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나왔어. 결정을 내린 시간이 늦어서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갈 수 있었어. 평소의 그녀라면 제시간에 딱 맞춰서 퇴근하지 않았겠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 이미 먼저 퇴근했다면 계획이 어긋날 수도 있어. 가게 안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 나와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어. 그는 남자였고 그녀의 남자친구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기 싫었어. 그녀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고, 그가 남자친구가 맞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어쩔 수 없이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어.
다행히도 그녀를 만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다만 그녀가 바라보는 곳이 그라는 것을 알아보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그가 그녀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 준다면 꿈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를 아직 신뢰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들을 따라갔어.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 이런 스토커 같은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짓을 해야 하지. 어떤 일이 생기든 그녀가 나보다 더 수월하게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어.
그녀가 간 곳은 어느 음식점이었어.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이었어. 일하는 곳에서 저녁을 안 챙겨줬을 리 없어.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에도 집에 들어와서 뭘 먹은 적이 없었으니깐. 저녁 약속을 위해서 식사를 하지 않은 셈이야.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마냥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어.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른 척할 수도 없었으니깐.
지금쯤 무엇을 먹고 있을까? 식당은 꽤 호화스러웠어. 아마도 비싸고 맛있는 음식이겠지. 그녀와 함께 이런 곳에 와본 게 언제였더라? 꽤 오래됐던 거 같은데. 그동안 왜 안 왔었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야. 이런 곳에 와야 할 정도로 특별한 일도 없었고. 이런 곳에 오지 못할 정도로 돈이 부족했었나? 아니었어. 오히려 이런 곳에 오고 싶다면 충분히 올 수 있었어. 단지 거추장스러웠을 뿐이야. 이렇게 격식을 차리며 무언가를 먹는 곳은. 우리가 같이 외식한 게 언제였지? 아니. 같이 식사를 한 건 언제였지? 그녀는 일하러 가기 전까지 잠을 잤어. 우리는 좀처럼 만날 일이 없었어. 같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왜 그랬지?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이제 그녀의 남자친구가 알아서 잘해줄 테니.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왜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그냥 친구인데 왜 미안해야 하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무색하게 그녀는 생각보다 일찍 나왔어. 아니면 내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나간 걸지도 모르지. 그녀의 표정은 매우 밝았어.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알아볼 수 있었어. 그녀와 남자친구는 가볍게 키스를 나눴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행복해 보였어. 그들은 손을 잡고 장난치듯이 흔들면서 걸어갔어. 걸어가는 방향을 보면 집으로 가는 듯 보여.
이제 집까지만 무사히 돌아가면 돼. 나도 따라가야겠지? 저 둘을. 하지만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았어. 행복해하는 그녀의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좋은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이 기억났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아니면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걸까. 그저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 단순한 우연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꿈을 해석할 때.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그래서 어떤 꿈을 꾸든 나쁘게 생각한 걸지도 몰라.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왜 내가 위험에 빠졌을 때 꿈이 끊겼을까? 기존에 꾸던 꿈이랑 너무나 다른 성질의 꿈. 이 꿈…… 맞는 걸까?
더는 그들의 뒤를 쫓지 않기로 했어. 다른 길로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은 그들이 가고 있었고, 좀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
그녀가 떠나면 나는 혼자가 되겠지? 혼자서 지내는 돌연변이는 많았어. 나라고 해서 혼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깐. 생각해보면 그녀와 함께 지내도 함께 지내는 거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자주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고,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아니었어. 우리는 뭐였지? 우리가 친구라고 할 수는 있었을까?
집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어. 그녀는 이미 도착하고도 남은 시간이었을 거야.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어. 일부로 꿈에서 본 골목길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 집에 들렀다가 그녀가 없으면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 같았어. 그 골목길에 당연히 없을 거로 생각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어.
“오늘 가지 않으면 늦어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갈 수 없어요.”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지 확인했어. 그곳에는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장면을 볼 수 있었어. 꿈과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하는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일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을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해요.”
“하지만…… 걱정할 거예요. 내일 아침에 제가 없는 걸 알면 많이 걱정할 거예요.”
“그는 친구라고 했죠?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요. 그가 단순히 친구라는 것을 보여줘요.”
“하지만…… 알겠어요. 오늘 세례를 받으면 내일 돌아올 수 있는 거죠?”
“세례를 받고 나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어요. 단지 너무 늦었으니 쉬고 가라고 한 거예요.”
세례? 세례라면 종교에서 사용하는 단어인데. 저들은 종교인들인 건가? 만약 저들이 종교인이 맞는다면 그녀를 막아야 해. 세례는 종교에서 돌연변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의식이야. 그들이 평생 인간을 위해서 봉사하기로 약속한다면 몸속의 악마를 몰아내 주는 의식. 하지만 그들의 행동엔 큰 오류가 있어. 그 말대로 악마를 몰아냈다면 당연히 능력도 사라져야 하지만 능력은 온전히 남아있어.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다면 어디에 활용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어. 그녀를 평생을 노예처럼 일하게 할 수는 없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나가면 꿈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상황이 될 거야. 어떻게 해야 상황을 바꿀 수 있지?
“정말…… 세례를 받으면 내 능력이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죠?”
“물론이에요. 당신은 선택받았어요. 그 능력은 정말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어요.”
“세례를 받고 늦더라도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친구가 걱정하게 할 수는 없어요.”
“좋아요. 그렇다면 같이 가요.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그녀가 그들을 따라가려고 움직였어. 그때 복면을 쓰지 않은 유일한 자의 얼굴이 보였어.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어.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다니. 참을 수가 없었어. 잠시라도 좋게 생각했던 것이 화가 났어.
“가지마!”
모두 나를 바라봤어.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사라졌어. 숨어버린 거야. 그녀는 그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숨은 게 아니라 나에게서 숨었어. 허탈한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복면에게 제압당했어. 팔이 저렸어. 고통이 느껴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어. 이 상황은 꿈에서 봤던 상황과 같았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왜 나선 거지? 그녀는 나를 보고 숨었는데. 그녀가 노예가 되든 영웅이 되든 그녀의 삶에 왜 참견한 거지. 친구라서? 우리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였나? 팔은 점점 아파졌고 그는 나에게 다가왔어.
“당신이 그 친구인가요? 마지막까지 마음에 안 드는군요.”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입을 여는 순간 비명이 나올 거 같았거든. 하지만 비명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어.
“저는 당신만큼이나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저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당신은 모른 체했다는 점이죠. 그녀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이 정도에서 멈추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그녀를 생각한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풀어줘.”
그들은 부러뜨릴 것처럼 조이던 팔을 놓았어. 고통 때문에 정신도 같이 놓을 것 같았지만,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어.
“너희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지 알고 있어. 그녀가 원하는 도움은 그런 게 아니야.”
나오는 대로 떠들어봤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을까?
“그녀는 영웅입니다. 신에게 선택받은 능력이죠. 당신처럼 악마에게 선택받은 게 아니에요. 그 정도 수준에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야겠습니다. 이제 그녀와 작별인사를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차라리 잘 됐어요. 안 그래도 그녀의 곁에서 당신이 머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그들은 사라졌어.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사라져버렸으니 그들만 사라졌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아직도 내 곁에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어.
집으로 돌아왔어. 팔도 아팠지만, 그것보다 피로했어. 그녀가 스스로 떠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피로했어. 너무 많은 생각과 일들이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났어. 오자마자 침대에 누웠어. 꿈이 미래를 알려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그 다음 날 알게 되지만 의뢰인으로부터 메일이 와있었어.
[혼자서 지내는 게 아니라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걱정하셨던 일은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