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당신의 웃음 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었던 것들을 찢어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 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이윤학 / 첫사랑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 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서정홍 / 기다리는 시간
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사람을 기다리다 보면 설레는 마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 생각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람을 기다려 주는 일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다음에 또 기다려 주는 일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서덕준 / 병
이렇게 구름 한 점 없이 산들바람 부는 날 발 아래 민들레 한 송이도 이리 향기로운데
나 홀로 덩그러니 주머니에서 한숨 하나 꺼내 먹고 있노라니 사람 하나 사랑하는 것도 이 정도면 병이라 칭해야겠다.
함형수 / 해바라기의 비명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은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김경주 / 외계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영미 /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임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김용택 / 선운사 동백꽃
여자에게 버림 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 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