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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교수 페북에 올라온 글.
게시물ID : sisa_7619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inde
추천 : 18
조회수 : 128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9/23 11: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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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칼럼에서 거론한 고등학교의 동창생들 – 현재는 대학생들 - 사이에서 얼마 전 작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어떤 남학생이 “남자가 여자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건 여혐이라면서 자기는 남자 외모를 품평하는 여자, 이중적이지 않나요?”라는 페북 글에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누가 공유한 글인 줄 모르고.

이걸 본 남학생의 동창이자 페친인 여학생은 자기를 저격하는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며 자기 페북에 이 남학생의 실명과 소속을 공개하고 그의 친구들까지 싸잡아 차마 글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메갈식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최근 문제가 된 ‘○○패치’와 흡사한 공개 모욕이었죠. 어쩌면 이런 식의 ‘놀이’에 익숙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한 번 눌렀다가 졸지에 공개적으로 별별 욕을 다 먹어 ‘기분만 상한 젠더 권력의 수혜자’는 뜬눈으로 밤을 샌 뒤 다음날 경찰서 문이 열리자마자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여혐의 피해자’로만 인지하는 여학생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외려 ‘여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다가 겪는 수난으로 여겼습니다.

이 사건과 앞의 사건 – 학교에서 남학생들을 여장시키고 여학생들에게 ‘품평’하게 한 사건 – 사이에는 5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두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 미시사적 연구를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들 사건은 한 사회에서 진행되는 담론의 변화 과정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언어, 감정, 상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경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이버세계에서 ‘가상의 한남충’을 상대로 멸시, 모욕, 살인모의를 하며 노는 게 습관이 된 사람들은 그 대상이 실명과 인격을 갖춘 ‘현실의 한남충’으로 바뀌어도 공격 방법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현대인들, 특히 젊은 세대는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를 수시로 넘나듭니다. 그때마다 자기 ‘위치’를 자각하는 건 그리 용이하지 않습니다.

SNS에서 다들 느끼겠지만, 자칭 진보주의자나 남성 페미니스트들 중에도 최소한의 예의조차 모르는 자들이 정말 많습니다. 현실세계에서라면 쓰레기 취급받을 인격이, 사이버세계에서는 ‘정상 인격’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이버세계에서 가상의 인물을 상대로 했을 땐 용납되던 일이, 현실세계에서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하면 죄가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당황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면, 어느 방향으로든 사이버 공간과 현실 세계의 ‘윤리’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현실세계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스트레스 받는 젊은 여자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거친 말 좀 쓰면서 놀면 어떠냐?”는 생각이야말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망상입니다.

같은 반 친구였던 젊은 남녀는 이제 ‘원수지간’이 됐습니다. ‘그 남자’의 남자 친구들과 ‘그 여자’의 여자 친구들 사이에도 ‘증오의 벽’이 생겼습니다. ‘여성문제’를 계급문제나 민족문제와 같은 종류의 문제로 보고 혁명운동이나 민족해방투쟁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혁명운동사와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식견이 조금만 있다면, 이런 게 ‘좋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는 못 할 겁니다.

5년 또는 10년 뒤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담론지형’이 그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젊은 여성들이 메갈/워마드의 영향을 받아 ‘전투력’을 높여가는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받는 ‘초라한 젊은 남자들’이 ‘분노’를 쌓아가는 현상입니다. 지금 메갈/워마드의 방식이 정당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후일 ‘분노한 남자들’ 중 일부는 그 합의선을 뛰어넘으면서 ‘정당성’을 주장할 겁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유리한 무기를 들고 맞싸워서 이긴 적은 없었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같은 ‘무기’를 선택했다면, 스스로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거나, 지나치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건 부당하고 불의하다"는 명제는 ‘인간 사이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관계’라는 조건에서만 ‘참’입니다. 조건을 부정하면서 명제가 '참'임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내팽개치면, 사람들 사이[=인간]의 '정의'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PS 1. “남자가 여자의 몸을 품평하는 것과 여자가 남자의 몸을 품평하는 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학설’ 정도는 알고 있으니, 번거롭게 다시 가르쳐 주실 필요 없습니다.

PS 2. 여성인권이 ‘최악’인 나라에서 20여 년 간 여성으로 살며 쌓이고 쌓인 분노를 순간적으로 ‘젠더 기득권세력’의 일원을 향해 터뜨린 저 젊은 여성, 안타깝게도 현행법으로는 유죄일 겁니다. 정의당, 이런 피해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남성에 대한 혐오발언은 무죄’로 규정하는 관련법 개정안을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론을 정해놓고 입법을 기피하는 건 직무유기고, 입법할 생각 없이 당론을 정했다면 기만입니다.

PS 3. 딸만 둔 아버지들의 극단적인 편파성을 너무 많이 겪어서 제가 아들 둔 아비라 이러는 건 아닌지 몇 번을 자문(自問)했습니다. 제 자식이 딸이라도 저런 행위와 태도를 두둔하는 건 양심 없는 짓이라는 확신이 섰기에, 글을 올립니다.

출처 페북의 전우용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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