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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군제개편(4) : 갑오개혁 이후 ~ 아관파천 이전
게시물ID : history_74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댓글매니아
추천 : 10
조회수 : 69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2/03 02:35:14

1. 정책의 배경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결과적으로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청나라와 일본 양국의 군대를 조선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 처럼 양측의 조선을 사이에 둔 신경전이 날로 치열해지는 가운데 이 둘의 치열한 신경전은 결국 1894년에 시작된 청일전쟁으로써 정점을 이루게 되죠.


  

                                                                                 <청일전쟁 당시 청군 포로들>

 1895년까지 이어진 약 1년간의 육지와 바다를 넘나드는 치열했던 전쟁은 결국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고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거두어야만 했습니다. 경쟁자가 사라진 일본은 이제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간섭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이는 궁궐을 강제 점령하고 내정 개혁을 강요하는 것으로써 시작됩니다. 이러한 강요 속에 이루어진 것이 바로 1․2차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이며 이를 통해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을 근대화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군제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는데 궁궐 강제 점령 후 사실 상 조선군은 해체 당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청나라와 맺은, 양 국가는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위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제 개편을 단행하되 다만 기존의 청국식을 지우고 일본식으로 재개편하는 방향으로써 진행 시켜 나아가게 됩니다.


2. 정책의 진행


 갑오개혁 이후의 군제 개편의 첫 단추는 군무아문의 설치로써 시작됩니다. 이 군무아문은 기존의 육조가 8개의 아문으로 개편되면서 형성된 아문으로 전국의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지금의 국방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이후 군무아문은 을미개혁 이후 군부로 새롭게 명칭이 바뀝니다.) 또한 지휘 계통에도 변화가 일어나 육군 중에서도 중앙군의 경우 친위군의 지시를, 지방군은 진방국의 지시를, 해군은 해군국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새롭게 개편되었습니다.

 군무아문의 설치와 지휘 계통의 정비와 더불어 기존의 친군영 체제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바로 일본식으로써 새롭게 재편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친군영을 이어 새롭게 개편된 것이 바로 훈련대와 신설대, 시위대였습니다. 가장 먼저 훈련대의 경우 명칭과는 달리 현역병들로 이루어진 정규부대였으며 편제는 일본식을, 산하에 사관양성소도 갖추어 초급장교들을 길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훈련대는 총 3개 규모로까지 확장되었으나 이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에 동원되었다는 비난이 이면서 해산되고 마며 그 산하에 있었던 사관양성소도 결국 1896년 육군무관학교로 전환된 뒤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는 신세를 겪게 됩니다.

 이어 신설대는 일종의 사역부대로 친군영 중 훈련대로 개편되지 않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새롭게 개편한 부대로 이후 친위대 증강 과정에 있어 인원이 지속적으로 차출되면서 유명무실화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시위대의 경우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훈련대와 달리 고종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부대로 이는 훈련대가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된 부대였기에 이를 경계한 탓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경우 본래 훈련대에게 궁궐 수비를 담당토록 하려고 하였으나 러시아와 미국의 항의와 삼국간섭으로 인해 국제적 입지도 어려워지면서 결국 초기에 계획했던 것과 달리 시위대를 새롭게 창설하여 궁궐 수비를 맡기는 것으로 변경된 것도 크게 작용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시위대는 과거 폐지된 연무공원의 교관이었던 미국인 교관에게 훈련을 받으며 일본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을미사변 이후 훈련대가 해산되는 과정에서 함께 해산되고 맙니다.



결국에는 갑오개혁 이후 친군영 체제를 대신에 구축된 훈련대, 신설대, 시위대 모두가 각자의 이유에 따라 해산 및 유명무실화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을미개혁 이후에는 갑오개혁 시기보다 더 대대적인 개편을 겪게 되는데 바로 조선의 육군을 중앙군인 친위대와 지방군인 진위대로 통합 및 재구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의 기본 틀로써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복장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전통적인 벙거지 등의 전통적 복장에서 서구식을 도입한 새로운 복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 고종이 관심을 보였던 해군과 관련해서는 일본에 의해 통제영학당이 폐지되고 해군통제영 또한 해군국으로 통합되면서 고종의 해군 양성 계획은 좌절을 겪게 되면서 오히려 쇠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종의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되었던 시위대가 해산되고 결국 다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한 친위대가 궁궐 수비를 담당하게 되면서 을미사변 이후 극도의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고종은 더 이상의 궁궐 생활은 무리라고 판단,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면서 이후의 군제 개편은 갑오개혁 이후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군제 개편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3. 정책의 한계


 이 당시에도 여전히 기존의 한계점들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재정의 부족, 집권 계층들의 부족한 인식, 친위 부대 및 중앙군 위주의 개편, 외세의 영향력 등등...

 그러나 이때에 보인 가장 큰 한계점은 다름 아닌 지방군제 개편 과정에 있어서 김홍집 내각이 별 다른 대안 없이 전통적 지방 군제를 와해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김홍집 내각은 임오군란 이후 형성되어 온 청식 군제를 해체하고 새롭게 일본식 군제로 전환하기 위해 지방군제의 개편을 위해 조선의 명령지휘체계였던 병부제도를 정지시켜버리는데 이는 새로운 군제의 적용에 앞서 있을 수 있는 동요, 부작용 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시행하였다고는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것이 새로운 대안이 미처 마련되기도 전에 시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대안은 없는데 일단 군제를 와해시키고 본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지방군의 지휘 체계와 군제의 붕괴 및 을미개혁 이후에나 계획된 진위대가 편성되기 이전까지 방치로 이어졌으며 이는 곧 지방군의 공백 사태를 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은 여전히 당시 지도부가 계획을 하는데 있어 얼마나 안일무위하게 행하였나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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