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무당에 대한 얘기는 많지만 정확한 기록은 거의 전무한 편입니다.. 유럽등은 영적 현상과 영능력자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가 시도 되지만 우리 나라는 미신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별다른 기록도 없는 편이죠..
무당은 고소선 이전부터 내려오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신앙 체계 입니다.. 무당들은 신을 모시는데 이때의 '신(神)'들은 신성한 영인 신령으로 불립니다..
신령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종류와 성격을 달리하며, 또 외부와의 접촉으로 이전에 없던 신령이 들어와 새로운 신령으로 섬겨지기도 합니다.
한국무에서의 신령은 자연신, 조상신, 지역 및 개인의 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갖습니다. 또 특수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신령(예컨대 예능의 신령인 창부)이 있고, 최영장군과 같이 민중의 비원과 애환을 대변하는 역사적 인물이 신령이 되기도 하며, 전국적인 재난을 계기로 해서 신령(호구나 마마)이 생겨나기도 하죠,,
신령들은 나름대로 위계질서를 갖는데, 이는 대개 그 신령들을 몸주로 모시고 있는 무당들의 계급과 일치합니다. 첫째로 선관·보살 계급이 있는데, 여기에는 하늘(옥황상제·부처님·삼신제석), 땅(산신), 바다(용왕), 별자리(칠성), 자연현상(벽력신) 등이 주로 포함 됩니다.
다음으로는 전내 계급이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인물이나 도교 계통의 신령이 많습니다. 관운장이나 오방신장이 대표적인 예죠..
세 번째로는 박수·만신 계급의 신령으로, 최영 장군, 별상, 군웅, 창부, 호구, 대감 등이 그들입니다.
네 번째로는 뒷전 계급으로, 걸립·말명·서낭 등 잡귀 잡신의 범주에 드는 신령들이죠. 일월명두와 칠성명두가 대표적이며 신체(神體)로서 숭배됩니다.
다섯번째는 넋대신 계급으로 있는데 주로 궂은 일(초상,굿)과 관련된 신령으로 시왕(십대왕), 사자(사재)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 아래는 주로 어린아이의 영혼인 태자귀를 모시는 태주방과 명도 계급이 있죠.
그러나 신령과 무당의 위계가 이와 같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계급 분류는 곤란합니다. 한 무당이 칠성과 최영 장군을 같이 모실 수 있고, 걸립과 시왕을 동시에 모실 수 있다는 있기 때문이죠.
신령은 대개 화본(무신도)의 형태로 모셔지나 조각상이나 자연물이 되기도 합니다. 또 종이에 신령의 이름만 적어 모시기도 하며, 심지어는 신체가 없이 장소 (안방의 아랫목 천장 부분 하는 식으로)를 마음으로 꺼려하고 정성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의외에 무속인들을 성격상으로 분류하여 무당형, 단골형, 심방형, 명두형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무당형은 자신이 특별한 강신체험을 겪은 후 성무의식인 내림굿을 통해 무가 되어 춤과 노래로 굿을 주관하고 자신의 몸주신이 내려주는 영력에 의해 점을치며 예언 합니다다. 옛날에는 중부와 북부지방에 분포되어있는 무당, 박수등을 무당형으로 구분하였지만 현재에는 전국적인 분포를 고르게 보이고 있습니다.
단골형은 혈통에 따라 대대로 사제권이 계승되어 인위적으로 무당이된 세습무로서 어릴적부터 기예를 배우고 익혀 신을 모시진 않고 자신만의 춤과 노래로 굿을 주관 합니다.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강원도지역의 화랭이와 진도의 씻김굿을 주관하는 단골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심방형은 제주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무당형과 단골형의 중간형으로 영력을 중시하고 신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나 신이 직접 몸으로 강신하지 않고 굿을 할때 영통이 없이 무점구들을 통해 신의 뜻을 물어 간접적으로 전달 합니다.
명두형은 어린아이가 죽은 혼신인 태자귀등을 몸에 실려 점을 치는 강신무 입니다. 이들은 어린아이의 목소리나 휫바람 소리등으로 혼을 부르며 영력이 뛰어나지만 굿을 주관하기 어렵고 귀신의 장난에 휩슬리기 쉬운 무의 형태 입니다.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분포를 보이며 명두, 태주, 동자, 선녀등으로 불립니다.
이상의 구분이외에도 요즘은 여러 형태의 무가 만들어 지기도 합니다. 불교와의 습합을 통하여 보살형, 법사형이 생겨났고, 역술의 급속한 보급으로 역학을 하는 이가 신령을 받들어 역술형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우리나라의 귀신은 흔히 죽은 사람이 지상에 남은 부정된 혼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범신론적인 샤머니즘에서 만들어진 존재 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도깨비 같이 자연,사물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종류도 다양하고 오랜 옛날부터 익숙하고 친근한 존재로 인식 되어 왔죠..
<명도> 3세 미만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의 죽은 귀신이라고 하는데, 보통 영매들이 이 귀신을 접하면 말은 하지않고 휘파람이나 여러 손짓 말짓을 한다고 합니다
<동자 동녀> 대략 5세에서 15세 사이의 귀신들로 주로 무당의 몸을 빌려서 나타나는데 이 귀신을 받은 무당들은 어린아이의 말로 자신의 의사를 전 한다고 합니다 신통력은 강하지만 자신의 기분따라 행동 하고 인간에 대한 정이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변덕이 심하다고 합니다..
<태자귀> 세상에서 말하는 '태자귀'는 '어린아이 귀신'으로 주로 낙태나 아사로 한을 지고 죽은 아이의 원귀를 가르 킵니다.. 이것이 '태자'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옛날 중국 진의 태자 신생(太子申生: 춘추시대 진 헌공이 려희를 사랑해 그 아들 계제를 세우고 태자 신생을 내쳤는데, 려희가 신생을 모함해 죽게 했고 신생은 원귀가 되서 려희를 미치게 했다고 합니다)에게서 나왔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의 유혼체백(遊魂滯魄)-'혼(魂)은 날아가고 백(魄)만 엉긴 상태)으로 사람에게 붙어서, 사람의 길흉과 먼 곳의 일을 무당의 질문에 따라 응해 알려준다고 합니다.
이 어린아이의 유혼체백이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방문해, "제자가 되어 드릴까요?"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는데, 이때 그 집 부인이 "그렇게 하라."하고 응답하면 이 아이귀신은 곧 붙어서 떠나지 않게 되고, 그리고 그 부인은 태자귀가 붙은 무당이 됩니다.
이 경우, 다른 아이귀신이 집을 방문해 몇 번을 불러 물어도, 집안 부인이 응답하여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붙는 일이 없습니다.
이익[李翊, 1629~1690-현종때의 문신] 의 친척 부인 한 사람이 이 아이귀신의 물음에 장난 삼아 대답했다가, 태자귀신이 붙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쫓으려 해도 되지 않고 기어이 병이 심해져 죽었고 합니다. 이럴 경우 굿을 하고 태자귀신을 모신 다음 무당이 되면 부인이 죽지 않지만 양반 가문에서는 무당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 습니다..
우리나라 무당 중에서 태자귀 무당이 단연 많고, 또 태자귀 무당의 점이 잘 맞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선지 태자귀를 인의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다소 끔찍한 방법입니다..
무당이 아이를 데려와 좁고 햇빛이 닫지 않는 곳에 가둬서 몇일을 굶깁니다.. 그럼 아이가 배고품에 울다가 거의 실신지경에 이르면 먹을것을 아이앞에 갖다 놓는데 아이가 힘이 없음에도 음식을 먹기위해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잘라 아이의 넋을 손에 봉인한후 시체는 48조각으로 잘라 태운후 손을 작은 괘짝에 놓아 99일이 있으면 아이의 영혼을 조종할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기록서나 1976년경 신문에 실제 아이를 납치해서 태자귀를 만들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귀신편
<몽달귀신-도령신> 이름은 좀 얄궂어도 총각귀신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제사를 얻어먹지 못해서 한이 남은 고혼으로 손 말명에 비하면 인지도가 약하지만 원귀(寃鬼)가 되어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상사병에 걸려서 죽은 총각귀신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 때문에 처녀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무당이 다른 처녀귀신과 사혼식(死婚式)을 열어줘 죽은 총각의 한을 달래주는데. 비록 귀신들끼리 하는 결혼식이지만 궁합을 봐서 혼례날도 정하고 한지로 만든
허수아비 인형을 만들어 합방까지 시켜줍니다.
조선시대 황진이(黃眞伊)와 관련된 몽달귀신 사례가 유명한데. 평소 황진이를 흠모하다가 자살한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멈춰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소릴 들은 황진이가 자기 속적삼을 주고 위로하자 상여가 다시 움직였다고 전해집니다..
<손말명-처녀귀신> 총각은 그래도 나름대로 바람이라도 피워봤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예전의 처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처녀로 죽으면 너무나 억울해서 도저히 그냥 떠나지를 못하고 원한이 남은 귀로 한이 귀기로 응집되어서 자신의 집 식구들을 저주하거나 자기 또래 혼기가 차있는 처녀에게 해를 끼친다고 합니다.
일단 손말명이 쳐녀 몸에 붙으면 처녀는 이를 떼기 위해 기도를 하고 여러가지 공물을 바친다고 하는데. 무녀는 처녀의 의복을 빈방에 쌓아두게 하고 주야로 치성을 들입니다.
손말명이 처녀의 몸을 떠나 처녀의 옷에 옮아붙도록 하기 위해서이죠.
더구나 처녀의 영혼들이 실은 가장 말썽을 부린다고 하는데, 영적 힘도 강하고 여간해서는 말도 잘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처녀가 죽으면 손말명이 되지 않도록 남자 옷을 입혀 거꾸로 묻거나, 가시가 돋친 나무를 관 주위에 넣고 매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사거리의 교차점이 되는 곳에 시체를 은밀히 매장하여 많은 남자가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처녀귀신의 못다 푼 정을 달래
는 풍습도 있었죠..
또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부정되고 억압됬기 때문에 처녀 귀신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더 무섭게 느껴 졌습니다..
<선관도사> 대체로 결혼을 하고 자녀을 두고 살다가 떠나게 되면 그렇게 집착을 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만, 그래도 뭔가 한이 남은 영혼은 이렇게 선관도사라고 하는 이름으로 이승에 남아 무녀의 몸에 실려서 남의 길흉사를 예언 해주고 호구지책을 삼는 다고 합니다.. 원한이 약해서 위험한 귀는 아닙니다..
<선녀부인> 일단 자녀를 두고 죽은 여성 귀신을 얘기 합니다.. 대체로 선관도사랑 비슷 합니다..
<나무귀신> 한국의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큰 고목을 당목(당산 나무) 또는 도당목이라 하여 마을 전체가 그 나무를 위하 고, 명절·산신제·기우제 등을 지냈습니다..
평소에도 그 나뭇가지를 꺾는 일은 없고 제사를 지낼 때는 금줄을 치고 주변에 황토를 뿌리는 등 정결하게 합니다..
정약용은《산림경제》에서 오래된 나무에는 귀신이 모여든다 하였고, 중국의 고대전설에는 동해 가운데는 도삭산이 있고 그곳에는 도대 목이 있는데 그늘 넓이가 3,000리에 걸쳤다고 하며 여기에 귀신 의 무리가 모여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무자귀> 무주귀라고도 하는데, 자손이 없는 사람이 죽으면 제사를 지내 줄 사람이 없어, 망령이 위안을 받지 못하고 고독과 불만 속에서 지내게 되므로, 이러한 영혼은 원귀가 되어 온갖 심술궂은 가해행위를 자행한다고 여겼습니다..
몽달귀신도 무자귀에 속한다고 합니다..
<수사원귀-물귀신> 대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물 속에 있다가 다른 사람을 잡아당겨 익사시킨다고 합니다. 예로부터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면 그 곳에 고사굿을 지내고 물귀신을 위안하여 발동을 막으려는 풍습이 있었죠,, 한국에서는 사해신이라 하여 동해신은 강원 양양에서, 서해신은 황해도 풍천에서, 남해신은 전남 나주에서, 북해신은 함경 경성에서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지냈으며
칠독신이라 하여 전국의 이름난 7곳의 나루터, 즉 서울의 한강, 평양의 대동강, 의주 의 압록강, 공주의 웅진, 장단의 덕진, 양산의 가야진, 경원의 두만강 등에서 춘추로 오색축폐를 물 속에 던지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목적은 수재를 없애고 강물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용신에게 비는 데 있었습니다. 용신도 크게 보면 물귀신의 일종이죠.
<미명귀> 전처가 죽은후 남편이 후처를 두자 전처의 영이 질투 때문에 후처에게 붙어서 괴롭히는 귀를 가르킵니다. 후처가 병이 들게 되었을 때에 미명귀의 짓이라 하여 무당을 불러 귀신을 달래는 굿을 하였습니다
또는 근본적으로 퇴치한다 하여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화장하고 큰굿을 하기도 하였죠..
원래 미명귀는 남의 아내로 젊어서 죽은 여자의 귀신을 가리켰으나 점차 그 뜻이 확대되어 억울하게 죽 은 사람의 귀신 ·처녀귀신 ·총각귀신 ·청춘 과부귀신을 통틀어 이르게 되었습니다..
<새타니> 새타니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굶어죽은 아이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제주도 설화에 새타니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전역을 돌며 소금을 팔던 소금장수가 집에 오니 아내는 옆집 남자랑 눈이 맞아집안의 폐물을 갖고 도망가고 그의 젖먹이 아이는 굶어서 죽어 있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소금장수는 반쯤 실성한체 아이의 시체를 소금자루에 절인체 자루를 메고 전국을 떠돕니다..
그후 3년뒤 한 부자의 소실이 되서 잘살고 있는 아내를 발견한 그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아내앞에 소금자루를 집어던지자 아이의 시신이 썩지도 않은체 어미를 향해 조금씩 기어왔고 그 모습을 본 아내는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내용으로 썩지 않은 아이의 시신은 소금에 절여졌기 때문에 미이라화가 된거라고봅니다..
이렇듯 세타니는 어미한테 버림 받아 굶어 죽은 아이의 원귀를 가리키는데 태자귀보다 능력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새우니> 새우니는 원래 무당이 사역한 귀신이 영적 능력을 쌓아 진화된 악귀로 작게나마 날씨도 변화시킬 정도로 능력이 쎄고 통제불능이라 자신을 부린 무당을 죽이고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외에도 원한이 너무 강한 경우에도 새우니가 될수 있습니다..
청구야담(靑丘野談)에 기록된 새우니의 내용을 보면 정조 8년에 평산 지방의 한마을이 원귀에 의해 질병이 퍼져 가축들과 사람들이 떼 죽음 당했다고 합니다..
새우니는 자아도 분명한데다 원하는 곳은 어디로든 갈수 있었기에 그냥 두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건 불보듯 뻔한 일이였습니다..
결국 여러 고승들과 무속인들이 나서서 마을에 진을 치고 몇일간 악전고투 한 끝에 새우니를 봉인 했다고 합니다..
봉인 하는 과정에 새우니의 살아 생정 모습이 투영 되는데 그녀의 생전 이름은 박소사 였고 18살에 시집와 몇개월후 살해 됬다고 합니다..
그녀를 죽인 사람은 그녀의 남편인 조광선과 박소사와 10살 차이 밖에 안나는 시어머니 최아지 였는데
최아지는 남편이 죽은후 양아들인 조광선과 간통을 했다가 임신을 하게 되어 아이를 죽였는데 그 광경을 박소사가 보게 되자 박소사 역시 죽이고 자살로 위장한 거였습니다..
박소사는 공식적으로 우리 나라 최초로 부검을 당한 시신이기도 한데 무려 두번이나 부검을 당했지만 결국 자살로 판명 됬고 이에 그녀의 원한이 쌓여 갔습니다..
결국 이 사실을 들은 정조가 직접 조사를 명하고 그녀는 10년 후에야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수 있었다고 합니다..
<손돌이 귀신>
남성풍신으로 전해지는 귀신으로 경기도 김포군과 강화군 사이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여울의 지명의 유래 이기도 합니다.. 손돌설화의 기본형은 손돌목·손돌무덤이 있는 강화·인천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왔다고 하죠..
고려때 원라의 침입으로 고종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습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하여 초지의 여울로 배를 몰았지만 마음이 급한 고종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때 손돌은 고종에게, 자신이 죽은 뒤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손돌을 죽이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고 고종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하여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습니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 10월 20일이었는데 그 뒤 이날이 되면 여울목에 매년 추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사람들은 손돌의 원혼에 의하여 부른 바람이라 생각하여 손돌바람이라고 부르고, 이 여울목을 손돌목이라 칭하게 되었답니다.
충청북도 영동지방에서는 10월 20일을 '손사공 죽은 날' 또는 '모진 놈 죽은 날'로 표현하여, 손돌귀신을 아주 무섭고 흉악한 모습으로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