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불교의 계율적 문제를 거론하며
"불교에선 뭐그렇게 하지 말라는게 많냐... 뭐만하면 지옥간다는데 나 피곤해서 불교 안믿을란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이야기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불교가 단순히 믿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하는 종교인것은 맞고
그에 따른 계율도 상당히 많다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계율에 대한 개념이 조금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부처는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고
그 고통을 끊어내는 방법을 궁리하던 중에 얻은 깨달음을 설한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부처는 수행이 쾌락과 고행의 중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불교의 해탈은 고통의 근원인 '나'라는 집착을 끊어내어 '무아'를 보고 체득하여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 평온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계율이라는 것은 고통을 끊어내는 길을 돕는 보조역할일 뿐이지
계율 자체가 맹신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선 계율의 뜻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
'계율'이라는 것은 본래 한단어가 아니라 '계'와 '율'은 각자 의미하는 바가 다른 단어입니다.
'계'라는 것은 각자 개인의 수행의 지침이 되는 규칙이고
계를 어긴다고 해서 타인에게 징계를 받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각자 자기가 지은 업을 스스로 받아서 가는 것이죠...
'율'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규칙입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무아'를 깨달으면 나와 남이라는 분별심이 없기에
나를 위한 삶은 남을 위한 삶이고 남을 위한 삶은 나를 위한 삶입니다.
그저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게 아니라 남도 같이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얘기죠...
http://todayhumor.com/?freeboard_1023816예전에 약간 다른 주제이긴 하지만 불교의 계율에 대한 의미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다시 인용하자면
불교에서 계율이라는 것은 강을 건너는데 타고가는 배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지 않아도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널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배를 타면 더 수월하죠...
출가를 하지 않아도 해탈을 할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렵죠...
그래서 계를 받아 해탈을 위한 수행에 계율의 도움을 받는거죠...
그것을 승가에서는 '계체를 형성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신체가 아니라 계율의 도움을 받는 계체 말예요...
http://todayhumor.com/?lovestory_75894부처는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최고라고 취할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 이론인 연기법의 원리는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해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음으로 해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해서 저것이 멸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 홀로 독자적으로 상주불변하는 절대적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며 서로가 서로의 인因이 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의 과果가 되기도 하죠...
그로인해 홀로 상주불변하는 절대적인 존재라는것은 있을수가 없으며 그것이 제행무상입니다.
부처는 모든것이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에 분명하게 본인과 본인의 가르침도 포함시켰습니다.
부처 본인의 가르침에서조차 사실 딱히 최고의 진리라고 추구해야 할 것이 없다고 말하죠...
그리고 불교신자가 모두 출가수행자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의 생존 당시에도 승가공동체는
남여 수행자인 비구/비구니, 남여 재가불자인 우바새/우바이 사부대중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출가수행자에게는 출가수행자에게 걸맞는 계율이 있고
재가불자에게는 재가불자에게 걸맞는 계율이 있습니다.
출가수행자는 출가수행자대로 재가불자는 재가불자대로
각자의 삶에서 충실히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논의는 한국 불교계의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성철스님을 필두로 한 돈오돈수파와 법정스님을 필두로 한 돈오점수파...
돈오점수는 고려의 스님 지눌의 사상 그대로
돈오(순간적인 깨달음)를 한 후에도 점수(꾸준한 수행)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고
돈오돈수는 점수가 필요하면 돈오하지 못한것이고 돈오했으면 그냥 돈수로 끝난것이라는 이야기이죠...
뭐 저런 말장난으로 그리 큰 논쟁을 벌이나 싶을수도 있지만
사실 이게 어쩌면 불교 수행의 근간과 다름없기에 그냥 허투루 넘어갈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는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최대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법을 설하였으면서도
그에게 도전해오는 외도들의 공격에는 칼같은 논리적 반박으로 응수하기도 했던 달변가였습니다.
하지만 부처가 존경받은 이유는 단지 그의 교리적 완성도때문이 아니라
깨달음 이후 그가 보여주었던 45년간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는 죽을때까지 탁발에 참여하였고
계율을 정함에 그의 독단이 아닌 대중의 뜻을 물어 결정하였고
결정된 계율은 부처 본인도 절대 어기지 않고 가장 철저히 실천하였습니다.
나와 남의 분별심이 없어서 전쟁, 기아, 역병 등의 재난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는데에도 앞장서서 달려갔었죠...
매순간 알아차리는 생활로 다른 이들에게 설법이 아닌 행동거지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았구요...
과연 부처는 그 모든 순간을 수행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죠...'내 나이 일흔이 되니 마음가는대로 해도 (하늘의 뜻에) 거슬림이 없더라...'
부처도 그저 그랬을 겁니다.
돈오를 한 이후에도 개망나니 같은 삶을 산다면 그것은 돈오하지 못한것이겠죠...
하지만 돈오를 한 이후에도 억지로 참고 수행한다는 생각이 남아있다면 그것 역시 돈오하지 못한것이겠죠...
부처는 수행을 현악기에 비유했습니다.
줄을 너무 팽팽하게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조이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중도를 이야기했죠...
수행은 집착을 버리기 위한 것이니 수행 자체를 집착해서는 안되는거니까요...
중생을 구제한다는 서원은 그저 언어의 표현을 빌렸기에 중생구제이지
사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기에 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중생을 구제하려는것도 집착이고 아직 구제하지 못한 중생이 많다는것도 집착이죠...
이미 입적하셨지만 생전에 세계4대생불로 유명하셨던 숭산스님은
참선 수행의 결과 알아야 하는건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교 수행은 순간 순간의 알아차림이 연속되는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안다'라고 생각하면 그 알아차림에 대한 걸림돌이 됩니다.
부처는 이 세상에 상주불멸하는 존재는 없어서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을 폈습니다.
나는 내 가족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제 본 어머니와 오늘 본 어머니는 다릅니다.
나는 매일 먹는 밥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침에 먹은 밥과 점심때 먹은 밥은 다릅니다.
나는 내 발걸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첫번째 한걸음과 두번째 한걸음은 다릅니다.
그 모든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 불교의 수행입니다.
하지만 '안다.'라는 생각이 그걸 가로막습니다.
불교 참선 수행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저 그렇게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며 사는것입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죽음이 나를 부를때 툭하고 털고 일어날수 있으면 된다.'
불교 최초 경전인 숫따니빠따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알았다.'
부처가 된다거나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그런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 싯다르타의 삶을 닮아가는 것...
그로써 고통을 벗어나 평온한 삶을 사는것...
그저 순간 순간을 알아차리고 청정하고 충실히 살아서
죽음이 찾아왔을때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
그것이 정말 불교의 참된 가르침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