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한, 빗소리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김혜수, 어디갔니
잃어버린 무선전화기를 냉동실에서 찾았어
어느날 내 심장이 서랍에서 발견되고
다리 하나가 책상 뒤에서
잃어버린 눈알이 화분 속에서 발견될지 몰라
나는 내가 무서워
앞마당에 나왔는데 무얼 가지러 나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괜히 화초에 물이나 주고
시든 잎이나 떼는
그, 짧고도, 긴, 순간
나는 어디로 줄행랑친 걸까
빈집의 적요처럼 서 있는
너, 누구니
내가 혹 나를 찾아오지 못할까봐
환하게 불 켜고 자는 밤
이번 생에 무얼 가지러 왔는지
도종환, 따뜻한 찻잔
맨살에 손을 댔는데 참 따뜻하다
한 손으로 아래를 받치고
한 손을 둥글게 감싸 살에 대는 순간
손바닥 전체를 가득하게 밀고 들어오는 온기
오래오래 사랑스러운 사람은
뜨거운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다
아침부터 희끗희끗 눈발 치는데
두 손 감싸 뿌듯하게 살을 만지고 있다가
공손히 입술을 대는 순간
가만히 눈이 감긴다
몸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르르 녹아내리는
한 잔의 밀애
윤보영, 사랑의 향기
밀봉해 둔 차도
시간이 지나면
그 향이 옅어지지만
뚜껑 없이 담아 둔 그대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해집니다
차향은
밖으로 나가 세상에 담기고
그대 생각은
내 안에 들어와
그리움에 담기고
이기철, 얼음
얼마나 기다렸으면 가랑잎마저 껴안았겠느냐
얼마나 그리웠으면 돌멩이마저 껴안았겠느냐
껴안아 뼈를, 껴안아 유리를 만들었겠느냐
더는 헤어지지 말자고 고드름의 새 못을 쳤겠느냐
내 사랑도 저와 같아서
너 하나를 껴안아 내 안에 얼음을 만들고야 말겠다
그리하여 삼월이 올 때까지는
한 번 낀 깍지 절대로 절대로 풀지 않겠다
아무도 못 말리는 지독한 사랑 한 번
일어서 일어서 해보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