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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아이가 둘인데 큰 아이가 많이 아픕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가 어렵다고 해요. 그래서 돈이 많이 들다 보니 애 아빠는 항상 바깥 일로 바쁘고, 그래서 친정 엄마가 와서 같이 도와주고 있는데, 처음에는 엄마가 와서 모든 걸 다 도와주니까 부담이 좀 덜어져서 좋았는데 어렸을 때 엄마 밑에서 자라던 제 모습이 애들 모습에서도 보이고 제가 어렸을 때 엄마가 제게 했던 말들이 애들한테 반복되는 게 보이면서 애들이 너무 안쓰러워요. 그래도 저 혼자서 모든 걸 다 짊어지기는 더 힘들어서 엄마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입니다.
또 얼마 전에 셋째를 임신했는데 제가 우울증 약을 먹고 있던 터라서 애에게도 영향이 갔을까봐 낙태를 했어요. 몸조리를 하느라 기도며 정진도 끊어지고 생활이 뒤죽박죽이 되었어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작하고 싶은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법륜스님 :
“어머니의 고마움을 생각해서 ‘어머니, 낳아주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어릴 때는 내가 몰라서 그렇게 상처를 입었지만, 커서 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은 부분이 있긴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결국 어머니가 나를 키워준 것이니 감사한 거예요. 세상 누구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잖아요. 나를 키워줬다는 고마운 요소가 더 크단 말이에요. 그걸 알아야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치유됩니다.
머리로 이해는 되지만 마음에는 ‘나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않았다’ 이런 게 무의식적으로 카르마로 형성되어 감정이 일어나니까 ‘어머니,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걸 자꾸 절하면서 반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꾸 암시를 주면, 처음에는 의식에서 시작되었지만 계속 반복하는 가운데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줘서 원망하던 마음이 점점 작아지는 쪽으로 바뀌고, 억지로 하던 기도가 어느 순간에는 ‘아, 정말 고마우신 분이구나’ 하고 가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실은 복잡한 이야기가 아닌데 우리의 사고방식이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질문자의 아이가 지금 아파요. 아이가 아프다는데 좋아할 엄마는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아이의 병이 나으면 좋겠다고 한다고 그게 나아져요? 아이가 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현실의 아이가 나아지지 않으면 아이를 낫게 하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강화될 것이고, 그게 안 되면 안 될수록 자기 인생은 좌절할 거예요. 현대의학으로 치유가 안 되는 병을 갖고 있는데 그걸 치유하려면 결국은 부처님이나 하느님한테 매달려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기복이에요. 그건 수행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어머니한테 의지해서 해결해야 하고, 어머니한테 의지하다 보니 어머니의 이야기나 행동을 자꾸 보게 되고, 그러면 질문자의 옛날 상처가 또 떠올라요.
내 아이가 장애인이라고 하면 많은 부모들이 이 사실을 싫어합니다. 아이를 낳은 엄마가 아이를 싫어하는데 그 아이를 이 세상에서 누가 돌보려 하겠어요? 애를 낳은 엄마도 싫어해서 버리는데 왜 애도 낳지 않은 수녀님이 그런 애를 한 명도 아니라 여러 명을 모아놓고 보살펴요? 좀 모순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부모가 없어요. 그냥 인물 잘 생기고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 애는 부모뿐만 아니라 남들도 다 좋아해요. 이웃집 아줌마도 ‘아이고, 공부 잘 하더라. 예쁘더라. 말도 잘 듣더라’하고 좋아해요. 그러니 지금 엄마는 없고 이웃집 아줌마만 있는 거예요. 인물도 못났고 장애인에다가 공부도 못하고 말도 안 들어서 온 세상 사람이 ‘아이고, 저런 인간은 그냥 죽어버리지 왜 사냐’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도 제 엄마라면 ‘그래도 너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생명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이렇게 대해줘야 합니다. 이게 부처님이 ‘모든 생명은 불성을 갖고 있다’라고 하신 이야기잖아요. 이것은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안 그러면 무엇 때문에 엄마라 그러겠어요? 이건 엄마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예요.
그러니까 질문자는 아이의 병을 치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하려는 데 사로잡혀 있어요. 이게 장애라면 장애에 맞게 요구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정상인이 100이라는 능력을 갖췄다면 이 아이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80의 능력 밖에 없단 말이에요. 80인 아이에게 자꾸 100이 되기를 요구하면 이 아이는 소위 열등의식을 갖게 됩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스스로 열등의식을 가져도 엄마는 80에 기준해서 ‘너는 잘 하고 있어. 네가 지금 걷는 것만 해도 굉장한 거야, 하느님의 축복이야’ 이렇게 늘 격려를 해야 해요.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요.
그리고 때가 되어서 명을 다하면 기꺼이 보내줄 줄 알아야 해요. 그 불치병을 억지로 끌어안고 90살이고 100살이고 사는 게 좋아요? 또 그런 선천적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살 권리가 없습니까? 밥 먹이고 뭐 해봐야 돈만 많이 들지 비효율적이라고 해서 갖다 버려야 해요? 우리는 그걸 갖다버리려고 하거나 100살이고 1000살이고 살도록 하려 들거나, 이 두 가지만 생각합니다. 둘 다 잘못된 거예요.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생명을 가진 사람은 생명답게 살 권리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될 때까지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5살이든 10살이든 20살이든 자기 명이 다하면 기꺼이 보내줘야 할 것 아니에요? 기독교 신자라면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서 장애 없는 편안한 생활을 가져야 할 것이고, 불교인이라면 다시 몸을 받을 때는 건강한 몸을 받아서 살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 상태로 계속 오래오래 사는 게 뭐가 좋다고 그 난리를 피우느냐는 말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늘 극단에 치닫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살면 뭐 하냐, 비효율적이다’라고 생각하거나, 또 하나는 ‘그래도 오래만 살아라.’ 라고 하죠. 둘 다 잘못된 거예요.
장애가 있지만 그래도 이 아이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잖아요. 그리고 나는 부모로서 이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는 거고, 또 그 아이가 내일이든 모레든 자연히 명을 다하면 기꺼이 좋은 곳에 가도록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왜 울 일이에요? 운다고 그게 해결이 됩니까? 질문자의 심정은 이해가 돼요. 그런데 그걸 갖고 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제가 보기에는 불교신자들이 기독교신자보다 신앙심이 훨씬 뒤떨어져요. 기본적으로 부처님은 이치에 맞게 살도록 가르치지만 현실에 있는 불교 신자들은 거의 99%가 기복입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게 부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전생에 죄가 많아서 장애인이 되었다’고 해요. 전생에 죄가 많아서 장애인이 되었다면 장애가 나쁘다는 거잖아요. 장애가 징벌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거야말로 차별 아니에요? 어떻게 장애가 징벌이에요?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그건 징벌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이에요.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 역시 행복할 권리가 있고 그를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말이에요. 제가 무슨 종교, 무슨 종파든 전혀 차별을 두지 않고 대하는 이유는 불교신자 중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색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교신자라는 게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어떻게 장애인을 전생에 지은 죄의 결과라고 봐요? 그건 차별이에요.
태어남에 의해서 형성된 것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장애아가 태어났다면 엄마는 이렇게 말해야 해요. ‘장애를 가졌지만 너는 너대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엄마는 네가 사는 만큼,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주겠다.’
아이를 일반 학교에 집어넣어서 다니게 만들겠다는 것은 부모의 지나친 욕심이에요. 그건 아이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니 전문가와 상담을 해서 이 아이가 어느 정도까지 훈련을 하고 치료를 받으면 회복이 가능한지를 파악한 뒤 거기에 맞게끔 나아가야죠. 그걸 무리하게 낫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욕심을 그만 부리고 그 아이에 맞게 의사의 처방에 맞게 하는 게 필요해요. 지적장애인도 오랫동안 사랑으로 재활훈련을 하면 못 걷던 사람도 조금은 걸을 수 있어요. 인지능력이 없는 사람도 많은 연습을 하면 인지능력을 약간이나마 키울 수 있어요. 그렇다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 조금 나아지는 것이죠.
그러나 부모가 욕심을 내면 아이가 열등한 존재로 자꾸 생각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걷지는 못했는데 이제 보니까 그래도 조금 한 발 뗄 수 있으니 ‘하하하, 잘 한다’ 이렇게 박수 쳐줘서 아이가 행복해 하도록 해야 해요. 한 발 뗄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하고, 약간 몸을 흔들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하고, 눈도 못 맞추다가 이제 눈을 맞출 수 있게 된 것으로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 아이에게는 그게 행복인데 그 아이가 우리처럼 되기를 원한다면 그건 영원히 불가능해요.
그래서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그건 자식에 대한 집착이고 자기 욕망에 대한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이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그 사람이 존중받도록 하는 게 사랑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부모든 자식이든 전부 다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예요. 남편도 내 마음에 안 든다, 자식도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 어떻게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돼요? 꿈도 야무지죠. (청중 웃음)
항상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뻐야 합니다. 장애를 갖고 있어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장애아가 있는 이런 환경에 처한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권리를 누릴 수 있나? 아, 사물을 이렇게 보면 되겠구나. 이 아이를 가진 것을 나에게 복이라고 본다면 나도 행복할 수가 있다.’ 이걸 배우는 게 불법이라는 거예요. 이걸 깨우쳐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그런데 ‘나는 이러저러해서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영원히 불행해요. 이따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한쪽 다리가 부러지거든 ‘남산에 가서 기도하고 가는데 왜 다리가 부러지냐. 부처님을 믿어봤자 아무 영험이 없네.’ 이러면 자기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럴 때는 안 부러진 다리를 잡고 ‘와, 기도했더니 하나만 부러지고 하나는 안 부러졌구나.’ 이래야 해요. (청중 웃음)
두 다리가 다 안 부러지고 하나만 부러진 게 기도한 공덕이고 남산 산행한 공덕이고 스님 법문 들은 공덕이라고 여기세요. 어차피 일은 똑같이 벌어졌잖아요. 한쪽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거예요.
이렇게 자신을 행복하게 가꾸어나가야 행복이 오지, 행복이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제가 드릴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행복하면 그건 여러분들이 만든 거예요. 부처님은 ‘세상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저렇게 되어야 한다’ 를 가르친 게 아니라 각자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래도 불행하게 살고 싶다면 그건 자기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애가 아프든, 결혼을 했든 못 했든, 누가 죽었든, 그건 이 세상에서 늘 있는 일이잖아요. 어떤 상황, 어떤 경험이 찾아와도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그 권리를 여러분들이 찾고 누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다 부처다, 즉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자유로워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질문자 :
“네, 감사합니다.”
출처 | http://m.jungto.org/view.php?p_no=74&b_no=70298&page=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