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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작가다.
게시물ID : lovestory_755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dun
추천 : 6
조회수 : 72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8/29 19: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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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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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간이라도 고쳐야지
속담처럼 아주 가셨지만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남지 않았으니
 
<외양간>
 
 
 
나는 작가다. 아니 무명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이라고 해야 합리적이겠지.
변변찮은 작품하나 내지 못했고, 시인으로써도 등단 이후 5년 동안 성과를 본 것이 없다.
희곡의 대가를 스승으로 모셔 공부했지만 졸업 이후엔 역시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다.
 
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소설을 써서 보여주었었다. 녀석들은 재미있다고, 네가 쓴 거냐고 칭찬해주었다.
딱히 내 새울 것 없고, 숨기고 싶기만 한 유년시절을 보낸 나에게 이런 사소한 것들은 큰 중대사였다.
난생 처음 타인에게 인정받았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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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라는 제목도 짓고 1인칭 시점의 서술을 활용하기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가 그것을 어떤 계기로 쓰게 되었는지, 어떻게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는지 상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은 확고하다.
 
 
중학교 시절 미친 듯이책을 읽었다.
무협’ ‘판타지’ ‘만화를 책방에서 빌려보다가 고상하다는 인문학과 순수문학의 장르까지도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 때는 책 읽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들로 가득했었다.
그들에게 나는 글을 써서 보여주었고 평가받고 역량을 키우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물론 친구들의 평가는 주로 박했다만, 즐거운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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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시인으로 등단하는데 성공했다.
애초에 소설작가가 되려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문학의 한 부분으로써
시를 이해하고 쓰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해에 나는 꽤 많은 것들을 했다.
열심히 운동을 하여 복싱대회에서 2등을 했고, 다니던 교회에서 ‘스리랑카로 떠나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었다.
 또한 책의 장르의 폭을 넓혀 고전철학’ ‘신학’ ‘심리학등등의 인문학을 엄청 읽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가장 기쁘고, 힘들었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게 문학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책을 읽는 것을 기쁘게 여기시기도 했지만 너무 빠지지 말라 당부하시기도 하셨다.
그분은 내가 힘든 일을 하지 말고 공무원이나 법조인이 되어 편하게 일하라고 어렸을 때부터 누누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뿐인 독자가 초토화된 한국문학에서 밥을 벌어먹겠다고 하니 얼마나 참담하셨을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때 당신이 내뱉은 한숨을 이 가슴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안방에서 일렁였던 그 공기와
아주 잠깐이지만 단절된 것 같았던 부자의 연, 크나큰 실망의 한숨…… 여전히 선명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시인으로 등단했고 아버지는 그 뜻을 굽히셨다.
결국 나를 응원하시기로 결정하신 것 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 차 조수석에 숨겨져 있던 내 첫 동인지를 발견했다.
내 처녀작이 수록된 계간지인데 그것을 차에 두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그때 생각을 하면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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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나는 병을 앓았다. 심장병, 정확히는 이형 협심증이었다.
심장의 근육으로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자기 멋대로 수축하여 피를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병이었다.
일시적으로 혈관을 넓히게 해주는 약이 있어 일상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젊은 나이에 그것은 충격적이며 괴로운 일이었다.
완전히 낫게 해주는 약도 없고, 밤마다 불안감에 떨며 잠을 설쳐야만 했다.
 
대학교 1학년. 나는 예술학교에 진학했다. 애초에 대학을 다닐 생각이 없었는데,
교회에서 연극을 하고나서 이것이 전문적으로 배우면 꽤 재밌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수능을 보지 않았는데도 학교를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나는 내 등단경력을 통해서 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교수님은 대학로를 쥐고 흔들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신 연출가이자 희곡작가셨다.
그분의 실력은 대단했고 그 글들을 읽으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는 글을 한편씩 써 오라는 그분의 수업에 글을 써갔다. 같은 조 동기들과 몇 줄 읽지도 못하고 퇴짜를 맞았다.
그리곤 정확한 분석과 비판으로 내 글에 칼을 치셨고 결론적으로 쓰레기라는 판단을 하셨다.
옆의 친구들은 교수님이 너무하신다고도, 내 심정을 위로하기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그분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맞았고 내 글에는 개연성과 대사다운 대사가 없었다.
새로 써서 다음 주 수업에 참여했다. 자신감이 있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내 글에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넘쳐났고 수정도 불가능할 쓰레기였다.
 
그렇게 1학년 내내 그 수업에 나는 글 한편 제대로 제출할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수업날 처음으로 교수님이 내 글을 끝까지 읽으셨고 수정을 허락하셨다.
수정을 하면 쓸 만하겠네.’ 라는 말씀이지만 너무 기뻤다.
수정하고 배우들을 모집하고 동기가 연출하여 대학로에 연극으로써 올리는데 성공했다.
후에 회식자리에서 교수님은 막걸리 한잔 들이키시더니 모두 앞에서 내 오기와 노력을 높이 사셨고 결국 극을 올린 나를 칭찬하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었다. 모두의 격려 속에서 나는 행복을 느꼈다.
 
 
나는 그 시절 사랑을 했다.
남중남고를 나와서 여성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환상만 가져왔던 내가
분에 맞지 않는 사람을 보고 반했다. 아버지 역시도 연애는 대학에 가서하라고 하셨기에 거리낌 없이 그 여성에게 대쉬했다.
 
세 살이 많은 누나였고 하얀 피부에 매력적인 성격, 톡톡 튀는 정신세계를 가졌던 사람이다.
성인이 되었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느끼는 이성적 감정이라 그런지 꽤나 병적이었던 것 같다.
당신은 내 내면과 진심을 알겠지만 나를 사랑하기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했다. 그것은 스스로도 알기 어렵다 말했다.
점차 알아가며 진짜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꽤나 중요한 말이었지만 그것을 너무 쉽게 여겼던 것 같다.
연애를 하다보면 점점 사랑이 생긴다는 흔하고 보편적인 말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당신은 오랫동안 나를 사랑하지 못했고, 나는 그런 당신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그것은 많은 트러블을 만들었고 서로를 할퀴고 아프게 했다.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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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매미처럼 원 없이 울고 싶다
나 여기 아파하고 있노라
그렇게 울다보면
텅 비어버리고
가을에 밟혀 사라져질까
 
<허물>
 
 
자살을 선택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 속에서 이성적 판단이 흐려졌고 극단적인 감성적 판단이 전체를 지배했다.
분노를 풀 대상은 그녀였고 이 상황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풀 수 없어 스스로에게 칼끝을 돌린 것이라는 진단이 있었다.
그 말대로 나는 심장약인 니트로글리세린을 치사량 이상으로 복용했고 병원에 실려 갔다.
고통스럽고 역겨운 위세척을 통해 목숨은 건졌지만 정신은 송장이었다.
황천에서 육신은 건졌으니 돌아온 이성적 판단은, 망가지고 박살난 감성과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정말 잔인한 것은 시일이 지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온전해지는 정신이었다. 심리치료와 교회 예배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것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무척 괴로웠다. 내심으로는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누군가 안아주고
그녀가 관심을 던져주길 바랬던 것인데 정신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좀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과정을 살펴보아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솔직히 연륜이나 지혜가 있다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 분은 일찍이 어른이 된 사람이었다.
 
수척해진 몰골이지만 그 분을 만나 조언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의 내가 있게 한 말이었고 어린아이였던 나를 한층 더 어른으로 성장시켜준 말이었다.
나는 내가 어른인줄 알았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장성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리고 유약하기만 했던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멀리 가버린 그녀를 그만 놓아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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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이 다해 마침표를 찍었다
미련이 남아 마음을 때지 못하고
, 여운 한줄기 흘렸다
 
. 너는 그 간결한 단말마처럼
더 이상의 여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 행복한 쉼이었으니
. 너를 찍어야겠지
 
<,.>
 
 
이별이든 만남이든 그리움이든 그 어떤 것이든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시절에 가득 찰 때면 시가 써졌다.
시인으로써 그것들을 승화시킬 수 있다는 특권에 감사했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성장하고 조금 더 안정적인 감성과 뚜렷한 이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정한 문학의 길이었다.
온전한 정신을 보유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허점투성이의 글이 될 거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책도 열심히 읽고 경험도 최대한 많이 쌓으려 노력했다. 놀랍게도 어느 날 나를 사랑한다는 여자가 나타났다.
학벌도 좋고 외모도 아름다웠으나 성격이 유약하고 심성이 착했다.
아쉽게도 그녀의 외면과 달리 내면은 내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혜롭고 생각이 깊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그러면서도 약간의 특이하고 밝은 성격을 원했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나기로 했다.
 
내가 처음 사랑한 여성에게 바랐듯 만나다 보면 사랑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에게 보란 듯이 싹을 틔우길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했다.
    
 
나는 그녀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손잡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고풍스런 술집에서 칵테일을 마실 때도, 같이 영화를 볼 때도,
서로의 혀를 탐닉하며 키스를 할 때도, 잠자리를 같이 할 때도
그 어느 때도 그녀를 사랑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헤어졌다.
 
그것이 내 이상형이 아닌 그녀의 문제라 치부해왔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랑에 상처받은 마음이 더 이상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마음을 줄 수가 없었다.
내 문학도 단절되기 시작했다.
시는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았고 글의 소재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에 가슴아파하고 조금씩 성장하고 보아하니 어느덧 스물하고도 셋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제의를 받았다. 함께 글을 써서 영화를 찍자는 제의,
장르문학 출판사에서 잘 팔리는 판타지를 써달라는 제의, 연극을 하자는 제의 등등.
 
하지만 다 거절하고 큰 회사에서 좋은 프로젝트를 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기를 당하고 돈만 뜯겼다. 문학에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내가 원하는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었고 출판사는 무명작가의 글을 선뜻 출판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르 문학을 쓰기엔 탐탁지 않았다. 그것의 본질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장르 문학시장은 비판받아 마땅할 수준까지 타락했다.
물론 여전히 소신을 굽히지 않는 작가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대부분 그러했다.
 
 
갈 곳이 없었다.
쓸 글이 없었다.
 
 
조금은 허망했다. 열심히 배우고 글을 써왔는데 일자리가 없고 내 글을 받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 좋은 글을 써서 모든 난관을 부수고 당당하게 성공할 자신도 없었다.
내 머리는 더 이상 좋은 글을 써낼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이 글도 그냥 주절주절 쓰는 글이지만 작가의 글이라기엔 형편없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단어를 고치고 문장을 바꿀 생각은 없다. 나는 완벽한 문장을 중시해왔지만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수고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숨김없이 그냥 그대로, 흐르는 것을 따라 쓰는 것은 어떨까?
다보면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뭐든지 쓰다보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온전한 정신과 완전한 문장으로는 해답이 보이지 않아서,
그 반대로 달려가는 것 일지도 모른다. 해답은 어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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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상업영화의 막내로써 일을 하다가 결국 군대에 들어갔지만.
심장을 옥죄는 병 때문에 입영심사대에서 떨어져 4급판정을 받고 귀가해야만했다.
글을 써야하는데 그것이 내 소명이고 비전이라 여겼는데,
나는 재주가 있다고 믿고 달려왔는데
손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톨스토이나 C.S 루이스, 톨킨처럼 위대한 대문호가 되고 싶다는 꿈
심지어 그들을 뛰어넘어서겠다는
가상하면서도 오만할지도 모를 야망을 품었던 젊은 애송이가
자신의 재능이 사실 부족했음을 깨닫고 무너지고 있다.
 
마침 심장에 병도 있겠다. 포기하는 형태가 아닌 아쉽게 실패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건 어떨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긴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애송이의 꿈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랑하고 사랑해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귀한 문학,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꽃을 피워줄 아름다운 문학.
그런 것들을 꿈꾸고 싶었다. 사랑도, 어떠한 영감도, 신도 찾아오시질 않는 이 인생에서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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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작가…… 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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