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강기슭에서 등을 말리는 오래된 폐선과
담장이 허물어져 내린 민박집들 사이로
하모니카 같은 기차가 젊은 날의 유적들처럼
비음 섞인 기적을 울리며 지나는 새벽
나는 한 떼의 눈발을 이끌고 강가로 나가
깊은 강심으로 소주 몇 잔을 떨구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섬세한 강의 뿌리
이 세상 뿌리 없는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물 위를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보았다
따뜻하게 안겨오는 강의 온기 속으로
수척한 물결은 저를 깨우며 또 흐르고
손바닥을 적시고 가는 투명한 강의 수화,
너도 ...살고 싶은 게로구나
깃털에 쌓인 눈발을 털어 내며 물결 위로 초승달
보다 더 얇게 물수제비뜨며 달려나가는 철새들
어둠 속에서 알처럼 둥근 해를 부화시키고 있었다.
서덕준 / 나비효과
당신은 사막 위 나비의 날갯짓이어요.
그대 사뿐히 걸어보소서
흩날리는 머릿결에도
내 마음엔 폭풍이 일고 나는 당신께 수몰되리니.
문숙 / 첫사랑
공사중인 골목길
접근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 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서안나 / 모과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 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지.
류시화 /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의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 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ㅏㄻ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결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서덕준 / 외로워
같이 울어줄 사람이 필요해
나를 안아줄 사람이 필요해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밤
시조차도 써지지 않는 밤
낡은 연습장을 하나 찢어
「외로워.」세 글자 쓰고 나서
한참을 울었다.
안수동 / 장마
줄창 울고는 싶었지만 참고
참은 눈물이 한번 울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춰 지지가 않는 거지
누군가의 기막힌 슬픔은
몇 날 몇 밤을 줄기차게 내리고
불어 터진 그리움이 제살 삭이는 슬픔에
이별한 사람들은 잠수교가 된다
해마다 7월이면
막혀 있던 독들이 젖어
매일 하나씩 터지는 거지
박지웅 / 택시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서덕준 / 별똥
그래, 힘들었겠지
누구도 보지 않는 저 골목 어귀 쯤 어딘가에서
홀로 무장무장 몸뚱아리는 태워도
돌담을 거닐던 길고양이만이 눈길을 주었을 뿐.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이제는 지쳐버렸겠지.
다시는 볼 수 없어도
별똥 떨어진다는 한 마디에
고개라도 들어줄까 하는 먼지같은 설렘으로
결국 울며울며 지평선으로 사라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