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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qing香
추천 : 2
조회수 : 41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2/13 15:04:41

Yahoo!掲示板「竹島」No.16409

2008/ 4/12


朝鮮史書

外務省曰「韓国が古くから竹島を認識していたという根拠はありません」

パンフレットは、この表題につづけて韓国の主張をこう記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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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えば、韓国側は、朝鮮の古文献『三国史記』(1145年)、『世宗実録地理誌』(1454年)や『新増東国輿地勝覧』(1531年)、『東国文献備考』(1770年)、『萬機要覧』(1908年)などの記述をもとに、「鬱陵島」と「于山島」という二つの島を古くから

認知していたのであり、その「于山島」こそ、現在の竹島であると主張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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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のいう「韓国側」とは何を指すのか不明ですが、少なくとも韓国政府が日本政府に宛てた公式の反論に『三国史記』は登場しません。 注1)塚本孝「竹島領有権をめぐる日韓両政府の見解」『レファレンス』2002.6月号

外務省は幻の主張に振りまわされる一方で、重要な『世宗実録』地理誌への反論はないようです。

同書に「于山と武陵の二島が県の真東の海中にある。お互いに遠くなく、風日が清明であれば望見することができる」とありますが、この記事こそ「韓国が古くから竹島を認識していたという根拠」として韓国政府が強く主張したのでした。

かつて、外務省の川上健三氏はその主張に反論するため、欝陵島から竹島=独島は見えないと主張したくらいでした。その主張は、欝陵島で少し高いところへ行けば充分見えると反論され、川上氏の努力は徒労に終りました。それほど重要な文献である『世宗実

録』地理誌にパンフレットは一言もないようです。


つぎに、パンフレットはこう記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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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た、韓国側は、『東国文献備考』、『増補文献備考』、『萬機要覧』に引用された『輿地志』(1656年)を根拠に、「于山島は日本のいう松島(現在の竹島)である」と主張しています。これに対し、『輿地志』の本来の記述は、于山島と鬱陵島は同一の島とし

ており、『東国文献備考』等の記述は『輿地志』から直接、正しく引用されたものではないと批判する研究もあります。その研究は、『東国文献備考』等の記述は安龍福の信憑性の低い供述を無批判に取り入れた別の文献(『彊界考』(『彊界』)、1756年)を底本にしていると指摘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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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この文に外務省の調査不足が露呈しているようです。というのも、『輿地志』の本来の記述は、決して「于山島と欝陵島は同一の島」としているのではなく、別々の島であると記述しているからです。ここにいう『輿地志』は柳馨遠『東国輿地志』とされますが、同書の口語訳は下記の通りです。 注2)『東国輿地志』「于山島 欝陵島」の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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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山島、欝陵島

一に武陵という。一に羽陵という。二島は県の真東の海中にある。三峰が高くけわしく空にそびえている。南の峯はすこし低い。天候が清明なら峯のてっぺんの樹木やふもとの砂浜、渚を歴々と見ることができる。風にのれば、二日で到着できる。一説によると于山、欝陵島は本来一島という。その地の大きさは百里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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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文は官撰書である『東国輿地勝覧』と完全に同じです。といっても剽窃ではありません。元来『輿地志』は、その「凡例」に断り書きがあるように、目的は『東国輿地勝覧』の「増修」にありました。  当時、名著の『東国輿地勝覧』は出版後 200年近く経過し、その間に変動が多々あったので、その増補を目的に『輿地志』が書かれたのでした。したがって、于山島のように変動がない記述はそのままにされました。

つまり『東国輿地勝覧』も『輿地志』も于山島と欝陵島を別々の島とし、一島説を単なる一説として書いたのでした。したがって、外務省の解釈は明らかに誤りです。

外務省がそのような初歩的な誤りを犯したのは、パンフレットが述べる、ある「研究」をウノミにしたからでしょうか。その研究とは下條正男氏の研究を指すようです。下條氏はこう記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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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リジナルの『輿地志』では、「一説に于山鬱陵本一島」と于山島と鬱陵島は同じ島の別の呼び方(同島異名)としているが、松島(現在の竹島)にはまったく言及してい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注3)下條正男『竹島は日韓どちらのものか』文春新書、2004,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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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條正男氏のように、資料の一部分だけを意図的に取りあげれば、資料の著者の見解とは正反対の解釈すら可能です。『輿地志』は本説で于山島と欝陵島を別々の島にし、一説で両島は本来一島としたのですが、下條氏は一説の記述のみをとりあげ、『輿地志』の

見解とは正反対の見解を、さも『輿地志』の見解であるかのように記しました。

これは下條氏のいつもながらの我田引水的な手法なので驚くにはあたらないのですが、外務省はその誤った恣意的な解釈をそのまま信じ、原典を確認するという基本的な作業を怠ったたようです。

その埋め合わせなのか、外務省は下條氏の見解を同省の公式見解とせず、そうした「研究もある」と周到に逃げ道を用意してパンフレットを製作したようです。姑息なやり方ではないでしょうか。


パンフレットの説明では『輿地志』と『彊界考』などの関係がわかりにくいのですが、『輿地志』は申景濬により『疆界考』および官撰書である『東国文献備考』の分註に次のように引用されました。


『疆界考』(1756)

按ずるに 輿地志がいうには 一説に于山 欝陵は 本一島 しかるに諸図志を考えるに 二島なり 一つはすなわちいわゆる松島にして けだし二島ともにこれ于山国なり


『東国文献備考』「輿地考」(1770)

輿地志がいうには 欝陵 于山は皆 于山国の地 于山はすなわち倭がいうところの松島 なり


一般に、古文書は日本のみならず韓国や中国でも句読点が一切ありません。したがって、この場合でも分註のどこまでが引用で、どこからが申景濬の見解なのかはっきりしません。

『輿地志』の原文を分析すると、『疆界考』の場合は下條氏がいうように「一説に于山 欝陵は 本一島」が『輿地志』の引用文であり、それ以下は申景濬の見解であることがわかります。申景濬は『輿地志』や『東国輿地勝覧』に参考として書かれた一説(一島二

名説)を完全に否定するため、ことさら『疆界考』でその一説を特記したとみられます。その一方、当時は本説である二島二名説は自明であったためか、分註で特にふれなかったと見られます。


つぎに『東国文献備考』の場合は、「欝陵 于山は皆 于山国の地」が引用文であり、それ以下の「于山はすなわち倭がいうところの松島なり」は申景濬の見解であることが『輿地志』からわかります。

一時、私は『東国文献備考』においての引用文献名を『疆界考』とすべきなのに申景濬は誤って『輿地志』に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たこともありました。しかし、やはり上記のように解釈するのが妥当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もちろん、くだんの下條正男氏がいうような史書の「改竄」などはなかったというべきです。


両書において申景濬が分註の後半で「于山は倭の云う松島」という趣旨を書いたのは、安龍福事件の影響とみられます。1696年(元禄9)、安龍福は竹島(欝陵島)から松島(子山島)を経由して来日し、隠岐島などにおいて「江原道の内に子山と申す島があり、これを松島という」と訴えました。

安龍福は同様の供述を朝鮮でもおこなっており、それが朝鮮で于山(子山)は日本の松島であるとの認識を生み、上記の両書に反映されたようでした。安龍福の供述は虚実こもごもですが、かれが松島(子山島)、すなわち竹島=独島を正しく把握していたことは確かなことです。


おわりにパンフレットは『新増東国輿地勝覧』の付属絵図を批判しましたが、そもそも絵図は地図と違って、不正確なのが特徴です。しかも『東国輿地勝覧』のように16世紀の絵図とあっては、離島などはその位置や大きさなど、ほとんどデタラメに近くて当然です。

外務省は、于山島は「鬱陵島よりはるかに小さな島として描かれるはずです」と記しましたが、そうした批判は絵図でなく地図に向けられるべきです。

その点、外務省が竹島=独島を「的確に記載している地図」としている長久保赤水の「地図」には外務省の批判がストレートに当てはまります。同図は竹島と松島を同じくらいの大きさで描いているので、外務省の「大きさ」批判にまったく耐えられません。さら

に、同図における竹島・松島の位置は、もちろん実際とは違っています。


19世紀の赤水の地図ですらこのような有様です。ましてや16世紀の絵図を取りあげて、何か議論すること自体、ほとんど無意味です。絵図は、単に当時の人々の空間認識を絵で表現したにすぎません。

さきの『新増東国輿地勝覧』の付属絵図でいえば、これは単に東海に于山・欝陵の二島が存在するという空間認識を表現したと理解すべきであり、それ以上の議論は本末転倒です。



조선사서

외무성 왈(曰)「한국이 예로부터 타케시마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팜플렛은 이런 표제로 계속해서 한국의 주장을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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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한국측은 조선의 고문헌 『삼국사기』(1145년) ,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동국문헌비고』(1770년) 『만기요람』 (1908년) 등의 기술을 근거로 울릉도와 우산도, 두 섬을 예로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우산도가 바로 오늘날의 타케시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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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성이 말하는 「한국측」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명확하나, 적어도 한국정부가 일본정부 앞으로 보낸 공식반론에는『삼국사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1)츠카모토 타카시「죽도 영유권을 둘러싼 일한 양 정부의 견해」『레퍼런스』2002.6호

외무성은 허깨비 주장에 휘둘리고 있을 뿐, 중요한『세종실록지리지』에 대한 반론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동서同書에 「우산과 무릉의 두 섬이 현의 정동쪽의 바다에 있다.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 볼 수 있다」라고 쓰여 있으나, 이 기사야 말로 한국이 예로부터 타케시마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로 한국정부가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외무성의 카와카미 켄죠는 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울릉도로부터 타케시마=독도는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을 정도입니다. 그 주장은 울릉도의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면 충분히 보인다고 반론 당해서 가와카미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습니다. 그런 정도로 중요한 문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대하여 팜플렛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팜플렛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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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국측은『동국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 『만기요람』에 인용된 『여지지』(1656년)를 근거로 우산도는 일본이 말하는 마츠시마(현 타케시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여지지』의 원래 기술은 우산도와 울릉도는 동일의 섬이라고 하고 있으며 『동국문헌비고』의 기술은『여지지』에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인용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동국문헌비고』등의 기술은 안용복의 신빙성이 낮은 진술을 아무런 비판 없이 인용한 다른 문헌『강계고』, 『강계지』(1756년)를 저본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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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외무성의 조사부족이 드러나고 있는 듯합니다. 오히려 『여지지』의 본래의 기술은, 결코 「우산도와 울릉도는 같은 섬」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각각 서로 다른 섬임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지지』는 유형원의 『동국여지지』라고 여겨집니다만, 동서同書의 번역은 아래과 같습니다. 주2)『동국여지지』「우산도 울릉도」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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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도 울릉도

혹은 무릉이라 하고, 혹은 우릉이라 한다. 두 섬은 현의 정동쪽의 바다에 있다. 세 개의 봉우리가 높고 가파르게 하늘로 솟아 있다. 남쪽의 봉우리는 조금 낮다. 날씨가 좋으면 봉우리 꼭대기의 나무나 산기슭의 모래사장, 바닷가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바람을 타면 이틀만에 도착할 수 있다. 일 설에 의하면 우산, 울릉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라고 한다. 그 땅의 크기는 백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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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관찬서인 『동국여지승람』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표절은 아닙니다. 원래 『여지지』는 그 \"범례\"에 쓰여 있는 것처럼  목적은『동국여지승람』의 보충,수정이었습니다.

당시 명저인 『동국여지승람』은 출판 후 200년 가까이 지나있었고 그 사이 많은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증보를 목적으로 『여지지』가 쓰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산도와 같은 변동이 없는 기술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즉 『동국여지승람』도 『여지지』도 우산도와 울릉도를 각각의 섬으로 기술하고, 일도설(一島說)을 단순한 하나의 설說로써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무성의 해석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외무성이 그런 초보적인 오류를 범한 것은, 팜플렛이 말하고 있는 어떤 "연구"를 검토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연구라고 하는 것은 시모죠 마사오下條正男씨의 연구를 가리키고 있는 듯 합니다. 시모죠씨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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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의 「여지지」는 「일설에 우산울릉은 본래 하나의 섬」이라 해서, 우산도와 울릉도는 같은 섬의 다른 명칭(동도이명)이라고 했으나, 마츠시마(현 다케시마)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이다. 주3)시모죠 마사오『타케시마는 일한 어느쪽의 것인가』문춘신서、2004,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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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죠 마사오씨처럼 자료의 일부분만을 의도적으로 끌어오면 자료의 저자의 견해와는 정반대의 해석조차 가능합니다. 『여지지』는 본래의 설명에서 우산도와 울릉도는 각각 다른 섬으로 하고, 일설(一說)에 두 섬이 본래 하나의 섬이다 라고 했습니다만, 시모죠씨는 일설의 기술만을 발췌해, 『여지지』의 견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마치 『여지지』의 견해인 것처럼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모죠씨의 늘 그대로의 아전인수격인 수법이므로 놀랄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외무성은 그 잘못된 자의적인 해석을 그대로 믿고, 원전을 확인하는 기본적인 작업을 게을리 한 듯 합니다.

그것을 좀 벌충해보려는 의도인지, 외무성은 시모죠씨의 견해를 외무성의 공식 견해라고 하지 않고, 그러한 연구도 있다고 하여, 용의주도하게 도망갈 구멍을 마련하고 팜플렛을 제작한 듯 합니다. 임시방편적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팜플렛의 설명으로는 『여지지』와 『강계고』 등의 관계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여지지』는 신경준에 의해 『강계고』및 관찬서인 『동국문헌비고』의 주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었습니다.

 

『강계고』 (1756년)

짐작하건대 여지지가 말하는 일설에 우산 울릉은 본래 하나의 섬 그런데 여러 지도의 뜻을 생각하니 두 개의 섬이다. 하나는 다름아닌 이른바 마츠시마 틀림없이 두 섬 모두 우산국이다

 

『동국문헌비고』 『여지지』(1770년)

여지지가 말하는 것은 울릉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다름아닌 왜(倭)가 말하는 마츠시마이다

 

일반적으로, 고문서는 일본만이 아니고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구두점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주석의 어디까지가 인용인지, 어디서부터가 신경준의 견해인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지지』의 원문을 분석하면 『강계고』의 경우는 시모죠씨의 말처럼 「일설에 우산 울릉은 본래 하나의 섬」이『여지지』의 인용문이고, 그 이후는 신경준의 견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경준은『여지지』나 『동국여지승람』에 참고로써 쓰여진 일설(1도2명설)을 완전히 부정하기 위해, 일부러『강계고』에 그 일설을 특별히 기록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한편 당시의 정설인 2도2명설은 자명했기 때문일까 주석에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다음으로 『동국문헌비고』의 경우는 「울릉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 인용문이고, 그 이후의 「우산은 다름아닌 왜(倭)가 말하는 마쓰시마이다.」는 신경준의 견해인 것을『여지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때 저는『동국문헌비고』에 있어서의 인용문헌 명(名)을 『강계고』라고 해야 마땅한데 신경준이 실수하여 『여지지』로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위에 쓴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서 적은 것과 같이 시모죠 마사오씨가 말하는 사서의 개찬(改竄, 글자나 글귀를 고의로 고침)등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서兩書에 있어 신경준이 주석의 후반부에 「우산은 왜(倭)가 말하는 마츠시마」라는 취지의 글을 쓴 것은 안용복 사건의 영향이라고 보여집니다. 1696년 (겐로쿠9년) 안용복은 타케시마(울릉도)로부터 마츠시마(자산도)를 경유해 일본에 와서, 오키노시마隱岐島등에서 「강원도 안에 자산이라고 하는 섬이 있어 이것을 마츠시마라고 한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안용복은 같은 내용의 공술(진술)을 조선에서도 행해서, 그것이 조선에서 우산(자산)은 일본의 마츠시마라는 인식을 낳고 상기한 두 책에 반영된 듯합니다. 안용복의 공술(진술)은 전부가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마츠시마(자산도) 즉 타케시마=독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끝으로 팜플렛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속 그림지도繪圖를 비판했습니다만, 원래 그림지도는 지도와 달리 부정확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게다가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16세기의 그림지도에 있어 멀리 떨어진 섬 등은 그 위치나 크기 등 거의가 엉터리에 가까운 것이 당연합니다.

외무성은 「우산도는 울릉도보다 훨씬 작은 섬으로 그려져야 할 터입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만, 그러한 비판은 그림지도가 아니라 지도를 상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외무성이 타케시마=독도를 「정확하게 기재하고 있는 지도」라고 주장하는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의「지도」에 외무성의 비판이 그대로(스트레이트하게) 들어맞습니다. 이 지도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를 거의 비슷한 크기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외무성의 크기 비판을 전혀 감당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세키스이도에서 다케시마와 마쓰시마의 위치마저도 실제와 다릅니다.

19세기의 세키스이의 지도 조차 이런 형편입니다. 하물며 16세기의 그림지도를 놓고, 뭔가 의논하는 것 자체가 정말로 무의미 합니다. 그림지도는 단순히 당시 사람들의 공간인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속 그림지도로 말하자면 단지 동해에 우산 울릉의 두 섬이 존재한다고 하는 공간인식을 표현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상의 논의는 본말이 전도 된 격입니다.


在日研究家 半月城

재일연구가 반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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