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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정치성과 순수성의 구분
게시물ID : phil_83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lemnTruth
추천 : 2
조회수 : 535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4/02/19 15:56:22

비판이라는 것이 실상은 자기자신의 자아가 확립되지 못하여 상대방을 공격함으로써 안도감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한다. 물론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내가 하는 비판마저 위에서 언급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라 생각할 지 모른다.  나는 그래서 이성적 철학적 사유로만 이 문제를 풀 생각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이성적 철학적 사유의 동기 자체를 위와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상의 기반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공통기반을 찾아 비판할 것이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왜 틀렸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부터 기인한다.    

 

이 시각차이에 대해서 분석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에 대해서 먼저 분석하고자 한다. 지금 세계는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세계이다. 

실제로 나치의 유태인학살과 같은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때문에 기인한 것이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력하게 각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이 사실상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릴릴 소지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였다고 하여 실제로 민족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듯이,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하여, 비판=폭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비판이 폭력이 아닐 수 있다면, 비판은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비판은 두가지의 측면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우선, 비판은 참과 거짓에 대한 순수한 감정적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다. 

자기가 비판함으로써의 결과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하는 거짓에 대한 반감 그리고 참에 대한 사랑, 이것이 비판의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준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언변을 순수치 못한 이유로 이용하는 사람에게 비판의 날을 세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게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 했을 뿐이다. 

 

"나는 당신들이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랄 뿐이요"

"그럼으로 진짜로 알아야 할 것인지 무엇인지 당신이 알기를 바라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는 사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비판의 두번째 목적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비판의 두번째 이유는, 타인의 대한 연민이다. 우리는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를 버려두고 가기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은 일종의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싸움을 피함으로써 상대방이 자기의 생각에 대해서 다시한번 고찰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상대방의 증오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네가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그러한 태도는 분명이 옳은 순간이 있다. 비판이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때 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에 빠져있으면 나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서 충고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전무하게 된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나를 위한 비판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그것에 대한 실제적 예는 있는지 이다. 

 

나에게 가장 순수하고 친숙한 비판의 이미지는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폭력적일까?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미래에 대한 사랑어린 걱정과 삶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도

좋은 어머니는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반성할 정도의 벌을 가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벌이 폭력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여도 그것은 아이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위에 대한 느낌이다. 권위에 대한 반감이 있다면 절대로 타인이 나에게 비판하는 것이 순수하다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권위에 대한 반감이 없는 사람은 설사 타인이 나에게 폭력적으로 비판을 들이밀어도,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의 파편을 인지하고 거기에 순응한다. 

 

권위에 대한 느낌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정환경일까?  삶의 경험일까? 권위에 대한 느낌에 따라서 권위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결국 누군가는 오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권위라는 것을 나를 위에서 찍어누르는 것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부족한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비판에 대한 시각도 달라진다. 

 무엇이 오해일까. 무엇이 오해인지 알려면 우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의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 소크라테스만큼 진실된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기에 실상 비판을 순수성이 아닌 정치성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을 가진다. 

허나, 그러한 설득력 또한 어디까지나, 비판의 순수성을 전제한 상황에서나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무엇이 참이고 거짓이냐는 것은 순수한 진리의 존재를 전제하고서나 성립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위선의 탈을 쓴 모사꾼들일 뿐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의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비진리의 입장에서 진리를 논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의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가장 순수한 입장은 나는 비진리이지만, 그렇기에 진리를 추구한다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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