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책의 배경
아관파천은 고종의 신변 안전이 보장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와 왕권의 실추라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특히나 민중들이 느낀 고종에 대한 실망감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고종은 환궁을 결심했고 이와 함께 기존에 실추된 위신을 다시 세우고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을 이용한 자주 국방의 강화를 이룰 필요가 있었죠.
이러한 배경에 따라 대한제국 기의 군제 개혁은 주로 아관파천 이후 단행된 러시아 군제를 지방에까지 확산시키고 중앙군 및 지방군을 정예 화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써 진행되어 나가게 됩니다.
2. 정책의 실행
환궁 약 반년 뒤인 1897년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바꾸고 국호도 대한제국으로 바꾸는 등의 새로운 변화를 꾀합니다. 또한 대한국국제 반포를 통해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세계에 알리고 실추된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 이법, 관제, 행정, 외교 등의 모든 권한을 황제인 자신의 아래로 모두 일원화 시킵니다.
또한 군 통솔권도 자신의 아래로 하여 육해군을 통솔하며 이를 위해 원수부를 새롭게 설치하죠. 새롭게 설치된 원수부는 국방과 용병권을 관리하고 부대의 지휘, 작전계획의 수립, 군대 편성과 교육, 훈련 등의 광범위한 분야를 담당하였으며 이는 원수부로써의 통합과 동시에 그 이외의 의정부 산하의 군부의 임무가 축소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른쪽 건물이 원수부>
우선적으로 지휘체제를 정비한 고종은 이어 중앙군과 지방군 정비에 나섭니다. 우선적으로 중앙군에 대한 정비가 있었는데 이는 기존 보병 중심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시위대에 새롭게 포병 부대 및 기병대대 등을 더해 기동력을 추가함은 물론 화력까지도 보강하였습니다. 그리고 추후에는 군악대까지 추가하는데 이로써 시위대는 보병과 포병, 기병, 군악대까지 갖춘 종합 전투부대로써 새롭게 탈바꿈하게 됩니다. 물론 군제에 있어서는 아직 러시아식 군제를 따랐다는 점에서 군제의 독립까지는 이어지지는 못하였지만 종합 전투부대가 탄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대한제국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죠.
시위대의 정비는 단순히 친위부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도성 수비를 담당하던 시위대로까지도 이어졌는데 이도 이전에 있었던 친위부대 시위대의 정비 과정과 비슷한 순서를 따릅니다. 기본적인 보병 부대에 이어 공병대와 치중병대 등이 새롭게 추가되었던 것이죠.
이렇듯 중앙군에 대한 정비와 강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이어 지방군에 대한 정비 및 강화가 이어집니다. 일단 지방대와 진위대로 이원화되어 있던 지방군의 통합이 우선시 되었는데 이는 지방대의 유동적 성격 탓에 따르는 지휘계통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리고 단발령 폐지 후 전국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어 가고 있다는 배경도 중요하게 작용한 탓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지방군은 1899년에 발표된 ‘진위대 지방대 편제 개정’에 따라 진위대로 통합 작업에 들어갔는데 이는 기존의 지방대를 진위대로 개편하는 방안으로 나아갔습니다. 또한 군제에 있어서도 러시아 군제가 이때 지방군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는데 이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군제를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이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어느 진위대 병영>
이러한 통합작업은 1900년에 이르러 완료되었으며 이로써 대한제국은 중앙군의 시위대, 지방군의 진위대로 완전한 이원적 체계가 완성되게 됩니다.
한편 고종은 중앙군과 지방군의 정비 이외에도 지방에 설치되었던 포대를 정비하고 확대하며 이와 더불어 포군을 증설하는 작업에도 착수하였는데 이는 각 지역의 주요 지역에 영국 및 서구으로부터 구입한 각종 포들을 설치하고 이에 필요한 포수들을 모집하여 ‘보호포수’라는 새로운 포군 조직을 조직하는 것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계획은 1904년을 기점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1905년에 들어 일본의 재정고문관이 취임하면서 좌절을 겪게 되는데 이는 국방과 관련된 예산이 대폭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그나마 줄어들었던 예산마저 완전히 삭감되게 되면서 고종의 국방력 강화를 위한 노력은 완전한 좌절을 겪게 됩니다.
3. 정책의 한계
아관파천 이후 도입된 러시아 군제의 보편화와 중앙군 및 지방군 정비를 통한 정예 부대화는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무장 수준에 있어서도 이전의 화승총으로 무장했던 조선군이 아닌 러시아제 베르단 소총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맥심 기관총과 같은 고성능 기관포에 속사포 등을 갖출 정도로 상당한 발전을 이룬 상황이었습니다.
<대한제국군 주력 소총 베르던 소총>
<영국제 맥심 기관총>
고종의 노력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 야욕에 의해 좌절을 맛보게 되는데 이는 1905년 일본의 재정고문관이 취임하면서 대한제국의 군사력 해체작업을 위해 급격한 예산 삭감을 당하게 되며 이후 1907년에는 군대 해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결국 열심히 키웠지만 정작 필요할 때에는 써보지도 못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 시기의 가장 큰 한계점을 바로 부족했던 시간과 군사력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끌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활용을 못한 집권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군사력이 갖추어졌지만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식민지의 단계를 밟아가는 단계에 들어선 뒤였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서로 자신들의 이권 챙기기에만 바빴던 당시의 집권층들로 인해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보고 군대가 해산 당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점이서 이 시기의 한계점을 저는 시간과 집권층이라고 보았습니다.
p.s. 이것으로 고종의 군제 개편과 관련한 연재는 끝났습니다. 후딱후딱 올리고 다음 글을 올리자는 생각이 있었는데 방학이 절 늘어지게 만드는 군요... 아무튼 매번 눈팅과 댓글만 간간히 달다가 처음 시도해본 연재였는데 무사히 마치는 거 같아 개인적으로 즐거웠던 거 같습니다. 물론 요 근래 독도와 관련된 논란이 재점화되면서 글이 사라지는 것 같지만요 ㅠ.ㅠ 그래도 매번 추천과 관심을 가져부신 모들 모두 감사합니다. 다음 번에는 이전에도 한 번 이야기 했듯이 고구려왕들의 시호와 관련된 글을 가져와보도록 하겠습니다.
p.s. 그리고 이거 글 하나 올린다고 몇번이나 필터링 단어니 뭐니로 날려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글 한번 쓰고 싶을 뿐인데 승질만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