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을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는 것처럼 ‘새벽이 됐다. 먹어야겠다.’ 는 무의식이 나를 잠식했다. 사실 그리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마치 종소리를 들은 파블로프의 개가 질질 침을 흘리듯 물을 올렸다. 가스 꼭지를 틀고 탁, 탁, 손잡이를 두 번을 돌린 후에야 불은 켜졌다. 물을 붓자 달아오른 냄비에 닿았다. 치익, 증기를 뿜으며 냄비를 식혔다. 서랍장을 열어보니 있는 라면이라곤 신라면 뿐이다. 옘병할 농심,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라면 시장의 농심 점유율을 생각하며 빡은 치지 않기로 했다. 서둘러 라면 봉지를 뜯어 건더기 수프를 아직 끓지 않는 물에 털어 넣었다. 김치를 먼저 넣을 생각에 열어본 냉장고 문엔, 얼마 전 설렁탕을 포장할 때 딸려온 썰린 파 봉지가 있었다. 김치와 함께 꺼낸 파봉지를 얼마 되지 않으나마 죄다 물에 던져 넣었다. 물엔 기포가 조금씩 생겨오기 시작했다.
간에 좋은 황태를 넣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꾸득꾸득한 황태 살이 라면물을 흡수할 것이라는 생각이 이내 떠올랐다. 면발을 집어먹고서 황태가 젓가락에 잡힐 무렵이면, 황태는 아마 라면 국물을 잔뜩 머금고 고혈압을 유발하는 개자식이 되어 있을 양이었다. 황태는 술 마시고 돌아온 아침에 넣기로 했다.
고춧가루와 김치가 들어간 물은 붉게 끓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면발을 집어넣은 나는 아차 싶었다. 스프를 넣지 않았지만 물의 빛깔에 착각한 것이다.
‘면보다 스프를 먼저 넣어야 맛있는데....’
새벽 급히 끓이는 라면에 이런 후회를 하고 있는 걸 보니 나도 참 미식가는 미식가였다.
냉장고를 열고 꺼낸 계란을 넣어 풀었다.
센 불에 익힌 라면은 고춧에서 우러남이 분명한 붉은 거품이 있었다. 마치 갓 뽑은 커피의 신선한 크레마처럼. 송송 썰어 올린 부추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자연한 빛깔을 띄고 있었지만, 라면과 부추는 서로의 대비로 서로가 돋보이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들이댔다. 면발의 질이 우수했다. 살짝 설익은 듯한, 그러면서도 국물의 양념을 부족함 없이 머금은 상태였다. 완성된 라면에 올린 부추의 향은 산뜻했고, 적절한 산도의 김치는 국물과 조화를 이루었다. 신라면은 그 특유의 자극적인 맛으로 나를 걸신들린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펼쳐둔 책에 붉은 방울들이 남지 않도록, 조심스레 먹는 라면에도 면은 전혀 불지 않았다. 새벽에 몸속으로 음식을 들인다는 금기가 더욱 나를 황홀하게 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얼굴이 부을 테지, 일어나서 움직여보는 안면 근육에 분명 무언가 뻑뻑한 느낌이 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원래 도취는 짧다. 젊음과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라이언 맥긴리가 찍은 젊음은 그리 황홀하고 잔뜩 향락에 젖은 모습으로 남을 수 있겠는가. 도취를 앞둔 자는 그 뒤의 긴 공허와 허무를 상상하지 않는다. 나는 내일 부은 얼굴을 상상하지 않으리라. 냄비가 있던 책상은 온기가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