 배후세력인 아테나이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이

무척이나 괘심했을 듯 싶다.
마을이나 만들어서 나라라고 행세하는 야만족 연합에 대한 응징을 결심한 다리우스1세는
기원전 492년 첫 그리스 정벌을 위한 원정군을 보낸다.

 

 

해군과 육군으로 나누어진 대규모 정벌군은 승승장구하며 그리스 본토를 향해 진격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의 해도나 그리스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페르시아는 해안선을 따라서
한참 돌아서 진격을 해야만 했다.

 

변방 국가인 그리스가 어딘지도 잘 몰랐을 뿐더러 당시 바닷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리라
해군은 에게해 해안의 해안국가들을 휩쓸었고 육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케와 마케도니아로 진군해 이곳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기세좋던 페르시아 해군 선단은 폭풍을 만나 힘한번 못써보고 몰살 당하고 만다.

 

기록에서는 약 300척의 배가 침몰하고 20,0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군은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와야했고 이 정벌이
과연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공격 루트를 변경한 다음 정벌에 의해서
페르시아도 반성을한 정벌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그리스를 향한 정벌은 다시 시작되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아테네 응징이 목표지만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그리스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진격하였다.

기록에는 갤리선 600척과 20만에서 5만여명의 병사로 나왔있는데

 

아테나와의 전투 기록과 갤리선의 숫자를 살펴보면 5만의 군대가 정확할것 같다.

이번의 공격 루트는 지난번처럼 해안선을 따라서 한없이 진격하는 방식이 아닌

소아시아와 아테네 사이의 섬과 섬을 징검다리로 이용하여 아테네 근처 발칸반도

끝 부분까지 진격해 들어가는 최단거리를 택하였다.

 

아마도 이전 원정에서 관련된 지리 보를 수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스파르타는 거절을 하고만다.

거절 사유가 종교적인 이유라고 하는 부분도 있지만 페르시아의 목표가 아테네였고

스파르타로서는 이를 큰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것 같다.

최단거리 루트를 이용한 페르시아의 함대는 아테네와 가까운 마라톤 평원 인근 헤안에 병력의 반을

상륙 시키고 나머지 병력을 배에 실고 아테네로 출발한다.

육지와 바다 두 곳에서 포위 섬멸하려는 작전이었을 것 같다.

당시 아테네의 군대는 1만의 창병이 전부였고 이들은 비장한 각오로 마라톤 평원에 집결하였는데

뚱딴지 같이 페르시아군이 반만 상륙하고 나머지 반을 배에 태워 아테네로 향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도시 시민군인 이들은 자신들의 아테네가 빈집 털리는 꼴을 당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마음이 급해졌을듯 싶다.

아테네와 마라톤 평원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지는 다들 거리를 알것으로 본다.

빈집 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평원에서 이기고 아테네로 병력을 보존해 가야만 하는

절대 절명인 것이다.

 

두 세력은 드디어 역사적인 마라톤 평야에서 사활을 건 대회전을 벌이게 되었다.

대회전은 두 세력이 평원같은곳에 만나서 진을 치고 일거에 맞붙는 대규모의 전투를 지칭한다.

아테네군은 길게 창병을 배치하고 좌우 양날개에 최정예군을 배치했다.

다양한 병종이 있는 페르시아군은 창병만 있는 상대방 진영을 보고 아연 실색하였으리라.







 

 

 

 

눈에 보이는 적은 오직 방패든 창병이다.

궁병도, 보병도, 기병도 없이 아테네 군은 오직 창병만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긴 창...

 

우리가 영화 300에서 보던 투창 같은 형태의 짧은 창이 아닌 엄청난 길이의 창으로

팔랑크스라는 진형을 이룬 아테네 군을 본 페르시아군은 뭐 저런 야만인들이 다있나 했을 것같다.

보통의 창병 위주 진형은 앞이 강하고 옆과 뒤가 약하며 기동력이 떨어진다.

특히 아테네의 이 팔랑크스 진형은 더더욱 앞은 무척 강하고 옆과 뒤가 약한 진형이다.

따라서 기동력이 빠른 기병을 옆이나 뒤로 보내면 진형이 쉽게 무너지게 된다.

옆과 뒤의 약점을 방어하기 위해서아테네 군은 아주 길게 늘어서고 측면 공격이나 뒤로 돌아오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좌우에 정예병을 배치한 것이다.

이 전술은 효과를 보게되서 전투가 시작되자 아테네군의 중앙이 밀렸으나 오히려

좌우의 정예 부대가 페르시아군을 협공하는 형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일종의 학익진이 자동으로 발동한 것이다.

 

아테네군의 전사자는 200명 남짓, 페르시아군은 6,400이 전사했고 바다쪽에서

아테네 해군도 페르시아의 함대를 막는 데 성공하여 페르시아는 후퇴하게 된다.

물론 아테네 육군들도 42.195 KM을 달려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돌아간간 뒤였다.

이 전투의 승전보를 가지고 아테네로 먼저 달려온 한 병사에 의해

올림픽에서 마라톤이 열리게 된다.

한편 패전국인 페르시아 현 이란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등에서 마라톤 경기 출전을 하지 않고 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그리스 국가들도 페르시아를 상대로 연합하여 싸우면 승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페르시아에 굴복했던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편으로

돌아서게되었다.

 

불패의 페르시아 정규군의 육전 패배는 페르시아로서는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고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의 약화를 우려할 처지가 되었다.

마라톤 전투 이후 스파르타에서는 레오니다스가 권좌에 올랐고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강경민중파와 아리스티데스의 온건귀족파로 나뉘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군비증강에 따른 자력방위론을 주장하는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활용하여 정적인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하고 정권을 잡은 후 광산수익을 국고에

귀속시키고 군비증강에 힘썼다.

도편추방제란 조개껍데기에 추방하고 싶은 사람 이름을 적어서 투표함에 넣는 방식의

추방자 뽑는 투표로서 테미스토클레스는 글을 모르는 노인을 시켜 정적인 아리스티데스에게

자신은 글을 모르니 아리스티데스를 추방 할 수 있도록 대신 써달라고 부탁을 하게 시켰다.

아닌밤중에 홍두깨처럼 멀쩡히 길가다가 자신에게 자신을 추방하게 써달라고 부탁하는 노인을 만나게 된 아리스티데스는 맨붕에 빠져 스스로 아테네를 떠나 해외로 나가고 만다.

 

한편 페르시아의 재침공이 점차 현실화 되자 북부의 일부 그리스 국가는 페르시아에 항복을 하고

페르시아의 편으로 붙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몇몇 그리스 동맹국은 서로 반목을 그치고 페르시아의 위협 앞에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복수의 칼을 갈고있던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재침공 준비에 나섰으나 때마침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의 반란때문에 준비가 늦어졌고 기원전 485년 다리우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관대한 크세르크세스 1세가 제위에 오르게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고 대략 4년에 걸친 전쟁 준비

이후 그리스 공략에 나섰다

 

나름 전쟁 준비가 열심이었던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과 아버지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크세르크세스1세의 페르시아는 영화 300과 세계 3대 해전인

살라미스 해전을 치르게 된다.

내용이 길어져 나머지는 다음에 올리도록 한다.

 

원보글 출처 : 내 블로그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름모를 네이버 블로그, 오유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