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 이별
만약 우리가 떨어져 있지 않다면
저 길들이 무엇에 필요하리
우리가 떨어져 제각기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 밤의 불빛이 무슨 소용 있으리
등 뒤의 저 바다가 출렁이고 있음도
우리가 떨어져 있어 더욱 크게 들리고
모래 위에 나란히 두 발자국 찍으면
그 사이로 해풍은 불어 오리
만약 내가 시와 삶을 포기하고
그 바다로 간다면
그 바다에 일찍이
그대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면
이성선, 새벽길
이 길로 당신이 가장 먼저 오시기에
이 길은 세상의 길 중에
가장 외로운 길이기에
이 길 위에 당신이 쓰러지고
다시 별이 스러졌기에
당신이 누웠던 체온이 별빛처럼
지금도 따스히 남아 있는 자리이기에
마른 풀의 향내가
죽은 시인의 영혼처럼 나를 감싸고
외로운 당신 사랑의 눈길이
밝히는 이슬로 발 아래 떨어져
눈물짓는 길
풀이 없어지는 이 새벽의 풀밭길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새벽이 오지 않는 새벽 들판길에서
당신을 부릅니다
풀벌레로도 다시 오지 않는 이
이정하, 인사 없이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말 없이 떠나라
잠깐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거니
그래도 오지 않으면
조금 늦는가보다,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떠나라
박재삼,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 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전서영,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서 있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매서운 바람에 바들바들 떠는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습니다
한 계단만 밟고 올라섰더라면
유리벽 너머
많은 사람들이 짓고 있는 그 따뜻한 미소가
나의 것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오로지 한가지 밖에 모르는
미련퉁이기에
일념으로
그대 오는 발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나봅니다
그렇게 기다려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혹여라도
그대 오시다 보이지 않는
나로 인하여
짧은 슬픔이라도 스치고 지나갈까봐
차마 얼어붙은 몸일지언정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서 있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대가 오실 때까지