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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라면.txt
게시물ID : cook_821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ovle
추천 : 8
조회수 : 89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2/24 21:40:22
겨울도 다 지났지만 아직도 춥다면서 벌레가 기어나올 듯한 자취방바닥에서 동면을 준비하던 작년 이맘때였다.
임용고시도 떨어지고 대역죄인 재수생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취방에서 평소처럼 라면을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귀여운 즐거움을 긁으며 라면을 찾던 중 텅 빈 냉장고는 물론이요 내 자취방에서 나올 수 없는 물건, 미역을 발견했다.
자취를 시작하면 요리해서 밥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며 독립할 때, 첫 요리로 끓어먹었던 미역국.
그 보잘것 없는 다짐은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지 오래이지만 이렇게 미역은 오롯이 남아, 아직도 4년은 버틸 수 있다는 자세로 찬장에 앉아 있었다. 
씁쓸한 기억에서 눈을 돌려 라면을 찾아내고, 나는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라면에 미역을 넣으면 마치 너구리의 다시마처럼 장대한 황하강의 국물맛을 느끼게 해준다는 어떤 스갤러의 글을 읽은 기억에 망설이지 않고 하루의 구세주, 라면에 내 다짐이 섞여있던 그 미역을 넣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커다란 실수였다는 120초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말린 미역은 불려서 투입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다행히 미역을 적게 넣은 덕분에 냄비째 타들어가는 참사는 면했으나,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이름모를 스갤러가 그토록 극찬했던 국물은 저 북괴 돼지같은 미역들에게 모조리 빼앗겨버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허투루 보내버릴 수 없었기에 나는 즉시 불을 끄고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나의 배를 만족스럽게 채워줘야 할 라면은 당연히 설익어있었고 군데군데 내가 어릴적 '새우'라고 부르던 면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면을 흡입하는 시간에도 미역을 탐욕스럽게 국물을 빨아들였다.
나는 그때 미역을 건져내면 된다는 사소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그 미역에 남자의 허튼 투쟁심이 발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잠깐동안 미역과 푸드파이팅을 벌이던 나는 결국 내가 졌음을 시인하고야 말았다.
면과 미역을 모두 들어내자 남아있는 것은 숟가락 하나에 찰 것 같지도 않은 국물 한 줌.
그리고 물을 양껏 먹은 미역들은 초췌한 내 얼굴과는 달리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힘없이 미역을 건져먹으며, 남아있는 국물 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만고불변의 명언을 들 것도 없이.
그 라면국물은 내가 먹은 라면 국물 중 가장 맛있는 국물이었다.
알싸한 라면스프에 이어 나타나는 섬집아기같은 바다의 냄새.
나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맛있는 라면은 끓여본 적이 없었다고 자부한다.
나는 아기같이 순수한 미역들을 건져먹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미역은 백수였던 내게 라면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먹으려는 투쟁과 설익은 라면을 먹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운동소리가 마치 어머니의 등짝 스매쉬처럼 은은히 울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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