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박상순
나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보지만 창문을 열고 십팔 층에서 뛰어내리는 절망에는 비상구가 없어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풍경/도종환
조각난 너를 가지고 폭죽을 만들겠다
너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질 것이다
두 팔을 활짝 벌려 너를 안아주겠다
열리지 않는 책이 되어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겠다
스크랩북/오은
당신이 모르는 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자꾸 빠져들어가는 게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모르는 체하고
연습/최승자
그러니 함께. 멀리로 가자 아름다울 몫이 남아있다
투어(鬪魚)/이혜미
네가 흘리고 다닌 마음의 무게에 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무거워져
내가 더 이상 발걸음을 뗄 수조차 없게 되었을 때
너는 나를 떠난다고 했다
네가 흘려놓은 마음을 한팔 가득 안고 있던 나는 마지막으로 너를 안아줄 수도, 이별의 악수조차 나눌 수없었다
내가 붙잡고 있던 너의 마음을 놓아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냥 눈물이 나/이애경
모든 밤들이 너를 위하여 있었다
너는 밤마다 켜져 있었고,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았다
때로 너로부터 도망치려 너를 잊으려 모든 밤들이 너를 밟고 끄고 지나갔지만 너는 죽지 않고 있었다
별1/송찬호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
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
들꽃에게/서정윤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일요일의 노래/황인숙
어떤 날엔 가만히 있어도 지구가 자전하는 것이 느껴졌다 현기증이 사시사철 유행했지만 약국에서는 여전히 감기약만 팔았다
어떤 날엔 선글라스를 낀 알비노들이 큰맘 먹고 외출을 시도했지만 세상의 채도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2/오은
네가 알아채주었기에 나는 너를 사랑해 부디,나를 사랑할 수밖에는 없다고 각인된 그 손금 담긴 너의 두 손으로 나의 목을 졸라줘
마음사전/김소연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처럼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오선지의 비탈을 한 칸씩 짚고 오르듯, 후후 숨을 불며.
햇빛 달빛으로 욕조를 데워 부스러진 데를 씻긴 후
성탄트리와 어린 양이 프린트된 다홍빛 담요에 당신을 싸서
가만히 안고 잠들었다 깨어난 동안이라고 해야겠다.
일월이 시작되었으니 십이월이 온다.
이월의 유리불씨와 삼월의 진홍꽃잎과 사월 유록의 두근거림과 오월의 찔레가시와 유월의 푸른 뱀과 칠월의 별과 꿀, 팔월의 우주먼지와 구월의 청동거울과 억새가 타는 시월의 무인도와 십일월의 애틋한 죽 한 그릇이 당신과 나에게 선물로 왔고
우리는 매달리다시피 함께 걸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괜찮은 거야.
마침내 당신과 내가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십이월이 와서,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우리는 천천히 햇살을 씹어 밥을 먹었다.
첫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 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한 우리는 함께 무덤을 만들고
서랍 속의 부스러기들을 마저 털어 봉분을 다졌다.
사랑의 무덤은 믿을 수 없이 따스하고
그 앞에 세운 가시나무 비목에선 금세 뿌리가 돋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이미 가벼웠다.
고마워. 사랑해. 안녕히.
몸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일월이 시작되면 십이월이 온다.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십년 동안 나는 참 좋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
이런 이별—일월의 저녁에서 십이월의 저녁 사이/김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