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훈(가천한의대 본과2년) : 무척 가난했다고 알려진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어떤 꿈을 갖고 있었는지? "큰 꿈 없었다. 물에 빠져 있었으니 헤엄쳐 나오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 취직해야 했다. 공장 생활 2년쯤 되던 어느 날 왼쪽 팔이 기계에 끼어 비틀어져 버렸는데, 사고로 팔이 비틀어진 때가 사춘기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사는 게 암울하다 보니 극단적인 선택을 두 번이나 했는데, 실패해서 결국 살아남았다. 공부한 이유도 아주 단순하다. 맞기 싫어서, 내가 맞는 거 엄청나게 싫어한다."
장재훈 : 대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마치고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사립대학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 주면서 일정 금액의 학비까지 주는 제도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돈 제일 많이 주는 대학이 중앙대학이라 거기 간 것이고, 법대를 선택한 것도 돈 때문이다. 당시 법대 가면 등록금 면제해 주면서 매월 20만 원씩 주었다. 갔더니 판·검사 시험 있다고 해서 죽어라 공부해서 사법시험 합격한 것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다."
장재훈 : 변호사가 된 이유는? "판·검사 안 하고 변호사가 된 것은 변호사가 자유롭게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을 한 배경에는 '광주의 진실'이 있다.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이른바 의식화가 된 것이고 삶 자체도 이기적인 삶이 아닌 공익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팔을 다치고도 보상 한 푼 못 받은 게 오롯이 내 탓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됐다. 대학에 가서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됐는데, 정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내가 나쁜 사람이었구나' 하고 뼈아프게 반성도 했다. 그전까지 요즘으로 치면 내가 '일베'였다. 공장 다닐 때는 광주사람들이 북한과 연계돼서 우리나라를 전복하려는 폭도인 줄 알고 그 사람들 욕하고 다녔다.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에 가담한 것이다. 이래서 정보가 중요한 것이다. 엉터리 정보를 얻게 되면 그 정보를 준 사람들의 노예로 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하니 정말 열 받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