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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군제개편(5) : 아관파천 이후 ~ 대한제국 선포 이전
게시물ID : history_75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댓글매니아
추천 : 5
조회수 : 115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2/06 17:23:47

1. 정책의 배경


  자국의 국모가 궁궐에서 버젓이 살해당하고 인천에 대기 중이던 일본군이 서울로 행군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하는 상황 속에서 당시 고종이 받았을 심리적 압박감은 가히 엄청났을 것입니다. 게다가 내부 정계도 이미 친일내각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이들 친일내각은 단발령을 통해 봉기한 의병들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중앙군의 주력부대인 친위대마저 지방으로 출동시키면서 고종은 완전히 친일내각 속에 둘러싸여 홀로 남겨진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당시 그가 느꼈던 불안감이 어느 정도였냐면 궁중에서 올리는 음식에는 독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아예 미국 공사관이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만든 음식을 밀폐된 용기에 담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결국 고종이 대응책으로써 택한 방법은 자신의 거처를 당시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러시아 공사 웨베르 공사의 영향 속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 이후의 일본군의 무력시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이후 친일내각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령을 내리고 일본의 영향력 하에서 시행되었던 갑오 및 을미개혁을 비판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책의 추진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아관파천 이후부터 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의 군제 개편천은 자주적인 성격을 띄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가미된 방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2. 정책의 추진


  이 시기 정책의 추진은 앞서 있었던 갑오 및 을미개혁 때와 같이 대대적인 군제 개편의 단행보다는 기존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일환으로 우선 중앙군의 강화에 나서게 되는데 이는 단발령의 폐지와 함께 지방으로 파견 나가있다가 다시 되돌아온 친위대를 재편성하고 과거 을미사변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받으며 폐지되었던 시위대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여기서 시위대의 경우 기존의 시위대와는 다른 것이 기존 시위대의 경우 미국인 교관에 의해 양성되었던 반면 새롭게 부활한 시위대의 경우 러시아 교관으로부터 군사훈련을 받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론의 요구에 따라 환궁 이후에도 고종은 이러한 중앙군의 재편성 및 강화 작업은 계속되어 친위대의 경우 그 병력과 규모가 대대적으로 증강되어갔으며 이러한 중앙군의 강화와 함께 중앙군의 일부로 국왕 호위부대인 호위대를 새롭게 창설하여 경호를 강화하고 나아가 아관파천 이후 실추된 국왕 권위 회복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중앙군의 개편이 이루어지고 있을 쯤 지방군에 대한 강화 작업에도 착수하게 되는데 이는 일부 지역에만 설치되었던 진위대를 전국적으로 확대 및 증설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1896년에 설치된 13개의 지방대 중 9월 24일 칙령 제63호에 의해 7개가 폐지되어 위축되었던 것을 다시 8곳에 추가 설치하여 1897년도에 들어 최종적으로 14곳으로 증강되면서 지방군 또한 어느 정도 자리잡아가 갔던 것입니다.

  한편 중앙군과 지방군의 증강 작업에 이어 러시아 군제의 수용도 이루어지는데 이는 조선정부의 러시아 교관 파견 요청과 함께 이루어지게 됩니다. 러시아와의 협의 끝에 결국 조선에는 4명의 러시아 장교와 10명의 하사관으로 편성된 러시아 군사 교관단이 조선으로 파견되며 이들은 이후 조선의 중앙군 현황을 파악한 이후 친위대 5개 대대에서 800명의 군사들을 선발하여 1896년부터 러시아식 군사훈련에 돌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추가로 200명을 선발하였으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훈련을 받은 인원 중 하사관과 병졸을 포함하여 다시 100명을 추가 엄선, 이들을 다른 부대로 파견하여 교관요원으로 활용하려고 계획, 군인들의 병영 내의 내무생황을 지도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내무생활 교범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하는 등 러시아 군제는 점차적으로 군사훈련에만 도입된 것이 아니라 군인들의 내부 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체계적으로 확산되어 갑니다.


     

<러시아 교관에게 훈련 받고 있는 시위대, 맨 오른쪽 인물이 러시아 교관>


3. 정책의 한계


  이 시기는 비교적 이전 군제 개편과 달리 고종의 자주성이 많이 반영된 군제 개혁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러시아 군제 도입이나 영향력이 강해지기는 하였지만 이전의 청나라나 일본의 간섭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다만 이 시기에 보였던 정책이 한계점은 바로 러시아 교관들과 조선인 교관들이나 군부의 관리들과의 대립, 그리고 군제 개편 과정에서 보인 러시아의 야욕 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러시아 교관들과 조선인 관리들과의 대립의 경우를 먼저 이야기해 보면 러시아 교관들이 확립해 놓은 경리 업무로 인해 병사들의 봉급을 착복할 수 없게 된 관리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보다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음에도 이러한 사태로 인해 반감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이는 아직 조선의 관리들이 군대에 대해 당시 가지고 있던 인식의 한계점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어 군제 개편 과정에서 보인 러시아의 야욕의 경우 당시 러시아가 중국과 만주,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친러 성향을 띈 부대 양성과 더불어 조러연합군의 형성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친러 성격의 군대를 조선 내에서 양성하여 유사시에 중국이나 기타 전장에서 지휘하겠다는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순히 조선 중앙군의 양성이라는 수준에서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계획은 당시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관심이 거의 부차적인 수준이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보다 중국과 만주에 집중하고 있었던 상화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문제는 이러한 여건을 조성하였던 것이 바로 조선 정부라는 것입니다. 군제 도입 과정에서 군사 훈련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러시아 교관단에게 일임하여 조선군이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영향력을 받는데 있어 조선 정부가 유도, 또는 방치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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