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임진왜란이 일본에선 마이너한 사건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을 없는 역사취급하는 거랑 비슷함
실제로 명량해전은 국내에서 거의 해상판 테르모필레 및 세계 5대 해전(근거는 없음)로 불릴정도로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한데
국내 기록에서는 최소 명량해협으로 출진한 적의 규모를 133척에서 500척까지, 기록이 들쑥날쑥한데 비해
조선수군의 편제는 전선 13척 + 협선 32척에, 후미에 과시용으로 배치해둔 피난선 100여척
해전이후 병력점호를 했을때 대략 2000명 정도의 규모가 나오는 것으로 조선군이 어떠한 상황으로 싸웠는지 정확히 알수 있음,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전투 편제의 기록자체가 없을 뿐더러
명량해전에 참전했던 수군무장들이 워낙 마이너한 소영주(小名)들이기때문에
실제 133척~600척하는 동원규모가 절대 나올수 없기때문임
고산공실록에서는 이 명량해전에 대해서 짤막한 기록이 있는데
총사령관을 도도 다카도라, 군감 모리 다카마사
그리고 선봉에 구루지마가 있었다는 것외엔 확실한게 아무것도 없음
당시 전라도 방면으로 진격하던 우키다 히데이에의 좌군에 소속된 수군은 도도 다카도라를 주축으로한 7200명정도
임진년엔 9000명에 상당하는 병력이였지만
불세출의 수군장인 구키 요시다카가 대마도에 선박관리역으로 빠지는 바람에 수군의 병력의 규모가 훨씬적어짐
당시 도도 다카도라는 세키가하라 이전이라 본토에서도 아직 영향력이 크지 않는 성장중인 다이묘라
6만 고쿠다카에 해당하는 영주로 석고비례(1만 고쿠다카당/250~500명 병력동원 가능)로 조선출병당시 휘하병력은 2800명 정도였는데
이 부대는 이후 세키가하라에서도 일정한 동원률을 보이면서
명량해전에 기록적인 패배를 생각하면 생각지도 못할 본국에서의 1만석의 포상을 받는 등
조선의 기록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이야기를 보임
육군의 지원+노부나가의 군사시스템인 요리키라던가의 변수가 있지만
육군의 지원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본의 기록이 아닌, 조선의 기록에서 나오는데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
나카가와 히데시게
초소카베 모토치카
등등이 언급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당시 기록상 명량해전과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인물이고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간양록에는 참전한것으로 되있으나, 하루뒤 전라도 정읍에 주둔해있는 것이확인되므로 논외
나카가와 히데시게도 전라도에 있었고, 초소카베 모토치카는 수군예비역으로 편제되있으나 참전기록이 없으므로 논외
명량해전에 추가로 전사한 기록이 있는 하타 노부토키,간 마사카케도 결국엔 소묘중에 소묘에 해당되므로 논외
실제 일본수군의 일원으로 참전가능성이 있는 다이묘는
도도 다카도라 2800명
구루지마 미치후사 6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기록은 없으나 수군이므로)1500명
가토 요시아키(기록은 없으나 수군이므로) 2400명
하타 노부토키
간 마사카케
그외의 수군영주들 (가메이 고레노리나 칸헤이에몬 미치나가)
석고 비례상 전 병력의 총합은 8000명이 약간 안되는 수준임
실제 수군병력중 중형 세키부네의 선단으로 공격한것이 조선과 일본의 기록상 일치하므로
전체 선단의 일부만 명량해협에서 해전을 전개했다는 말이되는데,
이는 명량해협으로 진군한 일본수군 8000명중, 일부의 병력만이 조선수군과 싸웠다는
조선측의 10배 ~ 20배로 열세였다는 주장과 매우매우매우 상충되게됨
이와 비슷한 사례로 전국시대 당시 오다수군과의 해전에서 무라카미 수군이 동원한 함대는 600여척이 넘으나
실제 석고수치를 비교했을때는 15만석인 무라카미는 병력동원이 1만명도 버거웠던 다이묘인것도 미스테리,
임진왜란 자체가 워낙 조선측의 자료에 기본으로한(조선측 사료가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긴했음)
사건이라 그런지, 일본측과 상충되는 기록이 너무나도 많음
앞으로 연구해나가야할 과제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