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가 터지고 석 달 뒤 9월, 북한군이 우리 군과 미군이 지키는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한창 공세를 퍼붓는 시기였다. 이런 혼잡한 시기에 열여덟 살의 이천우라는 청년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지만 전쟁터로 떠난 형을 따라 자원입대를 한다.
그렇게 입대하게 된 그는 우리 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무사히 지켜낸 뒤 반격에 나서면서 평양 탈환작전과 개천, 덕천전투, 하진부리전투 등에 투입되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으며 군에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고, 결국 1951년 9월 강원도 백석산 탈환을 위한 전투에서 꿈도 채 펼쳐보지 못한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 안타깝게도 그의 분신이었던 형 역시 넉달 빠른 경기 고양의 봉일천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고, 짙은 포연과 강력한 포성 속에서도 서로를 그리워 했지만 재회하지 못한 채 이별해야 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두 형제의 재회가 이루어 졌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작년 10월 백석산 무명 901 고지 능선에서 이천우님의 유해를 찾아내었고, 이미 안장된 형의 곁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두 형제가 돌고 돌아 60년 만에 재회하게 되었지만 현생에서 이루지 못한 재회, 이제라도 나란히 누워 서로를 의지하며 편히 잠들 수 있어 다행이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심으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 두형제의 용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60여 년 전 전쟁터에서 피 흘리며 목숨 바친 모든 호국 영령 분들의 희생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