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널 좋아할 수 있다
서덕준 / 선율
가로등 불빛이 달처럼 번지는 밤 나를 웃게도 울게도 하는 노래처럼
당신이란, 악보의 다섯 감각 위로 뿌려진 음표처럼 나를 수놓는 완벽한 선율이어라.
양해남 / 꽃
나에게 꽃이 있었지 어느 별 어린 왕자처럼 매일매일 물을 주고 항상 바라봐줘야 하는 꽃 한 송이 있었지
전윤호 / 수몰지구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전윤호 / 물귀신
내가 먼저 빠졌다. 만만하게 봤는데 목숨보다 깊었다. 어차피 수영금지구역이었다. 어설프게 손 내밀다 그도 빠진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서로 나가기 위해서 발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부서지는 고통을. 우리는 익사할 것이다. 바닥에 즐비한 다른 연인들처럼.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내가 먼저 빠졌다.
서덕준 / 나머지
그대 잊으라고만 하니 그저 잊어볼 밖에 없어 그리는 해볼진대 당신 향한 마음이 내 한낱 생애보다도 크니 그리움 덜다 못해 내가 먼저 없어지면
미처 잊지 못한 당신 마음 후에 거둬가십시오.
정호승 /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류시화 / 패랭이꽃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한용운 / 사랑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 말하리
서덕준 / 선인장
꽃집에서 선인장 하나를 얻어다 잘 보이는 창가에 두었다.
찾는 이 하나 없는 밤중에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아빠의 턱수염이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