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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알아봅시다
게시물ID : lovestory_762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서울대공학
추천 : 0
조회수 : 158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0/20 00: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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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한국에는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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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휘소이다
 
이휘소는 1935년 1월 1일 새해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의사로 이휘소는 다른 여타 조선아이들과는 다르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네.
 
 
 
 
 
 
 
 
 
 
그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휘소는 친가집이 있는 공주로 피난간다.
 
거기서도 공부를 빡세게 해서 친가식구들이 매우 놀랐다고. 누구는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마저 이휘소는 홀로 묵묵히 공부하고 있던 노력형 천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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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는 하루에 14시간씩 공부하는 공부벌레였다고 한다. 근데 당시 상황 때문에 집 주변에는 고등학교가 전무한 실정이었고 대도시로 나가야했다
 
따라서 이휘소는 새벽 4시에 열차를 타고 마산까지 나가야 하는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고등학교를 다니며 빡공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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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는 검정고시를 치뤄서 서울대 화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당시 난다긴다 하는 한국 신예 공학도들은 모두 화공과로 지원했기 때문에
 
이휘소는 사실상 전국 1위의 공학도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휘소는 서울대 기숙사에서 지내며 화학을 공부하지만 어느새 물리라는 과목에
 
훨씬 큰 재미를 느끼게 된다. 천상 수학자 기질이 있던 그는 어느새 물리에 좀 더 큰 관심을 두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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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오타쿠스러운 그의 스타일과 다르게 그는 굉장히 쾌활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휘소는 전과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 상황으로 인해 전과는 불가능했다.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결국 미국 대학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마이애미 대학이었는데, 현재 플로리다 주에 있는 그 마이애미가 아니고 존나 뜬금없이 오하이오 주, 현재 오대호 주변에 있는 주에 위치한 대학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유학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휘소는 22세의 나이로 미국유학길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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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의 자리를 유지하며 세계를 호령하는 절대강국이지만, 당시에는 세계에 미치는 미국의 힘이 더욱 막대했다.
 
사실상 미국의 경쟁국은 소련뿐이었지만 소련은 군사력, 우주항공분야 빼고는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유럽을 제외한 다른 대륙의 국가들은
 
산업 생산력이 그냥 미미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지는 아주 독보적이었다. 가난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유학온 이휘소는 미국의 거대함과 자유분방함에 놀라고.
 
오하이오 시 옥스퍼드에 도착하자마자 한국과 차원이 다른 세계에 매우 놀란다. 당시 서울은 한국의 수도였으나 미국의 시골도시에도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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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는 마이애미 대학에서 빡공을 하면서도 근근히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효자였다고. 엄마는 그런 이휘소의 편지를 받으며 항상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휘소는 단순히 안부만 묻지 않고 그의 생활 혹은 강의내용을 상세히 적어서 편지에 부쳤다고 하는데 여기서 얼마나 그가 어머니를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휘소는 어쨌든 마이애미 대학에서 미적분학, 대수학, 이론물리학, 전자물리학 등을 공부하며 커리어를 키웠고 결국은 수석으로 마이애미 대학을 졸업한다.
 
그의 졸업 등급은 미국 졸업등급에서도 가장 높은 1등급, summa cum laude 였다.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마저 수석으로 한 대단한 물리학도였다.
 
 
 
 
 
 
 
 
 
마이애미 대학의 교수가 이휘소에게 대학 조교직에 취업할 수 있도록 피츠버그 대학 추천서를 주었다. 당시 이휘소는 하버드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엄청난 학비로 인해 좌절해야만 했다. 이휘소가 어떻게든 학비를 마련해서 하버드에 입학했으면 그의 커리어는 훨씬 일찍 쌓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휘소는 피츠버그 대학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양자역학, 고전역학 등 더 다채로운 전공과목을 공부했는데 난이도가 너무 높고 공부할 것도 많아서
 
하루에 5시간씩 자고, 노는 시간은 아예 없애버리며 도서관에 박혀 공부만 했다. 과수원을 팔면서까지 이휘소를 지원하려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는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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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존경하던 미국의 과학자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되기 위해 이휘소는 분주히 공부했고 피츠버그대학에서마저 이휘소는 역대 최고의 점수로 졸업한다.
 
이휘소는 이제 진정한 이론물리학자의 길을 밟고 있었다. 이휘소가 졸업할 당시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중국에서 최초의 과학자를 배출했다.
 
양전닝과 리정다오는 패리티 비보존법칙을 발견해 1957년 노벨상을 탔는데 이휘소는 이 둘을 보면서 자신도 노벨상을 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국보다 먼저 우주인을 배출한 러시아를 보면서 가슴속에 뭔가 끓어오르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느끼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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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가 슬슬 연구할 준비를 하던 분야는 "입자"였다. 현대 물리학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파티클 분야는 현재까지 노벨상을 30명 이상 배출했을정도로
 
 중요한 분야였는데 이휘소는 이 분야에 재미를 느껴 더욱 접근한다. 이휘소는 피츠버그 대학원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연구원으로 취직해서
 
클라인이라는 연구원과 함께 K파이 중간자라는 입자를 연구하게 된다. 사실 이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이후 이 연구로 인해 이휘소는 노벨상이 유력해진다.
 
케이파이 중간자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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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같은 물1충들이 좆밥으로 푸는 원자핵 간의 강한 상호작용. 이 강한 상호작용의 업다운 쿼크에 관해 다룬 것이 케이파이 중간자에 대한 내용이다
 
존나 복잡해서 설명은 길게 안하겠다. 이휘소는 1959년 24세의 나이에 학회에 참여하여 이 논문을 발표하고, 일년 뒤 파이파이 산란에서 p-파동공명현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거의 정상급 물리학자로 거듭나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리처드파인만, 와인버그 급은 아니었다.
 
이휘소는 연구원생활을 이어가면서, 드디어 자금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생활금을 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
이휘소는 한국 과학자 최초로 미국 물리학계에 한 기둥 굵게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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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이휘소는 또다시 자리를 옮겨서, 아인슈타인과 괴델, 폰노이만이 연구했던 최고의 물리연구소인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에 연구원직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더 나왔겠지만 60년대 당시에마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중 20명 이상이 이 연구원 소속이었다. 한국에서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이 성지처럼 이곳을 방문해
 
이휘소를 만나고 갔다. 여기서 연구를 계속하던 오펜하이머도, 이휘소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이휘소의 논문을 읽고, 그것을 칭찬했다고.
 
프린스턴 연구소에 있으면서 이휘소가 다른 과학자들에게서 유독 칭찬을 많이 받은 능력은 계산능력이었다. 그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능력으로 유명했는데
 
많은 연습이 필요한 것이 계산이기에, 그가 얼마나 많이 계산을 연습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엄청난 공부량으로 인해 팬티가 썩을때까지 공부했다는 썰도 있는데 머리도 좋지만 그의 업적은 단순히 머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알수있다.
 
 
 
 
 
 
 
 
 
 
이휘소가 중국계여자와 결혼하고,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을 무렵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mit,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이휘소는 페르미연구소를 택한다. 페르미연구소는 당시 유럽 cern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미국 과학계의 산물로, 전설적 이탈리아계 과학자 페르미를 기리기위해
 
설립한 핵연구소다. 1973년 이휘소는 이론물리학부 부장으로 취임했는데, 그가 최초였다고. 얼마나 대단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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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는 게이지 이론에도 손을 댔다. 새로운 입자 발견에 열을 올리던 1960년대 머리 겔만과 츠바이그가 쿼크를 최초로 발견하고, 쿼크 이외에 또 다른 입자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도전했다. 이휘소는 이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charm 입자라는 새로운 입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제이 프사이입자의 발견에 큰 영향을 주어 76년에 제이프사이 입자로 새뮤얼 팅 등이 노벨상을 받는다.
 
이휘소는 게이지장 이론연구를 계속해서 맥스웰에 버금가는 물리의 새로운 장을 열어낸 선구자였다.
 
그는 와인살람버그 뿐 아니라 새뮤얼 팅,리히터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논문은 140여편이 있는데 현재까지 15000회가 넘게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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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전 업적은 그를 레전드 과학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조국에서도 너무 유명해졌다. 심지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마저 이휘소에게 핵개발에 참여해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허나 이휘소는 유신독재체제를 부정하는 인물이었고 박정희대통령의 독재를 심히 걱정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조국의 요청을 등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풍파같은 국제 정세에서 약소국이었던 한국을 위해 이휘소는 심각한 고민을 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연구를 포기하고 조국으로 돌아가 핵개발에 참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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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의 고민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콜로라도의 연구학회에 참여하기 위해 가족들과 차를 타고 가던 도중, 대형 트레일러트럭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그는 철창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가족들 역시 경상을 입는 대형사고를 입게 된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동료과학자 이원용은
 
부리나케 이휘소가 안치된 병원으로 달려가고 물리학계에 이 사실을 알린다. 이휘소의 사망소식에 많은 과학자들은 충격에 빠지고 그의 장례식에는
 
200명 이상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참여한다.
 
"이휘소는 죽어서도 영웅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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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를 추모하기 위해 페르미 연구소에는 태극기가 달렸고 서울대에서는 이휘소를 추모하기 위한 강의와 조문이 이어졌다.
 
이듬해 박정희대통령마저 암살당하고 한국의 핵개발 기회는 영영 날아가버렸지만 이휘소라는 저명한 물리학자를 배출한 것만 해도 한국엔 영광이었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서는 "이휘소 암살론"이 일기 시작한다. 미국이 한국의 핵개발을 눈치채고, 이휘소를 암살한 것이다 라고.
 
각종 억측이 나돌고, 이휘소는 10여년 뒤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소설에서 픽션인물로 등장하며 이상한 방향으로 미화된다
 
 
 
 
 
 
 
 
 
 
 
 
 
이휘소의 업적을 마지막으로 보고가자.
 

업적

 

맵시 쿼크 예측

 

글라쇼, 마이아니, 일리오풀로스는 맵시(charm) 쿼크가 있으면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맵시 쿼크를 예측하였다. 이휘소 트리만, 프리막과 함께 그리고 게이아, 로즈너와 함께 〈맵시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K 중간자의 섞임과 붕괴에 해당하는 양을 계산하여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했다.
 

재규격화

 

일찍이 네덜란드 헤라르뒤스 엇호프트(Gerardus 't Hooft, 1999년 노벨물리학상)는
대학원 시절 학회에서 접한 이휘소의 연구를 통해 그의 학위 논문 주제였던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대한 통찰력를 얻었으며 그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폴리처(David Politzer, 2004년 노벨물리학상)는 그의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당시 학자들이 이휘소의 재해석을 통해 전자기 약력에 대한 엇호프트의 연구결과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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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노벨상 수상자 후보에도 없을 때 간혹 그리운 전설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팬티가 썩을때까지 연구할까?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팬티를 갈아입어야 겠다 라는 생각을 떠올리겠지만, 그는 그런 생각마저 하지 못할 정도로 연구에
 
몰입했다는 것일테다. 그가 만약 현재까지 살아있었다면 한국의 기초과학은 미국과 비등할 수도 있었으며 이휘소의 뒤를 이을 많은 기초과학자들이
 
줄을 지었을 것이다. 그가 죽고 나서 안타깝게도 그의 뒤를 이을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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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위키디피아, 이휘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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