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판, 그 여자라는 나의 나무는
햇빛이 유리속으로 기어들어갈 때
당신은 나를 향하여 웃고 있습니다
나는 그 앞에서 작은 벌레가 되지만
나무가 되는 나의 여자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빼앗을 수 없는 빙판이라고 하지만
내사 햇살이 되어
그 여자의 앞으로 걸어갈 때
그 여자는 왜 내 곁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까
바람이 불면서 노을이 밤속으로 꺼꾸러지고 있습니다
강폭을 갈라내는 동안
무수히 쏟아지는 건 별입니까
내 목숨입니까
내가 그 여자에게 약속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까닭의 전부이지만
그는 나에게 아주 작은
눈빛 하나조차 떨구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그는 왜 나의 나무가 되어서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는 것입니까
나는 왜 나무기둥처럼 서서
나무가 된 그 여자의 허상을
깊이 앓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을 때
그는 하나씩 옷을 벗어야 하는데
내가 미소를 흘리고 있을 때
그는 작약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야 하는데
차갑게 내려다보는
그 여자의 발치에서
나는 떨고 있습니다
새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양중해, 낮달
처음부터 당신은
나의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외로운 고갯길에서의
그것은 인연일 뿐이었습니다
나는 고개 위에서 휘파람을 불었고
날리는 엷은 사
스치는 구름 사이
당신은 선녀였습니다
내가 걸으면
먼 산도 가듯
당신도 거닐었고
내가 발길을 멈추면
우뚝 선 산처럼
당신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저리도 아득히
너무나 멀고 높은 데서
빛나지도 않고
있으면서도 없는 듯
당신은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기다리는 이도 없는 못가를
어찌하여 나는
그렇게도 서성거렸던 것일까요, 또
호수 가득히 내려앉은 저녁을
거기 조용히 잠겨 있는 것도
아, 당신의 얼굴이었습니다
세상은 하늘처럼 넓어도
없는 듯이 있는
당신뿐이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더더욱 환하게 되살아나는
당신의 얼굴 뿐이었습니다
김미선, 남이 되기 쉬운 나
이슬이 내린 아침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처럼
그렇게 살아왔네
한 대지 위에
함께 살면서도 가끔은
남이 되기 쉬운 나
나를 안아줄 사람
아무도 여기에 없네
나 사랑하던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가야할 시간인데
검은 돛배에
자리를 함께 해 줄
길 잃은 작은 새도 좋아라
나를 안고
멀리 떠나가 줄 이 찾아서
지금도 나는
거리를 걷는다
이정하, 허수아비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 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 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김재진, 끝난 사랑
끝난 사랑을 위해 펜을 든다
모든 건 끝났다
마침표를 찍고
기진해 누워 있던 젊은 날의 기억
지나간 시간을 묶어 망각 속으로
발송을 마친 사람들이 돌아온다
사랑은 끝났다. 철없는 일이라 혀를 차며
행인들 속에 손 내밀어
포승을 받는다
지나간 사랑은 묶여 어디로 가나
링거 꽃고 혼수상태로
사람들의 청춘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