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면 흔히 한족을 연상한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는 곧 한족의 역사라는 인식이 널리 팽배해 있다.
중국이란 표현이 한족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되는 데에는 1912년 중화민국 및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 한몫을
한 것 같다.
한족이 세운 두 나라의 국호에 중(中)이 쓰임으로 인해 중국이란 용어가 마치 한족의 전유물인 듯한 인상을 풍기게 되었
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고전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중국이 특정한 정치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기보
다는 단순히 ‘세계의 중심국가’를 가리키는 표현인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세계 챔피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중국이 사용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이란 표현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경>이나 <서경>의 용법과도 일치한다.
여기에 나오는 ‘중국’이란 용어는 특정한 정치집단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중심적인 성읍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그러므
로 누구든지 그 중심적인 성읍을 차지하기만 하면 중국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세계의 중심부인 중원을 정복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자처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한족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외래 정복민족이 한족 문화에 동화된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정복민족들의 입장
에서는 ‘한족의 나라로서의 중국’이 아니라 ‘세계 챔피언으로서의 중국’ 행세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중 한 가지 증거로서, 스스로 중국임을 최초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표방한 민족이 한족이 아니었다는 점을
제시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어느 민족이 최초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자신을 중국이라고 표방하였을까?
그들은 바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여진족)이었다.
청나라 강희 28년(1689) 7월 24일이었다. 러시아력(曆)으로는 1689년 8월 27일이고, 서력으로는 1689년 9월 7일이었다.
이 시점은 만주족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원을 정복한 1644년으로부터 불과 45년 뒤였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청나라 사람들에게서 ‘야인’의 냄새가 풍길 때였다.
아직 야인의 냄새가 풍기는 청나라 만주족의 흠차대신들은 그날 러시아 차르의 전권대신들과 국경문제에 관한 네르친스
크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만주족 전권대신들은 네르친스크조약 서문에서 자신들을 ‘중국’이라고 칭했다. 동북방 여진족
으로 살다가 중원으로 넘어간 지 불과 45년밖에 안 된 이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당시, 청나라 측에서는 만주어와 라틴어로 된 2개의 조약문에 각각 서명했고, 러시아 측에서는 러시
아어와 라틴어로 된 2개의 조약문에 각각 서명했다. 그런 다음에 청나라 측에서는 이 조약문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이 한
문본 번역문에서 청나라는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칭했다.
▲ 한문으로 번역된 네르친스크조약. 전문에 ‘중국’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중원을 정복한 왕조가 다른 나라와의 국제합의
에서 중국을 사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원을 정복한 패권국가가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공식적으로 표방한 최초의 사례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중국이
란 표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1912년 및 1949년의 한족보다도 만주족이 최초로 중국을 공식 표방
한 셈이다.
대외적으로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공식적으로 표방한 최초의 민족이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었다는 점은, 과거 동아시아
에서 중국이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세계의 중심인 중원을 차지한 민족은 누구든지 중국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만주족은 절대로 자신들이 한족국가인 명나라를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청
나라는 명나라를 계승한 게 아니라 이민족으로서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중국=한족’이라고 주장하는 한족 학자들은 만주족이 네르친스크조약에서 중국을 자처한 사실을 두고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된 증거라고 말하겠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네르친스크조약은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간 지 불과 45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정복민족이 불과 45년만에 피정복민족에게 동화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과연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을까?
실제로 한족이 만주족의 압박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진 것은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 이후였다. 그 이후에야 비로
소 증국번·이홍장 등을 위시한 한족들이 중앙무대에서 만주족을 능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태평천국운동 이전에 이미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면, 태평천국운동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이라는 구호가 나
왔을 리 없다.
이것은 19세기 중반까지도 한족이 만주족에 억눌려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억눌려 산 민족이 억누르고 있는 민족을 동화시킬 수 있었을까?
물론 한족들이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689년 당시의 만주족은 한족의 계승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계의 중심국가라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중국이라
고 자처했던 것이다. 당시의 만주족은 자신들이 한족국가인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세계의 중심을 차지했다는 의미에서 중
국을 자처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중국이라는 용어는 결코 한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시대 동아시아인들이 생각하기에 세계의 중심지역이었던 중원을 정복한 나라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던 것이
다.
아마 전성기의 고구려가 중원을 점령했다면, 고구려 역시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 즉 중국이라고 자처했을 것이다. 누구나
힘 있고 강한 나라는 다 중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과거 동아시아인들의 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본다면, 동아시아 최강국 즉 중국의 역사를 무조건 한족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의 태도
는 역사적 실제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브라질만 축구 월드컵 챔피언이 되라는 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탈리아도 월드컵 챔피언이 될 수 있고 독일도
챔피언이 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도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월드컵 챔피언의 역사는 모두 브
라질 축구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소리로 들릴 수 있을까?
오늘날 한족의 역사인식이 바로 그러하다.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국인 중국의 주인은 그때그때마다 실력에 따라 바뀌어왔는데도, 자신들이 현재 중국의 주인이라 하
여 과거 중국‘들’의 역사를 모두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브라질이 월드컵 챔피언의 역사를 모두 브라질
축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외래 정복민족인 몽골·거란·여진족의 역사를 모두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인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몽골의 후손들이 오늘날 엄연히 국가를 이루고 있는데도, 칭기스
칸의 역사를 25사(史) 중에서 원사(元史)에 포함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남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모두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한족. 한족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거품을 모두 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