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파도
모래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바닷가
나는 보았습니다
파도들이 달려올 때는 옆파도와 단단히
어깨동무한다는 것을
손에 쥔 하얀 거품이
모래밭을 덮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온몸을 하얀 거품 손에 감춘다는 것을
파도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문근영, 그대 강가에 설 때
그대 강가에 설 때
푸른 바람으로 설게요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대 창가에 쏟아져 내리는 별처럼
무지갯빛 꿈결로 다가설게요
어젯밤 꿈속 그 환한 웃음처럼
깊어가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게요
나뭇가지 흔들리는 산언저리에 서면
영롱한 한 줄기 빛으로
따사로이 내려앉아
그대 밝혀줄게요
뜻 모를 그리움이 밀려오면
수런대는 생각을 건너
올올이 풀어내는 추억 속에
한 조각구름으로 머무를게요
서숙희, 비
아무도 없는 밤을 누가 톡톡 두드린다
창문을 활짝 열고 귀마저 환하게 연다
늦도록 불 켜진 창에 빗금들이 깃을 부빈다
가볍게 스치는 여린 물빛의 느낌표들
빗금과 빗금 사이 번짐이 함뿍 젖어
투명한 울먹임으로 가슴에 스며든다
뒤척이는 한 영혼과 명징한 빗소리가
적막이라는 따스한 둘레 안에 깨어서
가만히 밤을 넘고 있다, 서로를 기댄 채
신경림,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러운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박상철, 나는 너무 관념적이었다
사랑의 아픔 때문에 삶을 버린 이의 기사를 읽으며
고귀한 삶을 그렇게 버렸다고
난 그를 비난했었다
이제 그를 비난했던 지난날을 후회한다
사랑이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몰랐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떠나간 후 어떠한 가치도
그에겐 더 이상의 삶의 이유가 될 수 없고
그 무엇도 사랑이 떠난 그 자리를 메꾸어 줄 수
없다는 걸 몰랐었기 때문이다
선택을 앞에 두고 몸을 떨어야 했을
그 고뇌의 무게를 재지도 못하면서
그를 비난했던 나의 어리석음
나는 너무 관념적이었다
미안하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