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역사학의 성립과 역사교육
- 19세기에 보조 과학들의 등장으로 역사학의 과학적 위상에 대한 믿음을 확고해졌다. 또한 과학적 담론과 문학적 담론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흔히 근대의 역사학의 출발점을 랑케사학에서 찾는다. 랑케에 의하면 역사학의 임무는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역사연구는 사료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내는 것이었으며, 사료비판과 분석은 주된 방법이었다. 또한 연구 대상은 개인의 견해나 해석이 가미되지 않은 공적인 문헌사료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정치사, 외교사, 제도사 등이 주된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이 역사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역사학은 대중에 전달하는 것도 과제로 삼기 시작했고, 중등학교의 공교육 체제가 갖춰진 이후 주요과목으로 자리잡았으며, 역사교육의 목적은 교훈이 아닌 사실 그 자체를 아는 것이 두어졌다. 그리고 역사적 인과관계가 역사서술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역사학습의 주요 원천은 사료가 되어 그 가치를 인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 중심의 역사서술은 역사적 맥락을 잃어버렸고 사회의 구조를 파악에는 매우 소홀하였다.그리고 역사학습이 곧 암기라는 인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지나친 공적 문헌 위주는 다양한 자료의 활용을 제약했고 인간의 삶의 모습을 배우는 것은 어려웠다.
20세기 새로운 역사학의 등장과 역사교육
- 20세기에 접어들며 랑케류의 근대적 역사관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신사학, 프랑스의 아날, 영국의 내미어, 독일의 사회구조사학 등이다. 이러한 것은 이야기체, 사건 중심에서 사회과학적 역사연구와 서술로의 전환이었다. 이 때의 주된 관심은 개별 사건들의 연결된 과정과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들의 공통적 경향은 첫째, 역사학의 목적을 현재의 문제 해결과 미래의 예측에 둔 것, 둘째, 사상사를 포함한 더 넓은 영역에 걸쳐야 한다는 것, 셋째, 사회화학의 방법론과 개념을 이용하며 다양한 자료를 활용한 것, 넷째, 역사학의 임무를 시대착오나 사상, 제도의 불합리성을 규명하고 현재가 가지는 의미를 찾아주는데 두고 있다.
이러한 역사 동향에 대해 비판이 쏟아졌다. 역사학은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데 너무 몰가치적이라는 것, 지나친 전문화로 역사학의 대중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 사회과학자와 역사학자간의 교류가 미흡하며 사회과학적 지식의 습득이 쉽지 않다는 문제점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의 도입에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선 사회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점,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관심 대상의 차이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에도 꾸준히 역사학은 연구 범위를 확대하고 방법을 다양화 했다. 사회과학적인 방법의 도입으로 새로운 연구 분야가 개척되었다. 이는 역사인식이나 해석의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였다.
역사교육에의 영향은 우선 역사변화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역사 변화의 원동력, 사회구성원 간의 관계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민중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사회경제사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그리고 이전보다 다양한 자료가 활용되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영향도 많았다. 사회적 구조에 지나치게 매달려 역사에서의 인간적 요소를 경시하여 역사가 사회결정론적으로 인식되게 될 수 있다는 점, 구조라는 거시적 관점으로 서술하여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데는 실패한 점, 역사를 배우면 오히려 흥미를 잃게 되는 모순을 낳았다. 그리고 과학적 역사의 강조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독자성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학교교육에서 역사교과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포스트모던적 역사인식과 역사교육
- 20세기 후반 세계대전과 근대적 경제성장이 가져온 부정적 측면, 유태인 대학살 등에서 경험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역사학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등장한 것이 포스트 모던적 시각이었다. 이는 근대사회에서 형성된 인류사회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부정한다. 발전에 대한 부작용이 커져감에 따라 회의론이 제기되고 사회발전의 기준을 새롭게 세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서구사회의 발전에서 틀을 가져온 거대 담론이 종말을 고하고, 서구도 여러 문명의 하나라는 인식이 나타났다. (지역 담론의 대두) 그동안 경시되어 왔던 소수인종의 역사나 페미니즘적 시각의 여성사도 역사서술에 포함시켰다. 또한 일상생활과 경험에 관심을 쏟았고, 이색적 문화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와 역사학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역사를 과학보다 문학에 가깝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이른바 '언어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언어학과 문학이론이 역사학에 도입되었는데, 텍스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언어학의 텍스트론은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언어는 단순히 현실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 담론은 언어적 허구이다. 따라서 역사연구와 이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료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배경을 이루는 사회적 맥락이 아니라, 자료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 자체이다. 그런데 텍스트는 언어의 속성상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독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자료에 일관되고 통일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염두에 두지 않는 '해체적 읽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문화사도 역사연구의 두드러진 경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문화적 현상에 나타나 있는 역사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문화를 역사연구의 중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는 문화현상에 내포된 의미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 코드로 설정함으로써, 문화를 통해서 역사를 바라본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은 외형적으로 사회적 구조의 한 틀을 이루고 있거나 사회적 영향을 주는 사건이 아닌 일상문화이다. 즉, 미시사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신문화사에서는 역사연구를 이들 일상문화의 해명, 즉 사회적 표현들의 의미를 재구성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교육에의 시사점를 보면, 텍스트론은 교과서와 같은 교재에 담겨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주어 자신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문화사의 관점으로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역사적 사건이 역사교육의 소재가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민중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다.
정선영 외, 역사교육의 이해, 2001, 삼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