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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정치'의 소멸을 기원하는 멍청한 시장주의자들을 위하여
게시물ID : sisa_4904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
조회수 : 51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3/02 03:06:17



Written by 무명논객


요즘 들어 근래 멍청이와 거의 동급의 언어로 취급할 수 있는 자칭 '합리주의자' 내지는 '자유주의자'들, 정확히 말하면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는 저 바보들을 향해 해줄 말이 무엇일까 싶어서 몇 차례 넘어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한 가지다. 이들은 '정치'를 모른다. 혹여 안다하더라도 정치는 시장의 하위기능에 불과하며 시장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바보들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이에, <정치학>의 대부이신 아리스토텔레스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멍청한 시장만능주의자들이여, 부디 교양 수준의 정치학이라도 공부해보시라.



아리스토텔레스…?


지난 주에 다루었던 '플라톤'이 매우 이상주의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는 정 반대로 지극히 현실주의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간략한 개괄을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으며, 헤겔은 그를 "역사상 가장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학문의 천재"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서구 학문의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사학』이라던가 『정치학』, 그리고 『윤리학』의 모태는 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시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 저작인 『수사학』은 논리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저서로써 자리 매김하였다.─'에토스', '로고스', '파토스'라는 단어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전방위적인 학문적 성과를 남겼으며, 우리가 그 기반 위에 서 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특히, 『정치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매우 눈여겨볼만 하다. 숱한 철학자들, 사회과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것에서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적인 사상들을 개괄적으로 훑음과 동시에 그의 정치학에 방점을 찍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현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적 관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예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에서, 플라톤의 주장─미메시스, 즉 모방을 모방하는 것─을 비판하며 미메시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메시스란 단순한 모방행위가 아닌, 본질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동시에 보편자의 표상이다. 즉, 예술행위란 인식 행위의 기본임과 동시에 즐거움을 제공하는 유희활동으로 정의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단명한 대목이라 볼 수 있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란 이성으로써 인지되는 것이며, 만물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데아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즉 플라톤이 선험적인 공간, 초월적 공간을 강조하며 경험 가능한 모든 것을 단순한 모조품으로 취급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선을 전환시켜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고 있는 세계, 지각할 수 있는 세계를 자신의 사상의 모태로 삼고 있다. 라파엘은 벽화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10)을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의 차이를 단적으로 표현하였다. 플라톤은 자신의 검지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대지를 감싸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1 이것의 정치철학적 의미는 이렇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에 근거에 모든 면이 출중한 철인이 통치를 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발상을 보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경험하고 지각할 수 있는 관습, 법, 제도 등을 정치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덕성을 지닌 시민들의 정치"를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은 "실용철학"이라 불리울 수 있으며, 그의 실용철학은 다시 「윤리」와 「정치」의 영역으로 나뉜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려고 시도했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도덕, 윤리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본디 '정치' 또는 '정치학'을 의미하는 'Politics'라는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원제, 『ta politika』(폴리스와 관련된 공적인 것)에서 유래한다. 또한 '윤리'를 뜻하는 단어인 'ethics'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원제, 『ethika』(인륜, 관습에 관련된 것)에서 기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한 관심사는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두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행복의 조건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행복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며, 따라서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윤리적 삶, 즉 '좋은(good)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정치란 좋은 삶과 관계 되는 것이며, 이러한 '공적인 것' 외에도 사적 영역, 즉 개인적 삶에서 '윤리성'을 함양하여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모든 최고의 덕성들을 '아레테(arete)'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러한 덕성을 함양하기 위한 실용적 방법을 제시하는 방향으로써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던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이란 인간 행위의 최종목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최종 목적지로써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로 얽히고 설키는'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그 개인 역시 '이성적' 행위들을 통해 달성해야 한다. 행복이란, 그 자체로 인간행위의 최종 목적임과 동시에 자기 완결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최종목적은 타인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입각해서" 장기적으로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다.2


서양의 근대 철학들이 대부분 '행복'의 조건을 개인 차원에 우위에 두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조건으로써 '정치 공동체'의 성립을 전제한다. 즉 공동체 차원에서 행복의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인이 그 의지를 발휘하여 윤리적 삶을 실현했다 하더라도 최종 목적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는 궁극적인 수단이며, 최고의 기술이 된다.─좋은 삶과 전혀 연관되지 않는 이익 다툼만 난무하는 현대 정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치'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것이다.


정치학의 시작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익숙하고 유명한 말, "인간은 본디 정치적 동물이다."는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을까? 근대 자유주의 정치학을 정초하였다고 여겨지는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명제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근대 자유주의 정치학은 완전히 고립된 개인들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인간은 본디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고 시작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비판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금 과잉해서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명제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따라 정치학의 방향이 달라진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3


근대 자유주의 정치학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 자체를 걸고 넘어지지는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본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홉스의 경우, 정치의 성립을 권력과 국가의 성립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국가와 권력은 자연상태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피한 인민들이 리바이어던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 된 것은 철저히 이러한 국가와 권력이 수립함으로써 벌어진 것이므로 인위적인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명제가 옳은가, 혹은 그것에 답할 수 있는 질문이나 반론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저 명제가 정치학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과 대비되는 자신의 정치철학적 사유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행복을 실현하는 최고의 기술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정치를 구성하고 있는 '폴리스'는 각 개인과 개별 공동체를 이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끈, 다시 말해 인간이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점은 정치를 통한 진정한 행복의 실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와 '행복'이라는 가치의 연결은, 다시 말해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다시 한번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명제로 회귀한다. 가치 있는 삶의 선택 문제, 그리고 그러한 가치 있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의 선택 및 변화 방향과 가능성에 대한 사유는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4


종합 : 우리에게 정치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비록 발제문이라는 성격상 개괄적으로 훑기는 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에 대한 사유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조금 비꼬는 말로,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몇 권 필수로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간단한 질문으로 이 발제문을 끝내고자 한다.─"올바른 정치란 무엇인가? 그리고, 정치는 올바름을 이룩할 수 있는가?"



  1. 『OUGHTOPIA :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 윤리와 정치의 결합을 중심으로」, 장준호, 경인교대, p.30 [본문으로]
  2. 같은 논문, p.33 [본문으로]
  3. 「도덕 교육 연구」 제 24권, 3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정치학과 정치학적 형이상학」 조영태, 우석대학교, 한국도덕교육학회, 2012.12, p.2 [본문으로]
  4. 「행복의 정치 :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에 나타난 철학적 삶과 정치적 삶의 의미」, 박성우, 중앙대학교, 한국정치학회, p.1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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